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제목 [연재] 반헌법행위는 이렇게 저질러졌다 (민플러스, 160720)
반헌법행위는 이렇게 저질러졌다1. 민간인 학살사건 -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민주자료관 관장


한홍구 교수승인 2016.07.20 15:03댓글 0글씨키우기글씨줄이기메일보내기인쇄하기페이스북트위터구글카카오스토리


민플러스는 지난 13일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가 공개한 1차 검토대상자 자료를 토대로 반헌법행위에 대한 각 영역별 사건과 내용, 반헌법행위자 선정기준 및 이유를 담은 자료를 5회에 걸쳐 매주 수요일 연재한다. 첫 자료는 민간인학살영역으로, 집중 검토 대상자에 대해서는 ‘반론권과 인격권을 보장하고 열전이 보다 공정하게 제작될 수 있도록 이의신청을 접수’한다는 열전편찬위의 방침을 존중해 공개하지 않는다.[편집자]


과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 핵심 관련자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민간인 학살 분야를 담당했던 위원과 조사관들, 민간인 학살 분야의 연구자들 등이 여러 차례 모여 토론을 진행하였습니다.


● 2015년 11월 13일(목) 전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 김동춘 교수 초청 간담회


● 2016년 2월 26일(목) 전문가 간담회 (장소: 대전 NGO센터)


● 2016년 4월 24일(일) 전문가 2차 간담회 (장소: 대구)


● 2016년 6월 4~5일(일) 전문가 워크숍 (장소: 마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의 특징은 수십만이 죽었음에도 죽은 자만 있을 뿐 죽인 자는 없다는 점입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민간인 학살 분야의 조사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안타깝게도 가해자 부분에 대한 조사가 극히 미흡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편찬위원회는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성과에 크게 기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후 국가배상 소송 과정에서 추가로 밝혀진 부분이 일부 있고, 또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 종료 이후 각 지역의 전문가나 유가족들에 의해 추가로 밝혀진 부분이 있습니다만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성과를 크게 넘어서는 것은 아닙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에서 가해자 부분은 대개 000으로 익명처리 되었는데, 본 편찬위원회는 이제 떨리는 마음으로 그들의 이름을 부르려합니다.


민간인 학살로 얼마나 죽었는지 우리는 아직 모릅니다. 연구자마다 제각각인데 누구는 30만이라 하고 누구는 50만이라 하고 또 누구는 관행대로 100만이라 합니다. <반헌법행위자 열전>에 대략 300명이 수록된다고 할 때 민간인 학살 관련자는 잘해야 100명 안팎일 것입니다. 민간인 학살 희생자를 아무리 적게 잡아도 30만, 그렇다면 희생자 3천 명 당 가해자 1명을 기록하는 셈이니 그저 황망할 뿐입니다.


1) 선정 기준


1948년 제주 4.3사건 이후 한국전쟁 기간까지 발생한 여러 민간인 학살사건에서


- 민간인 학살의 계획을 수립한 자


- 민간인 학살을 지시한 자


- 민간인 학살의 지휘계통에 있었던 자


- 현장에서 학살을 집행한 현장책임자


- 직접 민간인을 학살한 자


- 학살을 방조한 자


- 학살을 은폐한 자


2) 1차 집중검토 대상 반헌법 사건


<제주 4·3학살사건>




▲ 1947년 3월 1일 경찰은 시위군중에게 발포해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해 4.3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다. (사진 출처 : 4.3평화공원 영상 켑처)
제주 4·3사건은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3일 발생한 군중시위를 포함해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1947년 3월1일 경찰은 시위군중에게 발포해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해 4.3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후 남로당 제주도당은 3.10총파업을 일으키는 등 경찰발포에 거세게 항의했고, 이승만 정부는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를 전원 외지사람으로 교체하고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 단원 등을 대거 제주로 내려 보내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전개했다. 검속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4.3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으며 테러와 고문이 잇따랐다.


이에 1948년 4월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면서 경찰과 서청의 탄압중지, 단선․단정 반대, 통일정부 수립 촉구를 내세운 무장봉기가 시작됐다. 이승만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고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에 앞서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 이후 군과 경찰, 서북청년단에 의한 학살이 계속되었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등이 또 다시 학살되었다.




▲ 4.3사건을 다룬 영상 중 한 장면 (사진 출처 : 4.3평화공원 영상 켑처)
1947년 3.1절 발포사건부터 19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기까지 7년 7개월 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자행된 무자비한 학살은 그 피해 규모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고, 사건이 끝난 후에도 연좌제로 인한 피해와 정신적․육체적 후유증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국회는 1999년 12월26일 본회의를 통하여 제주도민들이 고대하던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을 통과시켰고, 2003년 10월5일 ‘4.3특별법’에 의해 구성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이하 위원회, 위원장 고건 국무총리)에서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었다. 2003년 10월31일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뤄졌음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했다.


클릭하면 큰 이미지로 볼수 있습니다.큰 이미지 보기
▲ 4.3항쟁을 다룬 영화 '지슬' 포스터
<경산코발트광산 학살 사건>


한국전쟁 발발 후 경산, 청도, 대구, 영동 등지에서 끌려온 국민보도연맹원 및 요시찰 대상자들과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재소자 중 상당수가 경산․청도지역 경찰과 경북지구CIC 경산․청도 파견대, 국군 제22헌병대에 의해 1950년 7~8월경 경상북도 경산시 평산동에 위치한 코발트광산 등지에서 집단 사살된 사건이다.


이 사건의 경위를 살펴보면 국민보도연맹 경상북도연맹 및 충북도연맹 산하 경산시, 청도군, 대구시, 영동군 연맹에 가입되었던 보도연맹원 및 요시찰 대상자 중 많은 수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 검속되어 경찰서 유치장 및 인근 창고 등지에 구금되어 분류과정을 거쳤으며 이후 대구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상당수의 재소자들과 함께 1950년 7월 중하순 무렵부터 8월 중순경까지 경산코발트광산 등지에서 군경에 의해 집단 사살되었다.




▲ 경산 코발트광산 앞에 있는 안내문(사진출처 : 나무위키)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경산코발트광산 등지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자수를 1800명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유가족들은 3500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 사건의 희생자들은 비무장 민간인들이었으며 좌익에 협조를 하거나 남로당에 가입되어 좌익 활동을 하다는 이유로 보도연맹에 가입되었거나 경찰에 의해 요시찰 대상자로 분류되어 예비 검속된 사람들과 보안법위반 등으로 대구형무소에 미결 또는 기결수로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과거 좌익경력으로 인해 남하하는 인민군에 협조할 위험이 있는 잠재적 적으로 간주되었으며 인민군들이 남하하기 직전 군경에 의해 사살되었다.


2005년 설치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6년 4월 25일 조사를 시작해 2009년 11월17일 경산 코발트 광산 등지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사건은 군․경에 의한 집단 학살이라고 판정했다.


<후방 학살 사건 중 11사단 사건>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 이후 전황이 불리하게 된 인민군 주력은 소백산맥, 태백산맥을 경유하여 북으로 퇴각하지만 미처 퇴각하지 못한 1만여 명의 인민군은 호남과 영남의 산악지역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후방지역을 교란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216호에 의거 후방지역 토벌작전을 전담할 제3군단(군단장 이형근 준장)을 창설하고 후방지역 빨치산 토벌작전을 전담할 제11사단을 창설하여 제9연대, 제13연대, 제20연대를 배속시켰다.


이들은 담양. 장성, 함평, 화순, 영암, 고창, 나주, 순창, 완주 등 호남지역, 거창, 산청, 함양 등 영남지역에서 토벌작전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이 부역혐의 혹은 빨치산 협조자란 명목으로 살해되었다.




▲ 빨치산을 토벌한다는 이유로 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사진출처 : 나무위키백과사전)
이중 거창 민간인학살 사건은 거창 출신 국회의원 신중목의 집요한 추적으로 사건의 진상이 국회에 공개되어 1951년 제11사단 제9연대장 오익균, 제3대대장 한동석은 무기징역, 김종원은 3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승만 대통령은 김종원을 특사로 석방 후 경찰간부로 채용했으며 오익균, 한동석도 형집행정지로 석방했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관련 사건 중 일부만을 조사할 수 있었고, 후방학살로 추정되는 유해 집단매장지를 발굴하였으나 추가적인 조사를 진행하지 못한 채 활동이 종료되었다.


