교육·연구

번호 150
제목 2011년, 영화 "완득이"가 드러내는 한국 사회의 욕망 -다문화 이미지에 대한 욕망

2012 1월 27 - 16:44 익명 사용자


2011년, 영화 ‘완득이’가 드러내는 한국 사회의 욕망

-다문화 이미지에 대한 욕망





한 사회에서 어떤 사건이 이슈가 된다는 것은 그 사건의 정치적 중요성에만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다. 이슈가 된 사건의 바탕에는 그 사회가 욕망하는 것, 특정 욕망을 필요로하는 구조가 놓여져 있다.

영화 ‘완득이’(이한 감독. 김윤석 동주역, 유아인 완득역)의 예상 밖의 흥행은 한국 다문화 관련 논의의 현상황을 보여준다. 영화상에서 드러나는 다문화란 다음과 같다. 불쌍한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에 와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노동을 하고, 그 노동의 시간 끝에 불법체류자가 되고, 불법체류자를 헐값에 부리는 악덕 기업주에게 다시 착취를 당하다가 끝에는 강제추방되는 상황, 이런 상황 속에서 몇몇 뜻있는 사람들-386의 후예들이 정의롭게 만든 센터에서 약간의 문화적 즐거움을 맛보는 것이 현재 대한민국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다문화다.

다문화주의를 이야기하는데 단일민족의 관념이 확고한 나라에서는 어쩌면 그 시작지점으로 적합한 상황일 것이다. 부유하지 않은 타국인, 백인-혹은 미국계 흑인이 아닌 사람들의 유입과 그로 인해 빚어지는 경제적, 제도적 차별. 이로 인해 나타나는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인식.

이 인식은 두가지로 나아간다. 하나는 이 차별이 당연하다. 둘째는 이 차별이 부당하다.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지점에서부터 다문화주의는 시작된다. 초기 단계로는 도덕적인 정의감, 동일한 권리를 가진 인간이다라는 생각에서부터 시작되는 따뜻한, 그러나 약간은 딱딱한 시선. 이런 상태에서는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불쌍하다 여기는 동시에 무언가 도와줘야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렇게 도와줘야하는 외국인에게는 한가지 전제가 깔린다.



‘이들은 착하다’



이들은 착하다. 아니, 내가 도와주려면 착해야 한다. 어눌한 한국말을 쓰고, 누구에게나 존댓말을 쓰고, 고향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이 있으며,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한국에 돈을 벌러 온 사람. 이런 식의 생각이 깔려있지 않다면, 이들을 도덕적으로 도와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착한 외국인에 대한 생각은 원작 ‘완득이’에서 영화 ‘완득이’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여러 인물들의 성격과 배경 수정을 통해 한단계 더 완전히 자신들의 욕망에 부합시켰다. 1)

그러나 실상 그들이 정말 도덕적으로 착한지는 미지수이다. 다만 그렇게 보고 싶은 정의로운 사람들의 욕망이 있을 뿐이다. 이들을 돕는 것은 동내의 종교단체, 혹은 도덕감이 충만한 사람들. 혹은 그들이 겪는 부당함을 보고 격분한 정의로운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이 도와줄 사람이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꼭 필요한 사람들이다.

이런 상황은 다문화에 대한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인간은 동일하다, 라는 생각에서 시작되는 제도적 싸움. 이때부터는, 이들을 최대한 제도적으로 차별이 없이 대하기 위한 운동에 나서게 된다. 단순히 불쌍한 시선과 선의의 도움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이들과 만난다. 이는 분명 필요한 단계이나 이러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한가지 전제가 있다. ‘인간은 동일하다.’ 라는. 문제는, 인간은 정치적-제도적으로는 동일해질 수 있을 지언정 실제로 동일하지는 않다.  2)

동일하다고 보는 순간, 감정이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 감정은 자신의 기억, 자신의 감정과 닮은 그들의 부분을 동일화시킨다. 일테면, 애를 오랫동안 버려두고 외국의 땅에서 일하는 완득이의 엄마를 보면서, 과거 한국의 어려웠던 어머니, 독일 등에 밑바닥 노동자로 떠나갔던 어머니, 고아원에 아이를 놓아두고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와의 동일시가 일어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경제적 상황이 있고, 사회적 제약이 있고, 나의 역사에 그런 일이 있었으므로 나와 같은 경우들을 이해할 수 있다라고 여기는 동감의 감정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 감정의 동일화를 위해 영화상에서 동감의 대상들은 구체적인 개인의 개성과 떨어진 시간 동안 겪게 될 감정상의 골이 드러나지 않는다. 어머니는 아직도 선하고, 눈물을 달고, 낡은 옷과 구두를 신고, 십몇년만에 만난 아들을 위해 반찬이 가득한 도시락을 싸준다. 그리고 이런 식의 인물 조작은 극중 모든 인물들에게 나타난다. 개성적인 것 같지만, 그 개성은 관객의 흥미를 끄는 개성일 뿐 서로간의 간극을 보여주는 개성은 아니다. 3) 이런 식의 감정적 동일화는 갈등을 해소하는 중요한 지점이긴 하지만, 달리 보자면 또다른 갈등을 시작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점이 나타날 때, 서로가 용납할 수 없는 감정적 차이를 드러낼 때, 동일화는 파괴되고 동일화로 해소 될 수 없는 새로운 문제가 나타난다. 그리고 한 사회에서 사람들간의 갈등이 극으로 치닫는 경우는 다름아닌, 이렇게 동일화가 깨어져 동일화를 통해 재결합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이다.

다문화는 차이에서 시작한다. 동일하다고 여기지 않고 미지로 남겨두는 빈 공간이 다문화를 다룸에 있어서 필요하다. 이 차이의 빈 공간이 바로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시작지점이기 때문이다.







1)<씨네21> 826호. 원작과 영화의 차이에 대하여 분석해놓았다.

2)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긴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본문에서는 불필요한 살처럼 느껴진다. 아렌트의 논의를 끌고 올 것도 없이 단순화시켜보자면 인간이 정말 서로 다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르다고 여기는 마음, 달라서 모든 것을 자신의 잣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여기는 공백의 마음이 요청된다.

3)영화평론가 안시환의 최근 비평 ‘조화의 낙원, 비루한 것들의 카니발 완득이’에서 이런 인물들의 평면화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조화로운(調和) 조화(造花)의 낙원’ 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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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자 2018-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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