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연구

번호 145
제목 어머니의 삶에서 역사를 만나다

2012 1월 4 - 17:28 익명 사용자

어머니, 74년 만에 혈육을 만나다.

 






젊은 시절의 할아버지 사진과 영암에서 만난 할아버지의 육촌 형제. 어머니는 한눈에 가족임을 알아보았다.

“이 마을에서 ‘병(炳)’자를 돌림자로 쓰시는 분 가운데 제일 연세가 많은 어르신 댁이 어디지요?”

축사에서 일을 하시던 아저씨께서 동네 초입의 한 집을 가리키며 친절하게 일러 주셨다.

“계세요?”

2009년 6월,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전라남도 영암의 월출산이 마주 보이는 한적한 시골 농가를 찾아 떨리는 목소리로 어르신을 찾았다.

잠시 후 어르신 한 분께서 지팡이에 의지한 채 아주 느린 걸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우리가 있는 쪽을 향해 걸어 나오셨다. 그 분의 얼굴을 본 순간 어머니는 숨이 멎은 듯 한동안 아무 말이 없이 서 있다가 “아이고, 아이고.” 서러운 눈물을 흘리며 그 어르신을 끌어안았다. 어머니는 일흔 넷 당신의 인생 동안 참아온 설움을 단숨에 토해 내기라도 하듯 눈물을 그칠 줄 몰랐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어르신은 처음에는 당황해 하셨지만, 어머니가 “일제 때 일본 가서 죽은 병돈이 딸이에요.”라며 말을 건네자, 당신도 믿기지 않으신 듯 한동안 눈물을 함께 흘리셨다. 잠시 후 집 안으로 들어가 마주 앉은 어머니가 어르신께 한 장의 사진을 꺼내 보였다. 나도 오래 전부터 본 적이 있는 할아버지의 유일한 사진. 당신의 아버지가 남긴 유품으로는 어머니가 유일하게 간직하고 있는 단 한 장의 사진이다. 사진 속의 아버지와 지팡이를 짚고 눈앞에 나타난 어르신이 한눈에 봐도 너무나 닮았다. 그때에서야 어르신을 만난 순간 어머니가 자신의 아버지를 만난 듯 눈물을 흘린 이유를 알았다. 우리가 만난 어르신은 나의 할아버지와 육촌 형제 사이인 노병철 할아버지였다. 식민지 시대에 일본에서 태어난 어머니가 일흔 네 해 만에 처음으로 한국에 있는 아버지의 혈육을 만난 순간이었다.







어머니와 일본을 둘러싼 몇 개의 기억들





기억 하나,

1980년대 중반,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생일 무렵이었다. 어머니는 종종 이불 속에서 카세트플레이어에 이어폰을 꽂아 일본 노래를 남몰래 듣곤 하였다. “왜 일본 노래를 들어?” 일본과 관련된 것이라면 무조건 싫어하던 나는 의아해하며 어머니에게 핀잔을 준 적이 있다. 어머니는 나의 핀잔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냥 민망해 할 뿐이었다.



기억 둘,

예전부터 어머니는 “일본에 살 때가 행복했다.”는 말을 이따금씩 하곤 했다. 나는 그 말이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어머니가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것은 얼핏 알고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차별을 받는 조선 사람이 행복했다니... ‘혹시 우리 외할아버지는 친일파가 아닌가...’ 무언가 내가 죄를 지은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기억 셋,

1997년 일제 강점기의 강제연행․강제연행 희생자를 조사하는 ‘동아시아공동워크숍’에 참가하게 되어 처음으로 일본에 다녀온 뒤에 나에게도 재일조선인과 일본인 친구들이 생겼다. 이듬해 한국을 찾은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한 적이 있었다.

“곤니찌와!(안녕하세요)”

친구들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어머니가 유창한 일본어로 인사를 건넨다. 친구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일본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어머니를 보고 모든 가족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자 어머니는 한 마디를 건넸다.

“니네들이 싫어해서 그렇지. 나 일본에서 소학교 다녔으니 일본말 잘 한다.”



그 뒤로 나는 틈틈이 어머니가 살아 온 삶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어머니의 역사를 한 줄 한 줄 써 내려갔다.