<국민방위군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은 정부가 1950년 11월20일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만17세에서 40세 미만의 장정들을 제2국민병으로 편성하였으나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빼돌린 고위 장교들의 부정으로 인해 이들 중 약 9만 명에서 12만 명이 아사하거나 동사하여 사망한 사건이다.


1950년 12월21일 국민방위군 설치법이 공포되어 서울에 모여든 방위군 숫자가 50만여 명에 이르렀으나 중국군의 공세가 거세지자 정부는 방위군 장병들을 대구와 부산 등으로 이동할 것을 지시한다.




▲ 고위급 간부들의 군수물자 착복으로 5만 여명의 방위군이 죽었다. 사진은 징집된 국민방위군 (사진 출처 : 위키백과사전)
혹한 속에서 국민방위군은 걸어서 이동해야 했는데 고위 장교들의 예산 착복으로 이들에게는 제대로 된 숙식과 겨울피복 군복 등이 지급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불과 100여 일 사이에 50만 명의 방위군 장병 중 약 5만 명이 사망한다.


국회 조사위원회의 보고에 의하면 1950년 12월17일부터 1951년 3월31일까지 유령인구를 조작하여 착복한 것이 현금 23억 원, 쌀 5만 2천 섬이나 되었다고 한다. 국민방위군 사령부에서 제시한 통계를 그대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식료품비의 조달액수와 실제로 집행된 액수의 차이가 무려 20억 원에 달해 결국 3개월 동안 55억이라는 막대한 금액을 방위군 고위 간부층이 착복한 것으로 드러났다.


부사령관 윤익헌에 대한 기밀비용이 105일 동안 무려 3억1755만원이나 지출되었고, 국회 내에 관련된 정파에 1억 원이나 흘러간 것 등 밝혀지면서 이 착복한 규모는 매우 큰 규모로 복잡하여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려면 최소 개월이 걸릴 것’이라는 충격적인 중간 발표결과가 나왔다.


국회는 1951년 4월30일 국민방위군의 해체를 결의하였고, 국민방위군 지도부는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1951년 5월6일 열린 군사재판(재판장 이선근)은 사령관 김윤근에게 무죄, 부사령관 윤익헌 등 다른 간부에게는 최대 3년6월의 가벼운 형만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이시영 부통령이 이에 반발 사임하는 등 여론이 크게 악화되자 새로 임명된 국방장관 이기붕은 국민방위군 사건의 재수사를 명하였다. 그해 7월19일 중앙고등군법회의는 사령관 김윤근, 부사령관 윤익헌 이하 5명에게 사형을 언도하였으며, 8월13일 김윤근, 윤익헌, 강석한, 박창원, 박기환 등에 대한 공개총살형이 집행되었다.




▲ 8월 13일 군 책임자인 김윤근, 윤익헌, 강석한, 박창원, 박기환 등에 대한 공개총살형이 집행되었다. (사진 출처 : 위키백과사전)
2007년 10월30일 군 당국은 한국전쟁 당시 ‘국민방위군’으로 끌려가 훈련 중 구타를 당해 상해를 입고 숨진 희생자에 대해 56년 만에 순직결정을 내렸고, 2010년 9월8일,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되어 희생된 이들과 유족들에게 사과하고 예우를 갖추라고 대한민국 정부에 권고했다.


(다음주에는 '내란 영역'이 이어집니다)


한홍구 교수  news@minplus.or.kr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원문보기:
http://www.minplus.or.kr/news/articleView.html?idxno=729




반헌법행위는 이렇게 저질러졌다(2)2. 내란영역 - 주정립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1) 내란분야 선정이유


대한민국 형법 제87조에 따르면 내란죄는 '국토의 참절 또는 국헌문란을 목적으로 하여 폭동하는 죄'입니다. 여기서 국토 참절이란 대한민국 토의 전부 또는 일부에 대한 주권 행사를 배제하고 불법적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12.12 당시 사진 (사진 출처 : 지식백과)
또 국헌 문란은 헌법 또는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거나,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하여 전복(顚覆) 또는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폭동'이란 다중(多衆)이 결합하여 폭동·협박을 행하는 것으로서 그것이 적어도 한 지방의 안녕질서를 파괴할 정도의 규모여야 합니다 내란죄는 집단범죄의 특질에 비추어 그 관여자를 수괴 모의참여·지휘 등 중요임무 종사자, 부화수행자 및 단순 관여자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의를 따를 때 정부 수립 이후 내란 행위에 해당하는 것은 여순 반란, 5·16군사반란, 유신 정변, 12․12군사반란 및 내란일 것입니다. 이번 집중검토 대상자 명단 선정에서는 앞에서 한홍구교수가 설명한 대로 불필요한 논란과 오해를 배제하기 위해 유죄 판결을 받은 최근의 사례로서 12․12군사반란 및 5․17내란 관련자들만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였습니다.


12․12군사반란 및 5․17내란에 관련된 이들은 이번에 집중검토 대상자 명단에 오른 이들 외에도 다수가 있습니다. 예컨대 1994년 10월 검찰은 전두환, 노태우 등 12․12군사반란 관련자 34인에 대해 "하극상에 의한 군사반란을 일으킴으로써 헌정사를 후퇴시킨 점 등"을 확인했지만 "국가분열과 대립양상을 재연함으로써 국력을 소모할 우려"를 이유로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습니다.




▲ 1979년 12월 14일 12.12주동자들의 기념사진 (사진 출처 : 지식백과)
5․18사건의 피해자들이 내란 및 내란 목적 살인 혐의로 고발한 5․18관련 책임자 35인에 대해서도 1995년 7월 서울지검은 5.18사건의 내란성을 인정하는 수사결과를 발표했지만 피의자들에 대해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려 각계 각층의 거센 비판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집중검토 대상자 명단에는 불필요한 논란의 여지가 없도록 유죄판결을 받은 이들만을 선정하습니다. 즉 대법원 판결을 통해 유죄가 확정된 15인과 수사를 피해 해외로 도주했다가 나중에 유죄판결을 받은 2인 등 17인만을 선정하였습니다.


2) 1차 집중검토 대상 반헌법 사건


<12․12 반란 및 5․17 내란 사건>


10․26사건 이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수사 등을 담당한 합동수사본부의 본부장으로 취임한다. 당시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이던 정승화 대장은 군내 요직을 독차지하던 ‘하나회’를 견제하기 위해 ‘하나회’ 수장이던 전두환을 동해안경비사령관으로 발령내려 했지만 사전에 이를 알아챈 전두환이 1979년 12월 12일을 기해 정승화를 무력으로 강제 연행시킴으로써 12․12군사반란이 일어난다.


클릭하면 큰 이미지로 볼수 있습니다.큰 이미지 보기
▲ 신군부 내란 세력은 국헌문란 행위에 저항하는 광주시민과 학생들을 잔혹하게 진압하고 대규모 살상했으며 3,7,11공수여단과 20사단, 31사단 등의 대대적인 병력 동원을 통해 민주화를 요구하는 광주시민들의 저항을 유혈 진압했다. (사진 출처 : 지식백과)
이 과정에서 전두환이 수괴 역할을 수행했으며 노태우 9사단장, 정호용 50사단장, 차규헌 육군수도군단장, 유학성 군수차관보, 황영시 1군단장, 최세창 3공수여단장, 장세동 수경사 30경비단장, 허화평 보안사 비서실장,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 신윤희 수경사 헌병부단장, 박희도 1공수여단장, 장기오 5공수여단장, 박종규 3공수여단 15대대장 등이 군의 지휘체계를 무시하고 불법적으로 군대를 동원해 육군본부와 총장 공관 등을 점거하고 정승화 총장과 정총장의 강제연행을 반대하던 3군사령관 이건영 중장,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등을 강제 연행하는 등 반란 중요임무 종사자로 참여했다.


12․12반란 이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였으며 1980년 초반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정치에 개입할 계획을 세운다.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이학봉, 허화평, 허삼수와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 정도영 보안사 보안처장 등이 5월 초순경 비상계엄 전국 확대, 국회 해산 등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시국수습방안’을 기획했다.


