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연구

번호 143
제목 1997년과 2010년, 여전히 갈 수 없는 조국

2012 1월 4 - 16:05 익명 사용자

1997년 홋까이도, 재일조선인 J형과의 첫 만남



“형! 서울에 놀러 오세요! 서울에서 술 한 잔 마셔요.”

1997년 여름, 대학 4학년 시절 처음으로 찾은 일본 홋까이도에서 만난 재일조선인 J형에게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을 건넸다. 그런데 쾌활하기만 하던 J형은 조금은 슬픈 표정으로 의외의 대답을 건네 왔다.

“사실 나는 한국에 못 가, 조선적이거든...”

“조선적 그게 뭐지?, 근데 왜 한국에 못 와요. 우리 동포인데...”

나와 재일조선인이라는 존재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997년 여름, 나는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았다. 일본의 최북단 홋까이도 슈마리나이(朱鞠内). 영하 41.2도의 최저기온을 기록한 극한의 땅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강제연행되어 댐공사와 철도공사 현장에서 강제노동 끝에 숨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에서 다양한 국적과 배경을 가진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한일대학생공동워크샵’(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샵’으로 바뀜)이라는 이름으로 열린 열흘 가량의 유골발굴 작업 동안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우리말과 일본어를 모두 할 수 있었던 몇몇 재일조선인 참가자들에게 의사소통을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선학교를 졸업하고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던 J형은 그 쾌활한 성격과 넘치는 유머감각 탓에 한국 참가자들 사이에서 단연 인기가 높았다. 나는 당연히 서울에서 만나자며 J형에게 무심코 말을 건넸고 돌아온 J형의 대답은 나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 뒤 나는 J형을 비롯한 재일조선인 친구들과의 만남을 통해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삶과 마주하게 되었다.



1997년 일본의 홋까이도를 처음 찾은 이후, 나는 그 곳에서의 만남과 인연, 운명적인 사건으로 결정적인 삶의 방향을 찾게 되었고, 지금은 서울의 평화박물관에서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그 사이에 2002년부터 2006년까지는 일본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의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草の家)‘라는 작은 평화박물관에서 평화운동을 배우고 실천하며 살기도 하였다. “역사교육”의 지면을 통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만난 사람들, 역사의 길에서 평화를 생각한다는 것,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아시아의 평화를 이루는 길에 대해 여러 선생님들과 마음을 나누고 싶다.

2007년 9월부터 평화박물관에서 내가 맡고 있는 일은 회원사업이다. 1,000여명의 소중한 회원 여러분들께서 보내주시는 소중한 정성으로 평화박물관이 운영되고 있는 만큼, 늘 회원님들께는 감사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걱정이 앞선다. 더구나 평화박물관 회원님들 가운데 많은 분들께서 이 글을 읽으시는 역사 선생님들이 아닐까 생각하면 새로운 만남에 대한 설렘과 함께 두려움도 든다.





재일조선인이라는 존재 - 식민지와 분단의 역사를 살아온 사람들



1945년 일본의 패망 당시 일본에 있던 재일조선인 모두는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1947년 5월 3일, 국민주권과 평화주의를 기본정신으로 하는 일본의 새로운 평화헌법이 시행되기 하루 전날인 5월 2일, 일본 천황의 마지막 칙령으로 ‘구식민지 출신자들은 외국인으로 간주한다’는 외국인등록령이 제정되어 재일조선인들은 ‘조선적’으로 외국인 등록을 해야만 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성립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조선’은 남도 북도 아닌 일제강점기의 조선반도를 의미하는 기호에 지나지 않았다. 이미 존재하지 않는 역사속의 ‘조선’이 재일조선인들의 외국인등록증의 본적란에 기입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일본의 신민으로(臣民) 충성을 강요받던 조선인들은 하루아침에 ‘무국적자‘, ’난민‘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구식민지 출신자를 외국인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전후보상으로부터의 배제와 차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국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1960년대까지는 국민건강보험에도 가입할 수 없었고, 1980년대까지는 국민연금에도 가입할 수가 없었다.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시 재일조선인들은 아파서도 안 되었다. 당시의 차별적인 연금정책 때문에 현재에도 국민연금 혜택을 받지 못하는 무연금자인 재일조선인 1세들도 많이 있다.