어머니의 고향-도쿄 기타센쥬 고쵸메 쥬산반치





“도쿄 기타센쥬 고쵸메 쥬산반치(東京北千住五丁目十三番地)”

어머니가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자 내가 처음으로 물어 보았을 때, 1936년 도쿄에서 태어나고 자란 어머니가 또박또박 정확하게 외우고 있던 일본의 주소이다.

그 밖에도 ‘우에노(上野)공원’에 벚꽃이 만발할 때 동물원으로 소풍을 갔다는 이야기며, 당시에 다니던 소학교의 이름이 ‘아사히(旭)소학교’였다는 것, 도쿄가 공습을 당할 때는 새빨갛게 불을 뿜으며 하늘에서 쏟아지던 소이탄과 공습 뒤에 여기저기에 널린 시체들이 너무 무서웠다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신바시(新橋)’, ‘니시 아라이(西新井)’, ‘아라가와(荒川)’ 등의 지명도 기억하고 있었다.



1999년, 일본에 있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가 기억하고 있는 주소를 찾아갔다. 도쿄의 ‘기타센쥬(北千住)’ 지역에는 지금도 재일조선인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다.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니, ‘아라카와(荒川)강’의 강가에 커다란 ‘아다치구(足立区)’의 구립도서관이 자리를 잡고 있다. 도서관의 앞마당 한 구석에 작은 기념비가 있어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선명하게 새겨진 글씨가 눈에 확 들어왔다.

“1940년 8월 28일~1991년 3월 31일, 센쥬아사히소학교 옛터(千寿旭小学校跡地)”


 






센쥬 아사히 소학교 옛터 표지판

어머니가 자신의 일생을 통틀어 유일하게 다닌 학교의 이름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 도서관 바로 앞쪽에는 ‘센쥬 신바시(千住新橋)’라는 다리가 아라카와 강을 건너고 있다.

‘이 곳이 어머니가 나고 자란 고향이구나!’

50여 년의 세월을 뛰어 넘는 기억의 힘이 놀라왔다. 높다란 굴뚝이 솟아있는 동네 목욕탕이며 구석진 골목의 점방, 시원한 강바람에 푸른 풀잎들이 넘실대는 강둑의 풍경,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음직한 동네의 구석구석들을 사진 속에 담았다. 어머니는 그 사진들을 고이고이 자신의 앨범 속에 넣어 두고 지금도 가끔씩 꺼내보곤 한다.







‘아라카와(荒川)강’에서 할아버지께 술잔을 올리다


 






센쥬신바시의 아라카와강

‘아라카와(荒川)강’, 일제 강점기에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온 수많은 사람들이 이 강가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여, 지금도 이 강 주변에는 많은 재일조선인들이 살고 있다. 조선 사람들의 수많은 애환을 간직한 채 지금도 유유히 흘러가는 이 강에서 어릴 적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와 함께 물놀이를 했다. 한편, 이 강은 어머니가 1942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유해를 떠내려 보낸 곳이기도 하다.



나의 할아버지 노병돈(魯炳敦)은 1905년 식민지 조선의 전라도에서 가난한 시골 소작농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914년, 열 살의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를 모시고 대가족을 이루어 살던 나의 할아버지는 1932년, 스물여덟의 나이에 네 살 아래의 이웃 마을 처녀 김판금(金判今)과 결혼하였다. 대가족의 가장으로 먹고 살길이 막막했던 새신랑은 결혼한 뒤 첫 자식도 가지지 전에 새색시를 뒤로 하고 혈혈단신 현해탄을 건너 도쿄로 왔다. 이듬해 새색시는 홀몸으로 남편을 찾아 도쿄로 왔고, 슬하에 세 딸을 두었다. 1936년, 둘 사이에서 첫째 딸로 태어난 나의 어머니는 ‘노장순(魯長順)’이라는 조선 이름을 숨긴 채, ‘다케다 죠준(武田長順)’이라는 일본 이름으로 학교에 다녀야 했다.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살던 시간도 잠시, 외할아버지는 1942년 11월 3일, 서른여덟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서른 네 살의 아내와 어린 딸 셋을 일본 땅 도쿄에 남겨둔 채로. 첫째 딸인 어머니의 나이 일곱 살 때였다.