클릭하면 큰 이미지로 볼수 있습니다.큰 이미지 보기
▲ 대대적인 병력 동원을 통해 민주화를 요구하는 광주시민들의 저항을 유혈 진압했다. [사진 출처 : 지식백과]
노태우,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이희성 육군참모총장, 주영복 국방부장관 등이 이의 실행에 동의하였으며 5월17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거쳐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열린 국무회의의 의결로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가 취해졌다.


5월17일 24시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가 내려진 후 신군부 세력은 국회의사당을 폐쇄하고 학생회 간부와 재야인사, 여․야 국회의원 등 정치인들을 체포하는 한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이하 국보위)를 설치하여 사실상 국무회의와 행정각부를 통제하거나 그 기능을 대신함으로써 헌법기관인 행정부와 대통령을 무력화시켰다.


신군부 내란 세력은 이러한 국헌문란 행위에 저항하는 광주시민과 학생들을 잔혹하게 진압하고 대규모 살상함으로써 이들의 무장 저항을 포함한 격렬한 대응을 야기했으며 3, 7, 11공수여단과 20사단, 31사단 등의 대대적인 병력 동원을 통해 민주화를 요구하는 광주시민들의 저항을 유혈 진압하였다.


국보위의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국보위의 소위 국정개혁 작업을 통해 공무원과 국영기업체 직원 8600여 명을 해직시키고 3만8000여 명의 시민을 가혹한 인권유린이 자행된 삼청교육대로 보냈으며 강압적인 방법으로 신문, 방송 등 다수의 언론기관을 통폐합시키고 700여 명의 언론인을 직장에서 내쫓았다.




▲ 국보위의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공무원과 국영기업체 직원 8,600여 명을 해직시키고 3만 8,000여 명의 시민을 가혹한 인권유린이 자행된 삼청교육대로 보냈다. [사진출처 : 지식백과]
내란 세력은 1980년 11월12일 정치활동에 대한 규제조치를 통해 정치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규정의 기능을 사실상 소멸시켰으며 내란 세력의 요구를 거부한 대법원판사를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연행하여 조사하는 등의 방법으로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인 대법원판사를 강압, 외포케 하여 사표를 제출하게 만들었다.


(다음주에는 '고문․조작사건 영역'이 이어집니다)


주정립 조사위원  news@minplus.or.kr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반헌법행위는 이렇게 저질러졌다(3)3. 고문·조작사건 영역1 - 서재일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1) 고문·조작사건


고문·조작사건은 1960년대 1차 인혁당 사건, 1970년대의 김대중 납치 사건. 1970~80년대를 거쳐 집중적으로 발생된 간첩조작 사건, 1980년대의 녹화사업과 김근태 고문(민청련), 부천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및 은폐 사건, 1990년대의 유서대필 조작사건 등 독재정권이 위기에 몰리는 상황이 오면 어김없이 발생하습니다.




▲ 고문조작사건은 선거, 학생운동 활동, 정권의 위기상황과 맞물릴 때마다 어김없이 발생했다. 정통성 없는 정부의 정권 획득과 유지, 반공을 앞세운 탄압, 공안기구의 확대와 고문조작에 의한 탄압으로 이어지면서 정권의 입맛에 맞게 조작됐다.[사진은 영화 '남영동 1985' 중 고문장면]
특히 고문·조작사건의 발생은 선거 시기 또는 학생운동의 활동이나 당시 정권의 위기상황과 맞물려 있습니다. 이는 결국 정통성 없는 정부의 정권획득과 유지, 이에 대한 반대운동, 반공을 앞세운 탄압, 다시 민주화운동의 성장, 공안기구의 확대와 고문조작에 의한 탄압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사건들은 천편일률적으로 고문을 통해 해당 정권의 입맛에 맞게 조작되었습니다.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처음부터 혁명공약에 반공을 국시의 제1로 삼아 반공태세를 더욱 강화하습니다. 이에 따라 국가보안법이 있었음에도 ‘반공법’을 제정하고, 중앙정보부를 창설하습니다. 반공법과 중앙정보부는 유신체제, 긴급조치와 더불어 군사독재의 장기집권의 도구로 활용되었고, 공안정국을 조성해 나갔습니다.


전두환 정권도 12.12쿠데타와 광주학살을 통해 민주주의의 정통성을 부여받지 못한 채 집권한 것이기에 공안기관과 국가보안법을 무기로 소위 수많은 고문·조작사건을 양산하면서 정권을 유지․강화했습니다.


이처럼 지난날 독재정권은 민주적인 국정운영을 멀리하고 고문과 조작, 정치공작 등 국가폭력을 통해 정권을 유지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중앙정보부-안전기획부(이하 ‘중정’ 또는 ‘안기부’), 보안사령부-기무사령부(이하 ‘보안사’), 대공(보안) 경찰, 공안검찰 등 공안관계기관들뿐만 아니라 사법부까지 총동원하여 고문·조작사건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 울릉도간첩단조작사건으로 재판정에 선 사람들. 41년만에 무죄가 확정된 이 사건으로 전국 각지에서 북한을 왕래하며 간첩활동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47명이 검거돼 이 중 3명이 사형 당하고 20여명이 10년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보상금 몇 푼으로 이들의 억울한 세월을 보상해줄 수 있는지 국가에 묻고 싶다.
또한 이 정권들은 조작과정에서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 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 긴급조치, 사회안전법(보안관찰법), 국가보안법(반공법) 등 수많은 악법을 활용했습니다.


1960년대까지 간첩검거가 공안기관들이 내세우는 최고의 업적이었고, 정부 또한 간첩 관련 공안사건을 사회를 통제하면서 정치적 난관을 돌파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1970년대에 이르러 북한의 대남 전략이 바뀌고, 또 7․4남북공동성명 등의 영향으로 예전처럼 많은 수의 간첩이 남파되지 않았습니다.(‘국정원과거사위 종합보고서’, ‘국방부과거사위 종합보고서’ 등 기록 참조)


그렇다고 독재정권이 과거에 경험하고 누렸던 손쉬운 통치술을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커질 대로 커져버린 공안기관들도 자신들의 존립 기반을 찾아서 새로운 일거리를 만들어 냅니다. 그것이 바로 고문․조작사건을 만들어 내는 일이었습니다.


2) 고문·조작사건의 성격


과거 독재정권과 공안관계기관은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 강화시키기 위해 국민과 언론을 통제하면서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고문․조작사건을 만들었습니다. 고문·조작사건의 가해와 피해성격에 따라 정치공작, 조직사건, 간첩조작, 기타 인권침해 영역으로 구분했습니다.


정치공작영역의 사건은 공안관계기관의 공작행위에 초점을 맞추어 본 것입니다. 민족일보, 김대중 내란음모, 신군부의 언론통제, 유서대필 조작사건 등 개인이나 언론을 대상으로 정권이 갖고 있었던 무소불위의 막강한 권력을 이용하여 위법적인 방법 등 공작을 통해 만들어지고 국민들에게 왜곡·선전되는 사건들입니다.




▲ 울릉도간첩단조작사건의 전모를 밝힌 책 '울릉도 1974'
간첩조작사건은 70년에서 80년대에 걸쳐 눈에 띄게 많이 발생하였습니다. 간첩조작사건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송씨일가 간첩사건과 진도 박동운 일가 간첩사건처럼 월북과 월남자의 가족인 경우, 태영호 간첩사건처럼 납북어부인 경우, 11․12사건과 이헌치, 김양기, 김태홍, 김정사, 차풍길 간첩사건처럼 재일동포와 일본 관련 사건인 경우, 강용주 등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처럼 국내 민주화운동 관련인 경우 등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조직(용공조작)사건은 학생운동과 관계되었거나 배후세력으로 왜곡되었고, 반국가단체나 이적단체로 조작되었습니다. 1차 인혁당, 남조선해방전략당, 민청학련, 무림, 학림(전 민학련․ 전민노련), 민청련 사건 등 독재정권이 궁지에 몰릴 때 언제나 친북용공단체로 등장했던 사건들입니다.


재일동포와 일본 관련 간첩사건은 우리나라로 건너와 재학 또는 재직 중 간첩 사건에 연루되는 경우와 취업차 또는 친족을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동포들과 접촉한 후 귀국하여 간첩사건에 연루되는 경우입니다. 특히 독재정권과 공안기관들은 월북·남 가족과 납북어부 그리고 재일동포 모국유학생 등을 마녀사냥의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이들은 사회적 약자이자 자기 방어력이 부족한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공안기관원들은 그들을 간첩조작의 희생양으로 삼기에 적당하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납북어부와 재일교포 조작간첩 문제가 대부분 70~80년대에 집중된 이유입니다. 최근에는 유우성 간첩조작사건처럼 탈북자들을 표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인권침해 관련 사건들입니다. 이들 사건은 당시 관련 법과 제도 자체가 헌법에 반하고 인권침해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법과 제도를 공안기관들이 활용함으로 인해 수백에서 수천 명 이상의 억울한 피해자들이 발생되었습니다.