1948년 ‘제주4․3’ 당시에는 학살을 피해 많은 제주도 사람들이 일본으로 다시 건너 와 지금도 오사카에는 많은 제주도 출신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후 남북이 분단되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동포사회도 커다란 분단의 상처를 안게 된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루어졌지만 이는 동포사회를 가르는 또 하나의 분단의 시작이었다. 한일협정으로 대부분이 남쪽 출신인 재일조선인들이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는 길은 열렸지만, 모든 동포들이 기꺼운 마음으로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1959년부터 일본과 북한 적십자사의 협정으로 60여만 명의 재일조선인 가운데 약 10만 명에 가까운 재일조선인들이 북한으로 귀국을 하였기 때문이다. 영화 ‘박치기’에도 소개된 바가 있지만 당시 조선 사람들은 차별과 빈곤으로 더 이상 일본 사회에서는 희망을 찾을 수가 없었다. 고향은 아니지만 죽기 전에 조국 땅을 밟 10만는 소망을 가진 1세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북한행 귀국선에 몸을 실었고, 영화 ‘박치기’의 주인공 안성처럼 일본 땅에서는 더 이상 내일을 꿈꿀 수 없겠다 생각한 젊은이들도 북한으로 떠났다. 어린 자식의 미래를 위해서 초등학생 또래의 어린이를 북한으로 보낸 부모들도 있었다.

일본의 한 시골 초등학교에서 재일조선인 어린이들이 당시 북한으로 떠나며 기념으로 심은 나무를 본 적이 있다. 나가사키의 원폭조선인희생자 추도비 옆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귀국 기념식수, 1959년 12월 8일’이라고 선명히 적힌 작은 표석이 한 그루의 나무 아래에서 당시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사진 참조)

 

나가사키 원폭조선인희생자 추도비 옆의 기념식수 표지판

당시 일본 정부를 비롯한 여야 정당, 언론, 시민사회단체들은 한 목소리로 ‘인도주의’의 입장에서 재일조선인들의 귀국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며 열렬히 응원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들을 골치 아픈 존재로 여겨 계획적으로 추방하려 했다는 사실이 최근의 연구로 밝혀지고 있다.(북한행 엑소더스, 테사 모리스 스즈키 지음, 한철호 옮김, 책과 함께. 2008) 이는 당시 일본 정부가 귀국하는 재일조선인들에게 재입국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절대조건으로 제시한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즉, 일본이 바란 것은 ‘왕래’가 아니고 ‘귀환’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10만 명의 사람들이 북한행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보면, 당시 일본 사회에서 전혀 미래를 내다볼 수 없었던 재일조선인들의 답답하고 불안한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나는 재일조선인 가운데 북한에 가족이나 친척들이 살고 있는 친구들을 드물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지금도 중국을 거쳐 걸려오는 가족의 전화를 받는 동포들이 있고, 의약품이나 옷에서부터 손자, 손녀의 학용품까지 생필품을 상자 가득 담아 북한의 가족들에게 보내는 재일조선인 할머니들이 있으며, 북한으로 수학여행을 가는 조선학교 학생들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친척들을 그 곳에서 만난다.

1965년의 한일국교정상화 결과, 한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들은 한국으로 왕래를 할 수가 있었지만, 북한으로 가족을 떠나보낸 사람들은 고향으로 갈 수 있는 여권을 차마 손에 쥘 수 없었다. 남북의 분단 상황에서 한국 국적을 따는 것은 곧 북한에 둔 가족을 포기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편 박정희 정권을 비롯한 이후의 군사독재 정권들은 이들 ‘조선적’ 동포들을 북한 주민으로 간주하여 적대적인 정책을 계속해서 취하였다.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얼마나 많은 재일동포들이 북한의 조작간첩으로 몰려 고통을 당해왔는가를 보라.

사실 재일동포 사회는 남과 북의 분단 상황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남과 북처럼 군사분계선으로 갈라놓을 수 없는 사회이다. 친척들 가운데는 한국 국적, 조선적, 일본 국적을 가진 동포들이 모두 어울려 살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이른바 총련계 학교라고 말하는 조선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도 한국 국적, 일본 국적, 조선적의 학생들이 모두 어울려 공부를 하고 있다. 또한, 민단에도 회비를 내면서 총련에도 회비를 내는 동포들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한일협정은 이러한 동포 사회를 남과 북으로 또 다시 둘로 분단시키려 한 냉전시대의 산물이었다.