할아버지의 유골은 화장이 되어 절반은 고향으로 돌려보내졌다. 나머지 절반은 납골함에 담겨져 일본 사람들이 그렇게 하듯이 할머니가 집에 있는 불단에 모시게 되었다. 그런데, 세상을 떠난 남편이 꿈에 자꾸 나타나 너무나 무서웠던 할머니는 한밤중에 큰 딸인 어머니의 손을 잡고 나가 남편의 유골을 아라가와(荒川)강에 남몰래 떠내려 보냈다. 어머니는 지금도 그 날의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와 물놀이를 하던 추억이 깃든 강물에 뼛가루가 되어 버린 아버지를 떠나보내며, 일곱 살의 어린 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동네 가게에서 한 다발의 꽃과 술 한 병을 사들고 강가로 내려갔다. 큰절을 올린 뒤 꽃다발과 술을 강물에 띄어 보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57년 만인 1999년 처음으로 할아버지께 술잔을 올렸다. 그 뒤에도 자주는 못가지만 나는 도쿄에 갈 일이 있으면 할아버지를 찾곤 한다.


 



할아버지의 유해를 뿌린 아라카와 강변에서 술을 따른 후 절을 올리고 있는 필자

해방 뒤에 돌아온 조선에서의 삶-우리말을 못하는 조선의 소녀





일본 땅에서 서른넷의 나이에 홀로 되어 세 딸을 거느리고 살기에 힘겨웠던 할머니는 상처(喪妻)한 강원도 강릉 출신의 이(李)씨와 새로운 가족을 이루게 되었다. 두 가족이 합쳐져 자식이 아홉이나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이름은 ‘노장순’에서 새아버지의 성을 따라 ‘이장순’으로 바뀌었다. 해방이 되어 조선으로 돌아오기 위해 기차를 타고 시모노세키(下関)에 닿아 인산인해를 이룬 연락선에 겨우겨우 몸을 실었다. 힘겹게 새아버지의 고향 강릉으로 돌아온 어머니 가족을 기다린 것은 식민지 조선의 지독한 가난뿐이었다.

게다가 일본에서 나고 자랐기에 우리말을 전혀 할 줄 모른다는 것이 어머니에게는 무엇보다 큰 고통이었다. 우리말을 몰랐기에 학교에 다닐 수 없는 것은 물론이었다. 딸린 식구가 너무 많아 먹고 살기에도 힘겨웠기 때문에 어머니는 열 살 어린 나이에 남의 집에 가정부로 보내졌다. 가정부로 보내진 소녀는 너무나 힘들고 서러워 그 집에서 도망쳐 나와 눈물을 흘리며 달빛을 길잡이 삼아 집으로 돌아왔다.



일본에서 학교에 다닐 때 어머니는 “조센진(朝鮮人)”이라며 일본 아이들이 놀려대는 말이 그렇게도 싫었다고 한다. 1945년 3월 10일의 도쿄대공습 때는 불벼락처럼 떨어지는 소이탄을 피해 방공호로 몸을 숨겼고, 길거리에 널려있는 시체들의 모습이 너무나 끔찍했다고 생생하게 기억하는 어머니는 지금도 그 전쟁을 말할 때면 어김없이 “다이도아 센소우(大東亜戦争)”라고 발음한다.

조선으로 돌아온 뒤에는 학교 문턱에도 갈 수 없었기에 어머니는 나중에 야학에서 우리말을 배웠다. 우리말을 처음 배우는 재일조선인, 일본인 친구들은 일본말에는 없는 우리말의 받침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한다. 우리말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어머니에게도 받침은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한 미완의 과제이다.



도쿄에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어린 동생들과 함께 공습을 피해 다니며 온갖 고생을 했지만, 그래도 어머니의 삶을 통틀어 유일하게 학교를 다닌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은 도쿄이다. 나는 비로소 어머니가 “일본에 살 때가 행복했다.”는 말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해방 뒤에 조선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아직까지 한 번도 자신의 고향 도쿄에 가지 못했다. “어렸을 때 소풍을 갔던 우에노(上野) 공원에 벚꽃이 필 때에 도쿄에 꼭 가고 싶다.”는 어머니의 소망은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 속으로 꼭 돌아가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의 표현이기도 하리라.