긴급조치, 사회안전법(1975년 사회안전법 제정: 피해자들은 형기만료 후 청주보안감호소에 수감, 2년마다 검사의 판단에 따라 새로 보안감호처분을 받아야 했으며, 1989년 사회안전법이 폐지될 때까지 10~16년간의 보안처분을 받았다. 사회안전법은 1989년 보안관찰법으로 대체되었다.), 삼청교육대, 녹화사업, 보안사의 민간인사찰 사건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들 사건에서 일관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문·조작사건을 만들기 전에 항상 관련 부처들이 법과 제도를 만들거나 손질했고 공안관계기관들은 이 법과 제도를 등에 업고 자의적으로 활용했습니다.


또한 공안기관은 내사나 불법사찰 등을 통해 사전계획을 세워 준비했고, 사건진행의 경과에 따라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고문 등의 반헌법행위를 자행하였고, 정권유지와 연장의 수단으로 언론 등을 통해 선전하습니다.


이런 반헌법행위들은 국민의 눈을 가리고 귀와 입을 막는데 상당한 효과를 발휘하였습니다. 이 맛에 취한 최고 권력상층부와 공안기관들은 조작의 대상을 다양화시키며 더 악의적이고 저급한 조작행위를 반복하였던 것입니다.




▲ 1974년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이호철·김우종·정을병·장병희·임헌영 등 문인 5명을 반공법 및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기소한 사건으로 긴급조치 1호와 2호에 반대해 일어난 유신헌법 개헌청원 서명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문인들에 대한 탄압이었다.
3) 고문·조작사건의 반헌법행위자 선정기준과 방법


2015년 7월 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준비위원회의 자료집(누가 반헌법행위자인가?)에 수록된 바와 같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83건)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신청(13,348건), 대법원 검토 공안․시국사건(224건), 시민사회 선정 인권침해 사건(363건),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7건의 의혹사건과 6개 분야, 예비조사대상 사건 83건),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8개 분야 사건), 경찰청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7건의 개별사건, 3개 분야)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600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162건) 등 국가기관과 사회단체가 조사한 사건과 재심을 통해 무죄가 확정된 사건 또는 재심이 진행 중인 사건(진화위 재심권고 사건(73건)과 개별 진행 재심사건(66건))을 검토대상 사건으로 삼았습니다.


열전편찬위원회는 이들 사건 중에서 아래의 기준을 적용하여 집중검토 대상사건을 선정하였습니다.


- 공권력에 의해 정권의 유지·강화를 위해 전국적 혹은 계획적으로 진행된 사건


- 조작사건 발생 당시 언론 등에 대대적으로 선전되어, 정치적으로 이용된 사건


- 시민단체나 국가기관의 조사 활동 또는 재심을 통해 고문 조작의 진상이 규명된 사건


- 피해자들에게 신체나 명예에 심각한 훼손을 가하여 그 향이 당사자는 물론 가족과 전체 사회까지 미치게 된 사건(피해 규모와 정도 등)


클릭하면 큰 이미지로 볼수 있습니다.큰 이미지 보기
▲ 고 김근태 의원 고문사건을 담은 영화 '남영동1985'의 한 장면
고문·조작사건 영역에서는 사건별로 조사보고서를 작성할 예정입니다. 조사보고서에는 사건 개요와 고문·조작과 관련된 행위사실이 들어갑니다. 이 보고서에 따라 반헌법행위 관련자(예비명단)를 추출합니다. 사건규모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건 당 20명 내외로 예비 명단을 작성 중에 있습니다. 다 합하면 반헌법행위 관련자 예비명단은 2000명 이상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작성된 예비명단을 300명 내외로 압축하는 1차 과정과 100명 내외로 압축하는 2차 과정을 거쳐 반헌법행위자를 선정하려고 합니다. 이 때 선정위원의 심도 깊은 토론을 통한 종합적인 판단이 이루어지고, 단계별 비율적용, 피해정도, 시기, 사회·역사성 등을 고려해서 선정할 것입니다.


선정기준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지만, 행위의 자율성과 타율성, 행위의 반복성과 불가피성, 정치․경제적인 이득, 폭력성의 정도 등이 될 것입니다. 특히 과거 확정판결 전후 훈·포장을 받은 자, 반헌법행위와 관련하여 승진 등 경제적·사회적·정치적 혜택을 누린 자, 전체 조작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자 등은 선정 시 중요하게 평가될 것입니다. (다음 주에는 '고문조작사건 2'가 이어집니다.)


서재일 조사위원  news@minplus.or.kr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반헌법행위는 이렇게 저질러졌다(4)3. 고문·조작사건 영역 2 - 서재일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4) 1차 집중검토 대상 반헌법 사건


2016년 1차 집중검토 대상사건은 김구 암살사건, 1차 인혁당사건, 김대중 납치사건, 녹화사업, 송씨일가 간첩단사건, 김근태 고문사건, 부천서 성고문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및 은폐사건입니다. 이들 사건의 개요는 아래와 같습니다.


<김구 암살사건>




▲ 김구선생 [사진 출처 : 나무위키]
1949년 6월26일 백범 김구가 서울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암살당한 사건. 1945년 8월15일 해방 직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백범 김구는 1947년 말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던 이승만과 결별하고 중도파였던 김규식과 함께 남북협상 등 분단을 막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분단을 막는 데 실패한 김구는 1948년 8월15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고, 사실상 정계 2선으로 물러났다. 그러던 중 1949년 6월26일 김구는 현역 육군 포병소위이자 김구가 이끌던 한국독립당(약칭 한독당) 당원이었던 안두희에게 숙소이자 집무공간이었던 서울 경교장에서 4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하였다.




▲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는 서북청년단이기도 했다.
이러한 김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여러 달 전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었다. 1949년 6월6일 반민특위 습격사건, 6월20일에서 25일까지 김약수 국회부의장, 노일환 의원 등 소두 7명의 소장파의원들에 대한 체포로 시작된 국회프락치사건에 뒤이은 김구 살해 사건은 우연히 일어났다고 볼 수 없는 아주 긴밀히 연관된 사건이었다.


7월2일 이승만 대통령은 이 사건이 한국독립당의 내분으로 일어난 것이라는 내용의 특별성명을 발표하였다. 7월20일 군 당국은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이 사건을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려 한 친공산주의적인 한국독립당의 음모에 맞선 안두희의 ‘의거’라고 규정하였다.


안두희도 재판 중 2계급 특진을 하였고, 사건 1년여 만에 형 면제 처분을 받고 군에 복귀하는 등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특혜를 받았다.


오랜 시간에 흘러 1993년 국회는 이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약 2년 간의 조사 후 위원회는 ‘백범김구선생 암살진상국회조사보고서’ 를 작성하고 이 보고서는 1995년 12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김구 암살사건은 당시 정부 발표처럼 한국독립당의 노선을 둘러싼 내분 과정에서 안두희가 개인적 차원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이 분담된 정권 차원의 범죄 행위였음이 밝혀졌다.




▲ 김구 선생 장례행렬 [사진 출처 : 구글]
먼저 암살범 안두희의 1차적 배후는 ‘군부’였다. 즉, 포병사령관으로 안두희의 직속상관이자 같은 서북청년단 출신인 장은산이 암살을 명령하였고, 사건 발생 이후 김창룡 특무대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였으며 채병덕 총참모장, 전봉덕 헌병 부사령관 등이 사후처리를 주도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일제강점기 일본군, 만주군, 경찰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1949년 6월 전후에 일어난 국회프락치사건이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습격사건 등 정부 내 친일세력이 친일청산에 앞장선 반대세력을 물리적으로 탄압하고자 했던 일련의 사건들과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 김구가 정계에 복귀할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에서 정권 차원에서 가장 위협적인 정치적 경쟁자를 제거하는 동시에, 김구와 한국독립당까지 친공세력으로 몰아붙임으로써 정권의 기반인 극우반공체제를 강화하려 했던 조치였다고도 평가된다.




