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제목 [크리틱] 케테 콜비츠, 새벽 / 서해성 (한겨레 2015-02-06)
2015 2월 16 - 10:37 peace518


케테 콜비츠는 새벽에 한국에 도착했다. 1980년 5월27일 04시, 그 새벽은 계엄군 총구 끝을 타고 금남로 도청 유리창을 깨면서 날아들었다. 세상은 침묵이라는 먹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중심부를 한 청년이 조각칼 끝으로 찢어내면서 5월 연작이 시작되었다. 홍성담이 합판을 파내 항쟁을 기록한 목판화 50점을 ‘새벽’이라고 이름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저 80년대를 횡단하면서 ‘새벽’은 판을 바꿀 정도로 나뭇결 자체가 닳도록 찍혀 나갔다.

목판화의 역동성은 벌써 오윤에게서 예감되었다. ‘민’이라 부르는 거대한 익명은 그를 만나 조형으로 비로소 호적을 얻었다. 그가 칼로 새겨낸 표정과 몸동작은 어디선가 본 듯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민중의 지문이었다. 그의 칼끝에서 새 세상을 도모하는 주체로서 민의 새벽이 신명으로 열리고 있었다. 이철수, 김준권, 홍선웅, 유연복네들은 다 오윤의 아우들이다. 80년대는 목판화 시대였다. 골방에서 광장에서 한국의 먹은 뜨거웠다. 이들의 어머니가 콜비츠다.

그를 동아시아 해방과 혁명의 새벽으로 불러들인 이는 루쉰이었다. <전쟁> 연작(1924) 가운데 ‘희생’이 그가 관여하던 잡지 <북두> 창간호(1931)에 실렸다. 폭넓은 게르만 어머니의 치맛자락이 처음 극동에 드리워지던 때는 장제스의 학살로 국공합작이 깨지고 장시지구에 소비에트를 형성한 마오쩌둥 정부에 토벌공격을 퍼붓던 무렵이었다. 봉건과 제국주의, 좌절과 허위, 부패가 낳은 일상의 얼굴인 아큐(Q)를 각인시켜 도려내고 새 인간형을 창조해내는 루쉰과 동료들의 조각칼은 대륙을 갈아엎는 쟁기와 보습 역할을 자임하고 있었다. 정작 그들이 손에 쥔 미술도구는 잘라낸 우산 뼈대나 펜대에 끼우는 펜촉 반대편 둥근 부분이었다.

타이완의 새벽 또한 목판화에 찍혀 나왔다. 루쉰의 자장 아래 청년기를 보낸 쓰촨 출신 대만사범학교 교수 황룽찬(황영찬)은 타이완 민중이 외성인에 맞서 일으킨 2·28봉기(1947)를 그해 4월 나무판에 새겨 알렸고 이내 옥으로 끌려갔다. ‘개(일제)가 나가더니 돼지가 들어왔다’고 외친 몇만명이 사라졌다. 그의 연인이 처형된 이튿날 새벽 황룽찬마저 총살되었다. 고작 서른두살이었다. 동아시아에서 목판화는 이렇게 끓어오르는 시대의 어둠을 먹으로 삼아 찍혀 나왔고 생동하는 대중의 근육으로 작동해왔다.

유럽 대륙에서 가장 늦게 새벽이 오는 발트해 옛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난 케테 콜비츠는 독일혁명의 새벽을 판화로 찍어냈다. 그가 역사를 아로새겼다기보다 역사가 그를 빌려 세상에 말을 걸었다. 그에게 결정적 영감을 준 <직조공>(1893)을 쓴 게르하르트 하웁트만뿐 아니라 하이네 또한 슐레지엔의 ‘직조공의 노래’를 불렀다. 음지에서 세상을 날로 씨로 짜던 실은 콜비츠에게로 와서 질박한 선이 되었다. 그 선들이 빚어내는 형상은 육체가 있는 사상이다. 이것이 예술이다. 콜비츠의 힘은 여기서 나온다. 사상이란 한낱 뇌가 아니라 피가 더운 몸으로 박동할 때 인간세상의 지혜가 된다.

베를린 지성 1번지 훔볼트대학 옆 천장 한가운데 둥근 구멍을 낸 건물 노이에 바헤 아래 한 어머니가 죽은 아들을 껴안은 채 앉아 있다. 늘 새벽인 양 희미한 자연채광에 어깨를 드러낸 여인은 눈과 비바람을 맞으면서 말없이 고통의 중심에 있다. 미켈란젤로는 신의 피에타를 깎아냈고 아들과 손자를 전장에서 잃은 어머니 콜비츠는 이 인간 피에타를 심장으로 녹여냈다. 그 피에타는 오늘 서울(북서울미술관, 4월19일까지)에서 세월호의 모성으로 곧장 직진해 온다.

시대의 고통과 공감하는 힘이야말로 명작의 존립 근거다. 명작은 언제나 현재적이다. 역사에 뿌리를 내리고 어제보다 더 어제를, 내일보다 더 내일을 오늘로 가져오고자 치열하게 살아낸 케테 콜비츠가 서울에 왔다. 민주주의의 오후에.

서해성 소설가




첨부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