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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평화박물관] 텅 비어도 감각을 깨울 수 있는… / 정기용


세균전처럼 우리 사회를 감염시켜야 할 평화박물관 건립운동… 나는 어떤 공간을 꿈꾸는가


우리가 지금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한가로운 평화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살아남아 있기 때문이다. 잠깐만 우리 주변을 둘러보기만 해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전쟁과 학살사건들로 에워싸여 있는지 알 수 있다. 우리의 근대사는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학살과 죽음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다만 우리는 그 진실들을 모두 은폐하고 망각하면서 사는 것에 익숙해 있다. 아니, 이 사회의 전체 구조는 ‘비극’들을 무대 뒤로 사라지게 하고 기억하는 것조차 금기시하거나 심지어 좌파로 몰아세우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을 미덕으로 알 정도다.


죽음을 죽인 사회


오늘도 이 정부는 비극적 침략전쟁터 이라크에 전투병을 파견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하는 중이다. 일상적으로는 평화로워 보이는 우리의 삶조차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쟁을 방불케 하는 전투적 삶에 또한 익숙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진/ 파리 노트르담 사원 뒤에 있는 순교자 기념관. 관람객들은 두개의 관을 세운 듯한 입구로 들어가 좁은 통로를 지난 뒤 갑자기 사라진 도시의 소음 속에서 하늘만 보게 된다.(기용건축사사무소 제공)


우리는 살아남아 있으므로 평화를 위해 해야 하는 일이 있을 뿐 아니라, 왜곡된 삶의 방식을 지속함으로써 파괴되는 인간성을 감수하는 데 대한 반성과 성찰 또한 필요로 한다. 평화박물관은 바로 이 두 지점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이곳은 거대한 건물에 충격적인 전쟁 장면이나 무기가 진열되는 곳이 아니며,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곳이 아니라 진실을 구하고 대변하는 엄숙한 곳이며, 무엇이 우리를 진실로부터 은폐시키기를 바라는 것인지에 대한 고백의 장소이다.


해방 이후 이 나라의 역사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죽음을 죽인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 사회의 온갖 부정부패나, 심지어 지역감정까지 포함해서, 우리 핏속에 감염되어 있는 정의로운 것에 대한 불감증은 모두 학살과 죽음은 있으나 “그 일은 내가 했노라”라고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것에서 연유한다. 아직도 진상의 전모가 밝혀지지 않은 제주 4·3사건, 한국전쟁 중의 민간인 학살들, 청문회는 있어도 책임자는 없는 5·18광주민주항쟁 등 해방 이후 우리 주변은 미제의 학살사건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죽음은 본래 삶의 일부다. 죽음은 삶의 끝이나 종결이 아니라 삶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만일 죽음을 아무렇게나 다룰 때, 죽음을 삶에서 아예 도려내버릴 때 삶은 인간에게 반쪼가리의 의미만 담게 될 뿐이다. 이런 논리에 충실한 삶이란 바로 우리의 현재 얼굴이다. 재건축이란 이름으로 자기가 오랫동안 가족과 살던 집을 때려부수기 위해 ‘구조안전진단 통과, 경축 재건축’이란 플래카드를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내다거는 우리다. 살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거추장스런 죽음을 이미 우리 삶의 역사에서 분리해놓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건사고로 희생된 사람들 앞에서 당장은 통곡해도, 지나간 수많은 학살사건처럼 잊기를 식은 죽 먹듯 하면서 또다시 똑같은 희생을 부르는 것은, 사회적·역사적 모든 죽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감각기관이 소멸했기 때문이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회생시키고,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마음의 평화를 되찾아야만 한다.


‘고통의 연대’는 또 하나의 전쟁


사람들은 은근히 더 큰 참상과 비극을 기다린다. 단순히 비교할 수 있기 위해서 말이다. 따라서 도시에서 일어나는 현대의 전쟁은 일상과 전쟁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면서도 파괴의 리얼리티를 TV화면에 대비시킨다. 그것은 ‘현장’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로서 독립해 있는 듯 보이기까지 한다. 고대부터 전쟁의 기본은 경계로서의 성벽을 허무는 일로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맞이하는 전쟁은 전 지구적이면서 동시에 어디에도 실재하지 않는 듯한 착각 속에 빠지게 한다. 경계는 소멸되고 전쟁과 무기의 이야기만 남는다. 이렇게 매체가 대리하는 멀티미디어 전쟁은 평화의 이야기가 사이버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촉진시킨다.