▲ 암살 배후였던 이승만과 김구 선생 [사진 출처 : 구글]
<1차 인혁당사건>


인민혁명당 사건은 1964년 8월14일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국가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인 인민혁명당이 북괴의 지령을 받아 한일회담반대 학생데모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관련자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나머지 16명은 수배 중에 있다’고 언론에 발표한 사건이다.




▲ 1차 인혁당사건 [사진 출처 : 구글]
그런데 당시 ‘인민혁명당사건’을 담당한 공안부 검사 3인(이용훈, 김병리, 장원찬)이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기소할 수 없다고 서명을 거부하고 사표를 제출하였다. 사건담당 공안검사들이 기소를 거부하자 당시 신직수 검찰총장과 서주연 서울지검 검사장은 당직검사 정명래로 하여금 기소케 하였다.


같은 해 9월12일 한국인권옹호협회장 박한상의원이 ‘인민혁명당사건’으로 기소된 도예종 등 26명의 피고인 대부분이 중앙정보부(이용택 5국 대공과장)에서 ‘발가벗긴 채 물과 전기로 참을 수 없는 심한 고문을 당했다’고 고문 사실을 폭로하였다.


담당검사의 기소 거부(사표)와 고문사실의 폭로 등으로 궁지에 몰린 중앙정보부․검찰 지휘부는 1964년 10월 기소한 26명 중 14명에 대하여 공소를 취하하고 석방하였으며, 그 나머지 12명과 추가로 구속한 양춘우 등 13명에 대해서만 공소장 죄목을 ‘국가보안법’ 위반에서 ‘반공법’ 위반으로 변경하여 기소하였다.




▲ 1차 인혁당사건 공소취하기사 (사진 출처 : 구글)
1965년 1월20일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도예종․양춘우 피고에게 ‘반공법’ 제4조 제1항(고무 찬양)을 적용, 3년․2년의 징역형을 선고하였고, 나머지 11명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한옥신 검사는 1심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같은 해 5월29일 2심 선고 공판에서 재판부는 원심을 파기, 도예종에게 징역 3년, 양춘우, 박현채, 정도영, 김영광, 김한덕, 박중기에게 징역 1년, 김금수, 이재문, 임창순, 김병태, 김경희, 전무배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각각 선고하였다. 같은 해 9월 21일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하여 형이 확정되었다.


2005년 국정원과거사건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는 이 사건에 대해 가혹행위와 사건의 조작사실 등을 밝혔다. 2007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국가에 대해 중앙정보부가 수사과정에서 범한 불법구금, 가혹행위, 사건조작에 대하여 사과하고 재심을 권고하였다.


결국 위 두 기관의 조사결과를 인정하여 2013년 서울고등법원의 재심과 2015년 대법원의 판결에 의해 무죄가 확정되었고, 고문조작 사실이 확인되었다.


<김대중 납치사건>




▲ 납치에서 풀려난 후 기자들과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 [사진 출처 : 구글]
김대중은 1971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출마, 민주공화당 후보였던 박정희에게 석패하였다. 대통령 선거 전후 신변에 위협을 느끼는 일련의 사건 사고(사제폭발물,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교통사고 후유증과 지병의 치료차 일본을 왕래하기 시작하고, 1972년 10월11일 일본 정계 순방을 이유로 일본으로 건너간 김대중은 며칠 뒤인 17일 비상계엄령과 동시에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미국으로 망명을 택한다. 1973년 7월 재미교포 반체제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약칭 한민통)를 결성하는 등 해외에서 반유신 활동을 전개하였다.


도쿄에서 ‘한민통’ 일본지부 결성을 며칠 앞둔 1973년 8월8일, 통일당 당수 양일동을 만나러 그랜드팔레스호텔로 간 김대중은 중정요원들에 의해 납치되었다. 주일공사 김기완은 주일 대사관 일등 서기관 신분으로 위장하고 있던 중정요원 김동운에게 공작 계획의 수립을 지시했다.


김동운의 계획안을 접수한 차장보 이철희와 해외공작국장 하태준은 해외공작단장 윤진원과 함께 계획을 검토했다. 김대중을 납치한 사람들은 해외공작단장 윤진원, 주일대사관 참사관 윤영로, 일등서기관 홍성채․김동운, 이등서기관 유영복․유충국 등이고 일등서기관 한춘은 현지정찰임무를 수행했다. 이들은 납치현장에 수많은 유류품과 육안으로 봐도 뚜렷이 보이는 지문을 남겨놓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 (사진 출처 : 구글)
이후 선박 용금호에 감금된 채 동해로 강제 압송되었다가, 129시간 만에 8월13일 서울의 자택 부근에서 풀려났다. 당시 이 사건을 조사한 일본 경찰청은 납치현장에서 주일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의 신분으로 일본에 머물던 김동운 중앙정보부 요원의 지문을 채취하는 등 증거를 확보하여 관련자 출두를 요구했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관련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고 관련자 출두 등 협조를 거부하였다. 이에 따라 이 사건은 한국 공권력에 의한 일본 주권의 침해라는 한일 간의 외교문제로 비화되었다.


사건 발생 석 달 후인 11월2일 김종필 총리는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유감의 뜻을 담은 박정희 대통령의 친서를 다나카 일본수상에게 전달하였고, 다나카 수상 역시 납치사건에 대해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는 답신을 전달하였다.


양국 정부 모두 김대중 납치사건을 둘러싼 진상을 은폐하기로 결정함으로써 한일관계의 갈등 역시 봉합되었다. 그 이후 사건의 배후와 과정은 명확히 밝혀지지 못하다가, 2007년 국정원과거사위의 조사결과 당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지시 아래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납치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다음에 계속)


* 당초 고문조작사건을 2회로 나눠 연재하려 했으나 사건의 수가 많아 3회로 연장합니다.


서재일 조사위원  news@minplus.or.kr






반헌법행위는 이렇게 저질러졌다(5)3. 고문·조작사건 영역 3 - 서재일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녹화사업>




▲ 당시 녹화사업 관련 신문기사
녹화사업은 보안사에서 강제 징집자 및 정상 입대자 중 학생운동 전력자들을 대상으로 1982년 9월부터 1984년 12월까지 ‘좌경오염 방지’라는 명목 하에 학생운동 활동사항과 조직체계 등을 조사하고(개인별 심사審査) 대상자의 생각과 이념을 바꾸도록 하는 순화(純化)업무를 진행하였으며, ‘순화’된 것으로 판단되는 병사들에게 출신 대학교의 학원첩보를 수집해 오도록 요구하는 ‘활용’, 이른바 프락치 활동을 강요한 사업을 말한다.


보안사 심사과가 1982년 9월6일 신설되어 1984년 12월19일 해체되기까지 특수학적변동자(강제 징집자) 921명과 비특수학적변동자(정상 입대자 및 민간인) 271명 등 총 1192명을 대상으로 녹화사업을 추진하였고, 심사와 순화 그리고 활용과정에서 1000명이 넘는 인원이 고문과 프락치공작 등의 반헌법행위에 희생자가 되었고, 이 과정에서 6명(정성희, 이윤성 ,김두황, 한현, 최온순, 한희철)이 의문사 당했다.




▲ 시위현장에서 징집되는 학생들
녹화사업은 1982년 전반기에 보안사령부 대공처장 최경조가 대통령 전두환으로부터 ‘운동권 세력에 대해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한다’는 질책을 받고 대공처 공작과장이던 조창현에게 계획수립을 지시하고, 조창현 입안, 대공처장 최경조, 참모장 정도영, 보안사령관 박준병이 결재하여 녹화사업의 기본계획을 수립하다.




▲ 녹화사업 후 사망한 학생들
본격적인 녹화사업은 1982년 9월 보안사 대공처 산하에 심사과가 신설되고 서의남이 심사과장으로 부임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서의남이 부임하면서 김희기 등이 녹화사업 세부시행계획을 세우고 부서 운영과 조사방식의 변화를 시도하다 이를 계기로 심사방법이 과격해져 구타는 물론이고 잠 안 재우기, 물 안 먹이기 등 가혹행위를 하는 사례가 생기기 시작하였고, 특히 심사과 학원계는 고영준을 계장으로 박종현, 최남섭을 계원으로 배치하였고 이들은 심사 활용과정에서 가혹행위를 일삼았다.


