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연구

번호 154
제목 아시아의 오늘을 걷다 -민주화 속의 난민화, 그 현장을 가다. 유재현.
2012 2월 1 - 17:21 익명 사용자

아시아의 오늘을 걷다 -민주화 속의 난민화, 그 현장을 가다. 유재현. 그린비.
목차
머리말 

1_ 독재를 넘어서 인도네시아_ 말레이시아
왕이 되고 싶었던 독재자
수카르노와 반둥의 꿈, 아시아의 꿈
노동과 섹스의 섬
인종학살의 그늘
말레이시아인의 말레이시아와 부미푸트라의 말레이시아 

2_ 부서진 약속의 땅 필리핀
약속의 땅 그리고 혁명
테러의 필리핀
인터뷰: 중부 루손 신인민군 최고정치위원
대사관과 코코넛 사이
태평양을 사이에 둔 세부와 쿠바 

3_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똑같다면 베트남_ 캄보디아
두 도시 이야기: 사이공과 프놈펜
후일담과 전쟁을 뛰어넘어: 남한과 베트남문학의 오늘과 내일
당렉산의 우울한 총성 

4_ 왕과 군부는 절대 웃지 않는다 태국_ 미얀마
왕과 군부 그리고 자본
왕과 쿠데타의 방콕
양곤 강변에서 

5_ 문제는 민주주의야 네팔_ 티베트_ 홍콩
21세기 최초의 실험
샹그리라의 신권과 시장사회주의
팍섹과 까울링씽차이씽 그리고 오늘의 홍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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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제 주관이 강한 간단한 리뷰입니다.

아시아의 오늘을 걷다
-아시아의 오늘, 독재의 곁을 걷다

아시아의 오늘을 돌아본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한국의 정기교육과정 중에 있는 세계사 교과서의 말미는 희망찬 아시아를 그리면서 끝이 난다. 동아시아를 필두로 급속도로 개발되고 있는, 나아지고 있는 아시아.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원자재 공급지뿐만 아니라 기초산업 이전의 중심지. 그러나 유재현의 ‘아시아의 오늘을 걷다’에서 보여주는 2천 년대의 아시아는 그다지 괜찮아 보이지 않는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등 여러 아시아의 나라들의 역사는 그렇게 낯설지 않다. 우리가 익히 살면서 알고 있는 한국의 역사와 너무나도 닮아있기 때문이다. 오랜 식민지의 역사, 여타 강대국들의 압력과 수탈, 그로 인한 내전과 타국과의 전쟁, 애국적 정치 인사들의 암살내지 숙청과 군부의 쿠데타, 그리고 오랜 시간 유지되는 독재, 심지어 독재 하에서 치열하게 이뤄지는 저항의 역사까지. 수하르토에게서도, 폴포트에게서도 우리는 낯설음을 느낄 수 없다. 아시아의 역사는 너무나도 유사하게 반복된다.

씁쓸한 감정, 한국의 386

이렇게 반복되는 아시아의 역사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에는 씁쓸함이 묻어난다. 특히 끊임없이 반복되는 독재의 현장을 만날 때가 그러하다. 기나긴 독재의 역사 속에 살아온 각 국가의 서민들과 만날 때, 독재가 끝났다고 대외적으로는 알려져 있으나 독재의 잔재가 되레 더 무겁게 깔려있는 이 천 년대의 역사를 마주할 때, 그는 마치 오래 전 자신의 괴로운 기억을 떠올리듯 감상적으로 변한다. 약간 의아스러운 지점이다. 왜 하필, 아시아의 수많은 고통 중 독재의 역사에, 그 중에서도 독재 청산 후 이어지는 새로운- 더 은밀하고 더 튼튼한 독재에 강하게 반응하는 것일까.
이러한 시선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독재의 역사를 온몸으로 겪어온 한국 386세대의 감정적 특징을 바라볼 수 있다. 청춘을 바쳐 독재에 항거한 세대의 모습, 나름의 승리 끝에 들어선 민주정부 아래에서 더욱 공고해지고 내면화되는 권력의 힘에 한탄과 자조, 허무를 느끼는 감정이 책의 곳곳에 스며들어있다. 수하르토 정권 전후에 모두 택시기사를 했던 한 주민과의 대화는 이러한 모습을 잘 드러내준다.