평화박물관도 이제는 거대하게 땅을 점유하고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세균전이나 화학전과 같이 무색무취하지만 즉각적이고 광범위하게 침투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사이버평화박물관은 따라서 유물은 없고 교류만 있는 가상의 장소다. 이제 평화는 한가한 한담으로서가 아니라, 은폐된 진실을 규명하고 오염된 우리의 신체를 해방시켜 새로운 주체로 태어나는 메타모포시스의 책략이 수반돼야만 가능하다.


또한 우리는 죽은 자의 고통만큼, 아니면 그 이상의 고통에 연대하는 한에서만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다. 고통의 연대(solidarity of pains), 이것은 우리가 내면으로 치러내야 할 또 다른 전쟁이다.


아방가르드 화가 마르셀 뒤샹이 그의 묘비명에서 “죽는 자는 늘 타자”라고 빈정거린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고통과 연대하고 평화를 말할 수 있으리라. 수없이 표현되고 말하여졌음에도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는 단어 ‘평화’는 전쟁과 학살과 고통의 해결사가 아니라 이제 우리가 전면적으로 쟁취하고 일으켜세워야 할 가치이고 희망이다. 만일 우리가 이른바 인간답게 사는 것에 합의를 한다면 말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평화박물관은 일반적 의미의 박물관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과 육신이 힘 있게 재생산되어야 할 공장이다. 이 공장 안에 공급되는 원자재는 ‘은폐된 진실’들이고 그 끝의 공정에서 우리는 고통의 진실과 대면할 것이다. 방문객들은 이 공장 안에서 가짜 이데올로기와 폭력으로 오염된 몸을 소독하고 전 공정을 지켜보거나 생산에 참여하면서 방문객이 아니라 공장의 직공이 될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평화의 가사를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깊은 성찰 속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온갖 거짓과 속임수,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치닫던 삶의 태도로부터 형제애와 이타주의로 무장하는 일이다.


내면의 공간들, 순교자 기념관


이 세상에는 수많은 죽음을 기리고 추모하는 수많은 공간과 장소들이 있다. 그것은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시대와 상상력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그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파리 노트르담 사원 뒤에 있는 순교자 기념관은 우리를 진정으로 고통과 연대하게 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스스로 벌거벗는 모습이 된다. 2차대전 중 독일 강제수용소에서 처형당한 20만명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 장소는 200평이 채 안 되는 아주 작은 기념관이지만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 의미로 놀라게 된다. 하나는 그곳에 진열된 오브제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거대하지 않다는 것이다. 좁은 계단으로 내려가면서부터 사람들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기념마당에 내려간 순간 갑자기 사라진 도시의 소음 속에서 하늘만 보게 된다.


죽음과 공포를 상징하는 철제조각 뒤로 돌아선 순간, 맞은편에 바라다보이는 작고 좁은 문, 두개의 관을 세워놓은 듯한 입구로 다가서면 사람들은 들어가기를 망설인다. 왜냐하면 정말로 너무 좁기 때문이다. 좁은 문은 단체로 여러 명이 우르르 몰려드는 것을 거부한다. “너희가 진실로 타인의 비극적인 죽음을 기억하고자 한다면 한 사람씩 들어와라”라고 하는 듯이 말이다. 우리의 삶이 개별적이고, 개인적 역사가 있는 것처럼, 아무리 많은 사람이 집단으로 처형당했더라도 그 죽음은 역시 개별적인 역사인 것이다. 그 안에는 아우슈비츠, 부쉔발트 등 강제수용소의 이름과 20만명의 죽음을 상징하는 빛과 텅 빈 감방이 하나 있을 뿐이다. 그 앞에서 우리는 ‘그래도 나는 살아 있다’는 것에 감격하고 외부의 빛을 향해 나온다.


그리고 다시 계단으로 올라 일상으로 돌아온다. 이 작은 기념관의 여행은 대단히 상징적이다. 즉물적인 것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심심한 곳이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 깊게 관찰하는 순간 우리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감각이 살아나고 방문객을 자신의 죽음과 대면시키는 힘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래서 평화박물관도 그것이 성공적이기 위해서는 우리가 흔히 마주치는 건물과 진열품이 전시된 공간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까지 가보지 못해서 만나지 못한 우리 스스로를 대면케 하는 장소가 되어야 할 것이다.
폭력과 이데올로기 양자간에 강요되는 선택의 장소가 아니라 이 둘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에서 우리 모두 만나기를 기대한다. 그런 공간이 진정으로 기다려지는 세상 속에 우리는 살고 있지 않은가!
 정기용 | 건축가


* 출처: 한겨레21, 2003년09월24일 제477호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9020.html
첨부파일
작성일자 2018-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