보안사가 밝히는 녹화사업 목적이 “군내 좌경의식화 오염방지를 위한 심사 순화”라고 했으나 사실은 “활용(프락치공작)을 통한 적극적인 학원통제와 민주화운동 조직의 와해”였다.


<송씨 일가 간첩단사건>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은 1982년 9월10일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한국전쟁 당시 충북 인민위원회 상공부장으로 활동하다 월북한 송창섭이 휴전 이후에도 8차례 남파되어 일가친척을 동원해 정계, 군, 산업계, 공무원, 학원 등에서 부마, 광주, 10.26사태 등 주요 사건마다 각종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고 대정부 투쟁을 유도한 대규모 간첩조직을 구축했다’고 발표한 사건이다.


서울과 충북을 거점으로 1957년 5월부터 1982년 3월까지 암약해 온 29명 규모의 고정간첩단 조직에는 1977년 작고한 그의 처 한경희와 그의 자녀를 포함해 6촌 형제, 5촌질, 4촌 처남에 이르기까지 일가친척을 망라하고 있었다. 안기부는 이 사건을 발표하기 전 북한의 해외 공작원에게서 ‘송’씨 성을 가진 인물이 충청도에 지하당을 건설한다(이른바 송충건)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안기부는 별다른 증거도 없이 충북 출신으로 해방 후 월북했다가 1960년 4월 혁명 후 남파된 바 있는 송창섭을 송충건으로 지목하고 간첩조작을 시작하였다.


클릭하면 큰 이미지로 볼수 있습니다.큰 이미지 보기
▲ 당시 '송씨일가 간첩단사건'을 전하는 신문기사. 송씨일가 간첩단사건은 안기부가 별다른 증거도 없이 충북 출신으로 해방 후 월북했다가 1960년 4월 혁명 후 남파된 바 있는 송창섭을 송충건으로 지목하고 간첩으로 몬 사건이다.
검사 임휘윤과 김경한은 고문과 불법구금에 대하여 수사하지 않았고, 수사과정에 안기부 수사관이 참여했으며, 오히려 피의자들을 폭행하면서 안기부에서의 자백을 번복하지 말라고 협박했다.


이 사건은 일곱 번의 재판과정을 거쳤다. ①지방법원(유죄)→ ②고등법원(유죄)→ ③ 대법원(무죄취지 파기환송)→ ④고등법원(유죄)→ ⑤대법원(무죄취지 파기환송)→ ⑥고등법원(유죄)→ ⑦대법원(유죄인정 상고기각)에서 유죄가 확정되었다. ③과 ⑤의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피고인들이 적게는 75일, 많게는 116일의 장기 불법구금과 이 기간 동안 인간으로서는 감내할 수 없는 신체상의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무죄취지로 파기 환송하였다.


그러나 ④의 고등법원(오병선 판사)과 ⑥의 고등법원(김석수 판사)은 “항소심 재공판시 당시의 담당 수사관, 공소제기한 담당 검사 등을 증인으로 신청, 당시에 자백과 고문이 관계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억지를 부렸다. 특히 대법원의 파기 판결이 나오자 안기부와 검찰은 유죄판결을 받기 위하여 관계기관 대책회의를 개최했다. 그 대책 중의 하나는 파기 판결의 주심인 이일규 대법원 판사에 대한 내사와 미행, 대법원장 비서실장 가재환을 통한 외압, 변호인에 대한 내사와 비위사실 수집 등이었다. 결국 ⑦의 대법원(주심 김형기 대법원 판사)은 이 사건에 대해 유죄를 확정하였다.


2007년 ‘국정원과거사건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의 수사결과에 의해 조작사실이 밝혀졌고, 2009년 8월28일 법원은 재심을 통해 이 사건 관련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김근태 고문사건>


이 사건은 1985년 8월30일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수사단에서 민추위 사건으로 문용식을 수사하던 중 NDR(민족민주혁명론)의 배후인물로 민청련 의장 김근태를 지목, 내사에 착수하였다. 치안본부는 같은 해 9월4일 당시 삼민투 배후조종 혐의로 서울서부서에 구류 중인 김근태를 남영동 대공분실 515호실로 연행하였다.


클릭하면 큰 이미지로 볼수 있습니다.큰 이미지 보기
▲ 김근태 고문사건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전기고문, 물고문 등 10차례의 고문을 번갈아가며 가한 사건이다. 당시 박처원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장은 고문기술이 뛰어난 이근안 경기도경 대공분실장을 투입시켰다. [사진은 영화 '남영동 1985'의 한 장면]
그날 4일 저녁부터 시작하여 9월20일까지 모두 열 차례의 전기고문, 물고문을 번갈아 당한다. 당시 박처원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장은 평소 고문기술이 뛰어난 이근안 경기도경 대공분실장을 투입시켜, 이근안의 주도 하에 제2과장 윤재호, 반장 김수현, 반장 백남은, 반원 김영두, 최상남, 정현규, 박병선, 전사문 등 대공수사요원 9명이 수사를 담당하였다.


김근태에 대한 수사는 당시 안기부 관계자의 자료제공과 사실상의 조정 하에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이 수사업무를 전담하였으며, 박처원 단장은 수사진행 상황을 박배근(朴培根) 당시 치안본부장에게 수시로 보고하였으며, 정형근 안기부 대공수사단장에게도 수시 보고하였다.


당시 안기부는 김근태에 대한 2년간 미행자료 및 사진, 도청자료, 민청련, 자금지원 내역, 김근태의 친형 3명의 월북자료 등을 수회에 걸쳐 남영동 대공분실 수사팀에 제공하였으며, 박처원은 김근태 연행 다음날인 1985년 9월5일 정형근 대공수사 단장이 남영동 분실을 방문하여, 묵비권 행사 등 수사상황을 보고 받고는 “혼을 내서라도 철저히 밝혀내라”고 말하였다고 진술했다.


클릭하면 큰 이미지로 볼수 있습니다.큰 이미지 보기
▲ 김근태 고문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남영동 1985' 중 고문장면
이 사건을 계기로 재야에서는 같은 해 10월17일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 공동대책위원회(고문공대위)를 결성하는 동시에 12월19일 서울형사지방법원 118호 법정에서 열린 1차 재판에서 김근태는 고문사실을 폭로하였다. 1986년 1월9일 대한변협과 인재근 여사는 고문 경관 및 관련자 15명을 검찰에 고발하였으나, 다음해인 1987년 1월6일 검찰은 고문경관을 무혐의로 불기소처분을 한다.


이에 2월23일 변호인단은 서울고등법원에 재정신청을 했고, 20개월이 지난 후인 1988년 12월15일 서울고법은 재정을 결정하고 고문 경찰 4인은 재판에 회부하고 다른 11명은 기각한다. 그리고 1991년 1월30일 1심에서 4인(김수현, 백남은, 김영두, 최상남) 모두 실형이 선고되었고, 1992년 1월30일에는 고문에 대한 손해배상 4천 5백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1993년 7월7일 손해배상 항고심에서 원심대로 판결이 난다. 1993년 9월23일에는 고문경관 항소심에서 전원 실형이 선고되었다.




▲ 인터뷰를 하고 있는 당시 민청련 김근태 의장
한편, 김근태는 국가보안법 위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1심(서성 부장판사)에서 7년형을 받았고, 1986년 9월 대법원에서 징역 5년에 자격정지 5년의 판결을 받았다. 2011년 12월 별세한 뒤 부인 인재근 국회의원이 재심을 청구했고, 법원은 2014년 5월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국가보안법 위반에 대해서는 증거 부족으로 무죄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에 대해서는 면소를 선고했다.


결국 2015년 고인의 부인인 인재근 의원과 두 아들이 낸 형사보상금 청구에 대해 서울고법 형사 10부(재판장 허부열 부장판사)는 “모두 2억1400여만원을 지급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부천서 성고문사건>


권인숙은 서울대 의류학과 4학년 때 부천시에 위치한 회사에 공원으로 취업, 1986년 6월4일 주민등록변조 혐의로 부천경찰서에 연행되었고, 5.3인천사건과 관련하여 이 사건의 수배자를 검거하기 위한 경찰의 집요한 수사를 받았다.