‘조선적’ 동포들의 고국방문 - 1회용 임시여권



‘조선적’ 동포들이 한국을 방문하기 위해서는 한국 대사관이나 영사관에서 1회용 임시여권을 발급받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영사와 면접을 해야 하는데 한국에서 누구를 만날 것이며 어디에 가는지를 일일이 대답해야 하고 심지어는 ‘남과 북이 전쟁을 하면 누구 편에 설 것인가’ 따위의 비상식적인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아직 고향에 가지 못했기 때문에 저도 가고 싶지만 갈 수가 없습니다.’며 말하는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어릴 적 추석이나 설날을 전후하여 ‘조총련계 동포 고국방문단’이라는 현수막을 들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김포공항에 오는 장면을TV를 통해 본 기억이 있다. ‘조선적’을 가진 채로 고국에 올 수 있는 고향 방문의 기회는 단 한 차례. 두 번째 부터는 한국 국적을 딸 것을 강요받아 온 재일조선인들이 꿈에도 그리던 고향 땅을 찾아오는 길이라는 걸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2000년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이후로 남북관계는 획기적으로 변화하여 화해와 교류 협력 시대로 접어들었고, ‘조선적’ 재일동포들이 한국을 찾을 수 있는 기회도 이전보다 눈에 띄게 늘었다. 물론 임시여권을 발급받는 번거로움은 여전한 채였지만, 2002년 월드컵, 2002년 아시안게임 때도 많은 ‘조선적’ 동포들이 단체로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나의 몇 몇 친구들도 2000년 이후 여러 차례 한국을 찾아와 시대의 변화를 실감하며 서울에서 즐거운 추억을 함께 나누기도 하였다.

1997년, 내가 처음으로 만난 재일조선인 J형도 한국 국적을 취득하여 몇 차례 서울에서 만날 수 있었다. 세월의 변화를 실감하며 J형을 서울의 술집에서 다시 만났을 때의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던 날, 내가 가장 먼저 전화를 한 친구들도 J형을 비롯한 재일조선인 친구들이었다.

한국 사회에서는 좀처럼 실감하기 어려운 분단의 장벽을 나는 재일조선인 친구들과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냉전의 산물 ‘국가보안법’이 엄연히 존재하는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이들이 고향을 찾는 길에서 우리는 늘 살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2010년 가을, 재일조선인들의 오늘

 

조선학교 아이들의 수업 모습

1997년 내가 재일조선인 J형을 처음 만난 날로부터 13년의 세월이 흘렀다.

2010년 11월, 일본 도쿄의 한 대학.

“안녕하십니까?”

밝게 우리말로 인사를 건네 오는 한 여학생 친구 L이 있었다. 일본에서 우리말로 인사를 건네 오는 친구들을 보면 무엇보다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대학원에서 재일조선인 여성들의 삶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는 L과 밥도 함께 먹고 학교 안내도 받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포 학생들과 일본 학생들이 역사와 평화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실천하는 단체에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는 L은 고등학교까지 조선학교를 나왔다고 했다. 또한 몇 차례 한국에도 온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최근에 한국에 다시 가려고 임시여권 발급을 신청하였더니, 영사관에서 거부를 했다고 한다. 이유를 물어보니 L이 활동하고 있는 학생단체가 총련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고 한다. 한국 여권을 가지고 있는데도 영사관에서 자의적으로 여권발급을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씁쓸한 표정을 짓는 친구 앞에서 뭐라고 말을 건네야 할 지 답답하고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또 다른 재일조선인 친구 Y는 조선학교를 졸업하고 동포단체에서 일하고 있다. 몇 해 전에 한국 국적으로 변경하여 여러 차례 서울을 다녀갔다. 지난 달 도쿄에서 친구를 만났다. 12월에 서울에 올 예정이라며 이번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른다고 한다. 이유를 물어보니 영사관 측에서 지난번에 발급한 여권은 내년 2월에 기한이 만료되는데, 지난번에는 총련과 관계된 것을 모르고 자신들의 행정착오로 발급한 것이므로, 다시는 발급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는 것이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심정으로 서울을 찾는 친구의 복잡한 심경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조선적’을 끝내 고수하면서도 한국을 자주 찾았던 친구 H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후에는 아예 한국행을 단념했다. 한국 국적을 가진 동포들에게까지 과거의 활동과 경력을 문제 삼아 여권을 발급하지 않는 상황에서, ‘조선적’인 자신은 아예 임시여권을 내 주지 않을 것이 불을 보듯 훤하기에 한국행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문자와 트위터, 이메일로 늘 한국의 친구들과 소통하고 있는 H의 메시지 뒤에는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슬픔이 늘 느껴진다.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가지 못한다는 것.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마음대로 만날 수 없다는 것.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이른바 ‘국격’을 그리도 따지는 21세기의 국가에서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 ‘조선적’ 동포들에 대한 입국이 계속 거부되는 상황에 대해 부당한 인권침해라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가 있었음에도, 이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조선적’ 동포들의 입국을 거부하고 있다. 현재 ‘조선적’ 동포에 대한 입국거부를 둘러싸고 한국 법원에서는 재판이 진행 중이다.