2009년 6월, 할아버지의 고향 찾기





어머니의 고향에 도쿄에 대한 추억을 찾은 나는 그 뒤로도 계속해서 일제 강점기의 강제연행․강제노동으로 희생되신 분들의 유골을 발굴하고 유족을 찾는 활동을 계속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할아버지의 고향을 찾고 싶다는 바람을 말하였다. 그 곳에 가면 일본에서 돌려보낸 할아버지의 유골이 묻혀 있는 산소가 있을 지도 모르고, 친척들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은 어머니가 다니는 절에 할아버지의 위패를 모시고 있지만 언젠가는 당신의 아버지 고향을 꼭 찾고 싶다는 평생의 소원을 이제야 말한 것이다.

그러나 해방 뒤에 어머니가 의붓아버지의 고향 강원도 강릉으로 돌아와서 살았기 때문에 친아버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할아버지의 고향이 전라도라는 것과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남기신 단 한 장의 할아버지 사진밖에는 단서가 없었다.

나는 그동안의 유족조사의 경험을 살려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동사무소를 찾아가 어머니의 옛 호적인 제적등본을 떼어보았다-지금은 행정전산화가 이루어져 전국 어디에서나 제적등본을 발급받을 수 있다. 할머니와 의붓 할아버지의 본적지를 거슬러 올라가 다섯 통의 제적등본을 추적하여 열람한 끝에 결국 할아버지의 고향을 밝힐 수 있었다.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쌍풍리 700번지, 호주(戶主) 노병돈(魯炳敦)’



제적을 찾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역사에 대해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고, 웃지 못 할 일화도 있었다. 어머니는 지금까지 할아버지의 함자를 ‘노병도’로 잘못 알고 있었다. 그리고 평소에 당신과 성씨가 같다며 노무현 대통령을 유달리 좋아하기도 했다. 그런데 호적을 확인해 보니 노무현 대통령의 ‘노(盧)’와는 다른 ‘노(魯)’씨였다. 한편, 호적이 옮겨지는 과정에서 아래 여동생과 생년월일이 뒤바뀌어, 1936년생으로 첫째 딸인 어머니가 1942년생인 둘째 딸로 잘못 쓰여 있었다. 자매의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그래서 경로우대 혜택도 실제로는 여동생인 이모가 먼저 받았고, 올해 일흔 여섯 살인 어머니는 몇 해 전에야 비로소 ‘노인’이 될 수 있었다. 그 때까지는 어떤 연유로 생년월일이 뒤바뀌었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드디어 수수께끼가 풀린 것이다. 하기야 제대로 공부를 한 사람도 없었고, 먹고 살기에도 힘들었던 시절이라 일일이 그런 것에까지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으리라.

하지만, 어머니 자매는 사이가 좋아 경로우대 혜택이 어떻게 되든 별로 개의치도 않고, 당신도 이제 여든을 바라보니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법적으로는 동생으로 살기로 편하게 생각한 듯하다. 나는 지금까지 유족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이렇듯 형제, 자매가 뒤바뀐 경우를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제적에서 찾아낸 할아버지의 본적지를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함평 노씨(咸平 魯氏)’들이 살고 있는 집성촌이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이곳에 가면 살아계시는 할아버지의 친척들을 만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2009년 6월말, 반신반의하는 마음과 한편의 기대로 설레는 어머니를 모시고 형과 함께 전라남도 영암으로 향했다.

할아버지의 육촌 형제가 되는 어르신과 감격적인 만남을 한 뒤에 다른 친척 분들과의 만남도 이어졌다. 집안의 맏며느리 되시는 분께서 할아버지의 제사도 계속 지내주고 계셨다. 이제 1942년에 고향으로 돌려보내진 할아버지의 유해를 찾는 일만 남았다.





김영환(평화박물관 활동가)

역사교육 2011 여름 93호

첨부파일
작성일자 2018-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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