당시 조사담당자인 문귀동 경장은 별다른 정보를 얻어내지 못하자 여성으로서 지니는 성적 수치심을 이용, 신체와 정신에 고통을 주는 성고문을 했다. 이 사건이 폭로되자 종교계를 비롯한 여성단체들은 ‘여성단체연합 성고문대책위원회’를 발족하여 항의와 시위를 계속했고, 고영구, 조영래 등 7명의 변호인단은 이 사건을 정식으로 고발했다.


이 고발에 대해 검찰은 처음에는 김경회 인천지검장이 원칙대로 수사하였다. 그러나 안기부장 장세동이 주도한 관계기관대책회의에 참석한 검찰총장 서동권은 “발표문과 대통령에 대한 보고문서 등에 성고문의 ‘성’자도 나와서는 안 된다”는 안기부의 조정을 수용하였다. 결국 서동권 검찰총장이 돌연 축소 수사를 지시하여 1986년 7월16일 문귀동은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 부천서 성고문사건 피해자인 권인숙씨와 변호를 맡은 조영래 변호사
검찰은 1986년 7월17일에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권인숙을 “급진 좌파 사상에 물들고 성적도 불량한 가출자일 뿐”이라고 매도하였고, 언론은 “정부의 입장을 곤란하게 하기위해서 성적 수치심까지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라고 여론을 호도하려 했다. 또한 수사 결과가 발표되던 날, 문화공보부는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어떻게 취재해야 하는지 각 언론기관에 아래와 같은 보도지침을 하달하였다.


- 오늘 오후 4시 검찰이 발표한 조사결과 내용만 보도할 것


- 사회면에서 취급할 것(크기는 재량에 맡김)


- 검찰 발표문 전문은 꼭 실어줄 것


- 자료 중 ‘사건의 성격’에서 제목을 뽑아 줄 것


- 이 사건의 명칭을 성추행이라 하지 말고 성모욕 행위로 할 것


- 발표 외에 독자적인 취재보도 내용 불가


- 반체제 측의 고소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여성단체 등의 성명은 일체 보도하지 말 것


한편 1986년 12월1일 인천지법은 권인숙에게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했고, 1987년 7월8일 가석방되었다. 변호인단은 검찰 발표에 불복하여 사법사상 최대규모인 166명의 변호인단을 구성, 재정신청을 냈고, 사건고발 2년이 지난 1988년 7월23일 피고인 문귀동에게 징역 5년, 자격정지 3년이 선고되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및 은폐사건>


박종철은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87년 1월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 수사관은 박종철에게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의 수배자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고,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물고문 등을 가하여 끝내 1987년 1월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11시45분경 중앙대 용산병원으로 옮겨졌는데 검진했을 당시 이미 숨져 있었다.


중앙일보 기자 신성호는 한 검찰 간부가 “경찰, 큰일 났어”라고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에서 단서를 잡고 1월14일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2단 기사를 내보냈다. 그러자 다음날 당시 치안본부장 강민창은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공식 발표했다.


클릭하면 큰 이미지로 볼수 있습니다.큰 이미지 보기
▲ 박종철열사 장례식(사진 지식백과사전)
1987년 1월15일 오후 6시가 넘어 한양대 병원에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 황적준 박사, 한양대 박동호 교수가 부검을 맡았다. 경찰의 협박과 회유를 물리치고 같은 달 17일 황적준 박사는 고문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부검보고서를 작성했으며, 치안본부는 19일 고문에 의한 사망 사실을 숨길 수 없게 되자 서둘러 조한경과 강진규의 물고문 사실을 시인하였다. 1년 뒤 황적준 박사는 부검과정에서 경찰의 회유와 협박 내용을 적은 일기장을 언론에 공개하여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이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구속되었다.


한편 당시 전민련 상임의장이던 이부영과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노력으로 1987년 5월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도미사 도중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음을 폭로하였다. 대공경찰의 대부라는 치안본부 차장 박처원 치안감의 주도 아래 유정방 경정, 박원택 경정 등 대공간부 3명에 의해 축소․ 조작됐으며, 고문가담 경관이 모두 5명(조한경, 강진규, 반금곤, 황정웅, 이정호)이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5명이 가담한 고문치사 사건을 단 2명만이 고문에 가담한 것으로 꾸미고 총대를 멘 2명에게는 거액의 돈을 제공하며 회유한 사실도 새롭게 밝혀졌다. 또한 당시 이 사건은 안기부(이해구 1차장)가 주도하여 법무부, 내무부, 검찰, 청와대 비서실 및 이들 기관의 기관장이 참여하는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은폐 조작에 조직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다음은 1차 집중검토 대상 - 부정선거분야 편이 이어집니다)


서재일 조사위원  news@minplus.or.kr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반헌법행위는 이렇게 저질러졌다(6)4) 부정선거 분야 - 오유석 성공회대학교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


1) 부정선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헌법 제1조1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고(헌법 제1조2항), 모든 국민은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공무원을 선거할 권리가 있으며, 국회는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국회의원으로 구성한다(제41조 1항)와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에 의하여 선출한다(제67조1항)고 규정한 헌법과 그 헌법의 규정에 의하여 보건대, ‘선거’란 국민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선거를 통하여 국민은 선출된 국가기관과 그의 국가권력의 행사에 대하여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한다(헌법재판소 판례 1999.5.27. 선고 98헌마214 전원재판부)


전술과 같이 선거는 헌법에 보장된 주권자인 국민의 통치권의 일종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반헌법행위로서의 부정선거’는 권력 획득을 목표로 국가권력의 조직적 개입에 의해, 전국적인 수준에서, 선거운동과정에서의 대대적인 관권선거(관권선거는 집권여당이 정부의 권한(관료조직, 경찰, 검찰, 정보기관)에 의존해 선거를 치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에는 관권의 의미가 확대되어 정식 공무원은 아니지만 정부로부터 일정한 수당을 받고 일하는 이장, 통․반장이나 관변단체가 동원될 때도 관권선거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와 금권타락선거, 투표 부정과 개표 부정 등 헌법에 반하는 (불법적이고 위법적인) 행위가 자행된 선거임과 동시에, 그 행위로 인해 선거 결과가 뒤바뀔 정도의 지대한 향을 준 선거를 말한다. 즉, 주권자인 국민의 통치권의 일종인 선거권을 전면적으로 유린하여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의 기본적인 정치제도를 근본적으로 파괴, 말살하고, 전술한 헌법에 위배하는 부정한 방식으로 당선을 위제하여 합법적인 절차에 의하여 선출된 것 같이 행한 행위를 의미한다.


대한민국 현대사 속에서 이러한 부정선거, 한마디로 민주주의와 헌법에 반(反)하는 이른바 권력자의 집권 연장을 위해 “선거가 왜곡, 굴절”된, 관권과 금권의 동원을 통한 부정선거, 불법타락선거는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반헌법행위로서의 부정선거, 그 대표적인 사례로는 1956년의 정·부통령선거와 1960년 3.15정·부통령 선거, 1967년 6.8국회의원 총선과 1971년 대통령선거 그리고 2012년 대통령선거를 꼽을 수 있다.


2) 부정선거의 반헌법행위자 선정기준과 방법




▲ 3.15부정선거에 맞선 학생들의 시위 [사진 출처 : 구글 위키백과]
부정선거영역에서는 [집중검토 대상사건]에 기초해서 사건별로 기초조사를 통해 그 타당성을 심층 검토하고 그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할 예정입니다. 보고서에는 사건 개요와 부정선거와 관련된 구체적인 행위사실과 관련 증언이나 기록이 들어갑니다. 이 보고서에 따라 반헌법행위 관련자(예비명단)를 추출합니다. 각 사건의 성격에 따라 해당 행위자 예비명단의 규모는 다를 것이며, 총 200명 내외에서 예비명단이 만들어 질 것입니다.


이렇게 추출된 예비명단은 100명 내외로 압축하는 1차 과정과 50~60명 내외로 압축하는 2차 과정을 거쳐 부정선거 관련 최종 반헌법행위자를 선정하려고 합니다.


부정선거 관련 반헌법행위자 선정기준은 명백한 대한민국 헌법에 준하여 제5대 국회에서 3·15선거 당시 부정선거를 행하거나 이 과정에서 국민에 대해 살상행위를 한 자를 처벌하기 위한 소급입법으로 1960년 12월31일 제정된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규정에 준하여 판단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이를 근거로 당시 특별감찰부는 부정선거를 모의하거나 지시를 내린 자, 살인, 상해, 폭행 등과 이의 지휘명령 등 행위자들을 처벌하게 되는 장치를 마련하였습니다.