 

조선학교 게시판과 계단에 붙어 있는 게시물들

큐슈에서 만난 대학생 O는 조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대학에 진학했다. 한국의 한 대학에서 교환학생으로 1년간 유학을 하는 동안 ‘조선적’이라는 이유로 비자 연장을 거부당하여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다행히 무사히 유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와 구직활동을 하였는데 ‘조선적’이라는 이유로 몇 차례 최종면접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다행히 ‘조선적’ 동포가 일하는 상사(商社)에 취직을 할 수 있었지만, 출장을 많이 가야 하는 직업이라 국적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앞으로의 직장생활을 생각하면 한국 국적으로 바꾸면 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자신이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것은 불의에 굴복한다는 듯한 느낌이 들어 싫고, 재판을 하며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자문을 구하는 22세의 재일조선인 청년에게 나는 아무런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요즈음 명동, 인사동, 남대문 할 것 없이 서울 시내 거리는 어디를 가도 일본의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한류 드라마, 한류 가수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매일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지금, 위에서 이야기한 ‘조선적’ 재일조선인 친구들의 얼굴을 서울의 거리에서 마주할 수 없다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일본의 ‘북한 때리기’ 광풍 - 칼날은 재일조선인들을 향해



2002년 9월 17일, 일본의 총리로는 역사상 처음으로 고이즈미 수상이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가 세상에 알려진 이후, 일본 사회에서는 ‘납치문제’, ‘핵문제’를 빌미로 8년이 넘게 ‘북한 때리기’의 광풍이 식을 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다. 북한과 관련된 일은 어떤 내용이건 함부로 이야기를 해도 상관이 없다는 식이다. 군사독재 시대의 반공교육에 버금가는 ‘세뇌’가 일본 사회 전체에서 이미 완료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상황은 심각하다.

한편, 일본의 보수세력은 북한의 ‘위협’을 과장하고 이를 철저하게 이용하여 일본의 평화, 나아가 동아시아의 평화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 정부가 의혹투성이의 ‘천안함 사건’ 결과를 발표한 직후, 하토야마 전 총리는 오끼나와의 미군기지 이전문제에 대해 국민들과의 약속을 무시하고 북한의 ‘위협’을 빌미로 미국의 의도대로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가 연립여당의 반발로 총리직을 내놓아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를 당한 것은 재일조선인 사회이다. 조선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더 이상 치마저고리를 입고 통학을 할 수 없는 상황은 이미 오래 전부터 계속되어 왔다. ‘재일의 특권을 용서하지 않는 시민의 모임’이라는 우익단체가 전국적으로 결성되어 공공연하게 조선학교, 동포사회에 대한 협박을 자행하고 있다. 민주당 정권이 내세운 핵심공약 가운데 하나인 고교무상화 정책은 노골적으로 조선학교만을 배제하려 하였으나, 일본과 재일동포 사회의 저항으로 조선학교가 무상화 대상에 가까스로 포함되는 분위기를 만들었지만 여전히 도쿄와 오사카 등의 극우적인 자치단체장들은 공공연하게 반대를 표명하며 조선학교와 재일조선인 사회를 압박하고 있다.

식민지 시대의 ‘조선인 멸시’가 재현되는 것과 같은 광풍의 회오리 속에서 이미 많은 재일조선인들은 돌이킬 수 없이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재일조선인의 고난의 역사 속에서 지금과 같은 재일조선인들에 대한 탄압은 최악의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재일조선인들에게 한국 사회는 어떻게 답할 것인가?


 


재일조선인의 삶에 우리는 무엇이라 답할 것인가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많은 ‘조선적’ 동포들이 어쩔 수 없이 한국 국적이나 일본 국적으로 자신의 국적을 바꾸었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 이전에는 ‘조선적’ 동포들이 한국 국적을 따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는 이도 쉽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한국 국적 취득을 거부당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고 한다.

2년 후의 국회의원 선거, 대통령 선거 때에는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재일조선인들도 투표를 할 수 있게 되는데, 이때에 ‘조선적’에서 한국 국적으로 변경한 동포들의 표를 미리 의식한 행태가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본국의 정치 상황에 따라 재일동포 사회가 또 한 번 참정권을 둘러싸고 분단되고 홍역을 치르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식민지와 분단의 역사의 고난을 겪어오며 한국과 북한, 일본이라는 국민국가의 틈새에서 자신들의 역사성과 아이덴티티를 꿋꿋이 지켜 온 재일조선인들에게 한국 사회는 이제 어떻게 답할 것인가?



연평도에 북한의 포격이 있은 바로 다음 날인 11월 24일, 일본 정부는 조선학교에 대한 '고교무상화' 적용을 추진하던 모든 절차의 중단을 발표했다. 북한의 ‘위협’을 빌미로 일본 정부의 칼날이 또 다시 재일조선인들의 가슴을 겨누었다.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식민지의 역사, 분단된 조국의 슬픈 현실을 오늘 또다시 한 번 절절히 느꼈을 나의 재일조선인 친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려 본다.









김영환(평화박물관 활동가)

역사교육2010 겨울 91호

첨부파일
작성일자 2018-08-20
조회수 2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