이 법률은 5.16군사쿠데타에 의해 철저하게 왜곡되는 과정을 거친 뒤 커다란 효력 없이 잔존하다가, 이명박 정부 하인 2008년 12월19일에 이르러 실효성이 없다는 이유로 폐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부정선거 선정기준을 정하는 데 있어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특히 3.15부정선거와 4.19발포 관련 행위는 제2공화국 장면정부와 5.16군사정부에서조차 이미 확정판결을 받은 결과가 있기 때문에 거의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3) 1차 집중검토 대상사건


2016년 1차 집중검토 대상사건은 3.15부정선거, 4.19발포와 시위진압사건입니다. 이들 사건의 개요는 아래와 같습니다.




▲ 당시 동아일보에 나온 선거기사 [사진 출처 : 구글 위키백과]
<3 ·15부정선거>


1959년 3월15일 자유당 정권에 의하여 대대적인 선거부정행위가 자행되었던 제4대 대통령선거와 제5대 부통령선거를 말한다.


1959년 자유당은 이승만의 4선 출마의사를 지지하고 전면적인 선거준비작업에 돌입했다. 국가 권력을 총 동원하여 유래 없는 폭력과 부정선거를 기획했다. 1958년 12월 이른바 ‘2.4보안법 파동’을 통해 관권선거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1959년 3월에는 ‘6인 위원회’를 가동시켜 국무위원 6명(내무, 외무, 재무, 법무, 교통, 체신부 장관으로 구성)으로 하여금 선거 관련 중요 문제를 다루게 했다.


1959년 10월경 6인 위원회는 자신들의 사전 의결을 거친 후 전체 국무위원 합의를 받아 전국 각 도․시․읍․면 단위로 공무원친목회를 조직해 선거운동을 벌이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최인규 장관과 이강학 치안국장은 국무회의가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각 지방 도경찰국 사찰과장 및 경찰서장, 군수, 시장, 구청장을 지역별로 10명 내지 20명씩 내무부로 불러 부정선거 준비를 독려하기까지 했다. 최인규를 중심으로 공무원을 총동원한 부정선거 계획의 주요 내용은 이러했다.(이러한 음모는 정의감에 불타는 한 말단 경찰관이 <부정선거 지령서>사본을 민주당에 제공함으로써 백일하에 폭로되었다.) △4할 사전투표 △3인조에 의한 반공개 투표 △완장부대 동원으로 유권자 위협 △야당참관인 축출 △유령유권자의 조작과 기권강요 및 기권자의 대리투표 △내통식 기표소의 설치 △투표함 바꿔치기 △개표 때의 혼표와 환표 △득표수 조작발표 등.




▲ 3.15부정선거의 중심인 이승만 전 대통령 [사진 출처 : 구글 위키백과]
한편에서는 폭력이 난무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공명선거를 외치는 학생과 시민들의 함성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운명의 3월15일 정·부통령 선거 날이 다가왔다. 이날 투표는 내무장관 최인규가 기획한 대로 진행되었다. 전국적으로 대리투표, 사전투표, 3인조 투표가 저질러졌다. 자유당 완장부대가 경찰반공청년단 등과 함께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민주당 참관인은 곳곳에서 내쫓겼다. 급기야 투표가 끝나기도 전인 오후 4시30분에 서울의 민주당 중앙당이 선거는 “3․15 선거는 불법 무효임을 선언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성명서에서 민주당은 “3․15선거는 선거의 이름 아래 이루어진 국민주권에 대한 포악한 강도행위이며 따라서 자유당후보자의 당선이 발표될지라도 이는 당선이 아니라 주권 강탈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규정하고, 민주주의 사수를 위해 계속 투쟁할 것임을 선언했다.


선거 결과 이승만은 유효투표수의 88.7%에 해당하는 966만3376표를 얻은 것으로 발표됐다. 이기붕은 유효투표수의 79%에 해당하는 833만7059표, 장면은 184만3758표로 발표됐다. 그러나 이 선거 결과를 액면 그대로 믿는 국민들은 아무도 없었다. 경찰과 정치깡패, 행정 말단조직까지 지시, 동원하여 부정선거 사전계획을 실행하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조차 없었다.


왜냐하면 선거 결과는 경찰 지휘부와 내무부에 의해 완전히 날조됐다. 한희석 등 자유당 간부들은 1960년 3월15일 기획위원회 사무실에서 개표상황을 지켜보다가 대구에서 이기붕 5000표 장면 32표라는 비공식 보고를 받고 놀랐다. 대구는 대표적인 야당 도시였다.


한희석은 최인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국무위원들도 일부 지역의 개표 상황을 지켜보면서 자유당 후보가 95% 또는 97%를 넘지 않을까 ‘걱정’을 할 정도였다. 최인규․이강학 등은 한밤중에 경비전화로 이승만은 80%, 이기붕은 70~75%선으로 조정하라고 지시했다. 각지에서는 부랴부랴 감표에 들어갔는데 일부 지방에서는 최병환 내무부 지방국장이 50%선 조정을 지시해 혼란을 빚기도 했다.


<4 ·19 발포와 시위진압사건>




▲ 3,15부정선거에 대한 시위 도중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당시 16세의 김주열학생 시신 [사진 출처 : 구글 위키백과]
이러한 선거폭력과 부정 선거의 결과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전국에 걸쳐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그 때 선거 사상 최초의 유혈사태가 선거 당일인 3월15일 마산에서 발생했다. 3월15일 선거 당일 마산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합세하여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나섰다. 시위대는 “7시 개표 시각에 시청 개표장 앞에서 모이자” 하면서 오후 6시경 자진 해산했다.


시청에서 개표가 진행된 하오 7시30분경 시민과 학생 1만여 명이 “부정선거 다시 하라” 는 구호를 외치며 다시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 때 정전이 되면서 시위대를 향해 경찰의 발포가 시작됐다. 마산에서의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반정부시위가 선거 전후 전국에 걸쳐 대도시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부정선거와 불법선거를 규탄하고 나섰던 것이다.


4월 초 전국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을 때, 16세 마산상고생 김주열(金朱烈)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됐다. 김주열군의 눈에 박힌 최루탄은 군중을 향해서는 사용이 금지된 강력한 것이었다. 3월15일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가담했다가 죽임을 당한 그의 시신을 마산경찰서 경비주임 박종표가 바다에 던져 유기했던 것이다. 마산시민들과 학생들은 다시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시위 도중 경찰의 총에 맞아 다시 쓰러졌다.


4월19일 약 3만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교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그 가운데 수천 명이 경무대로 몰려들었다. 경찰은 데모대에 발포하기 시작했다. 전국적으로 부산, 광주, 인천, 목포, 청주 등과 같은 주요 도시에서 수천명의 학생들이 가세했다. 서울에서만도 자정까지 약 130명이 죽고, 1000여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기 시작한 직후 주요 도시에 계엄령이 내려졌다.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중장 송요찬(宋堯讚)이 서울지구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됐다.




▲ 4월19일 약 3만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교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이승만 정권은 결국 4.19혁명으로 무너졌다. [사진 출처 : 구글 위키백과]
4월19일 이후 데모가 연일 계속됐다. 이제 학생이 아닌 일반시민들도 가담했다. 그러나 군대는 유혈사태를 경계하고 재산의 파괴를 방지하는 데 신경을 쓰면서 방관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4월21일 내각이 전국의 혁명적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4월25일 시위의 새로운 물결이 일어났다. 각 대학 300여 명의 교수들이 이승만의 사임을 요구하는 제자들을 지지하면서 서울시내를 행진하고 나섰던 것이다. 결국 4월26일 이승만은 사임하고 제1공화국은 붕괴됐다. 4월혁명 과정에서 전국적으로 186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끝]




▲ 4.19 혁명으로 이승만은 하와이 망명길에 올랐다. 당시 언론에 올라온 이승만 망명기사 [사진 출처 : 구글 위키백과]
* 반헌법행위자열전 1차 집중검토대상자 자료를 중심으로 게재된 '반헌법행위 이렇게 저질러졌다'는 이번 주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원고 게재를 허락해주신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그동안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오유석 성공회대 연구교수  news@minplus.or.kr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첨부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