“수하르토 시절은 어땠어요? 지금 정권과 비교한다면.”
“수하르토 때가 조금 나았지요.”
“왜 그렇지요?”
“수하르토 시절에는 휘발유 값이 200~300루피였는데 지금은 4,500루피잖아요.”
“지금 정권의 부패 문제는 어떻습니까?”
“80퍼센트쯤 부패했지요.”
“수하르토 정권은요?”
“100퍼센트였지요.”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80퍼센트의 부패가 100퍼센트의 완벽한 절대부패보다는 얼마간 나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에게는 그게 그것이었다. 그럴 바에는 휘발유 값을 따지는 편이 나은 것이다. 한 농민은 비료와 종자를 얻기에 수하르토 시대가 더 수월했다는 이유로 지금보다 수하르토 시대가 좋았다는 말을 전했다. 걸핏하면 박정희 때가 좋았다고 들먹이는 남한의 꼴이었다.                                             (‘왕이 되고 싶었던 독재자’ 中)

나아갈 길은 어디인가

저자는 아시아가 겪는 반복적인 수탈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자신이 겪어온 역사를 통해 반추하고 괴로워한다. 그러한 그가, 아니 한국에서 독재에 대한 저항의 역사를 겪어온 사람들이라면 마찬가지겠지만,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어느 방향일까. 그가 말할 수 있는 방향, 그리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해하기는 하는 방향, 이렇게 두 갈래의 길이 있다. 하나는, 책 안에서도 일종의 전제로서 다뤄진 ‘연대와 저항’의 방향이다. 기가바이트급 인터넷이 전 세상에 연결되어있는 상황 속에서도 잊혀져가고 있는 바로 옆 동네 아시아의 역사, 이 단절을 넘어 고통의 역사를 나누고 있는 전 아시아-전 세계가 서로 연대하고 독재와 수탈에 저항하는 방향이 그것이다. 한국 386세대의 가장 자연스러운 대답이기도 하면서, 가장 당당하게 정답처럼 말할 수 있는 방향이다. 다른 하나는 386 속에서 386과 함께 386의 일원으로 저항을 같이 했지만, 나이를 먹고, 지킬 것이 하나 둘씩 생겨나면서 적당히 세상에 타협하는(이런 태도를 취할 사람과 그의 친구가 말하듯이) 방식이다. 마치 4,500루피보다는 200~300루피가 살기에 좋다는 대답처럼 말이다. 저자는 이 두 대답을 감정적으로는 모두 공감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연대와 저항을 지지하는, 아니 이제는 지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고, 약간의 씁쓸함과 소주 냄새를 담아, 그가 가장 자연스럽게 대답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자고 이야기를 한다.
맞는 말이다. 정답이라면 정답이다. 오직 유일하게 독재를 청산하고 생활인을 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방향은, 그것이다. 전두환이 대통령에서 물러나고도 다섯 번째의 대통령이 들어섰지만, 아직도 수많은 시민단체와 운동권 단체들은 끊임없는 연대와 투쟁을 이야기한다. 더 이상 올곧게 향할 길 없는 분노를 모아 적을 상정하면서. 그 적은 자본이 되기도 하고, 남성주의나 친일파의 후손, 미국, 삼성이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을 거쳐 새로운 이름을 찾아간다. 쉽게 말해지는 들뢰즈 식의, 혹은 프랑스 6.8 혁명과도 같은 자유로운 개인들의 다채로움은 비현실적이어 보인다. 끊임없이 상정되는 적들의 이름들 앞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적을 찾아가고, 그러다보면 연대의 가능성은 줄어들고, 그러다보면 투쟁의 지속성도 줄어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저자는 말할 수밖에 없다. 연대하고, 투쟁하자고. 어쩌면, 미안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386의 권력은 그곳에서 나오니까.

단일한 적과 단일한 목적에 반대하며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이미 사회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수없이 반복된 말을 하게 될 것이다. 단일한 적과 단일한 목적을 상정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내가 역사의식이 단절된 2천 년대에 대학시절을 보낸 세대여서 일수도 있고, 개인의 내밀한 감성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문화자본에 노출된 세대여서 그럴 수도 있고, 그럴 수도 있다.
한 가지 적을 상정하는 것은 한 가지 목적을 상정하는 것과 같으며, 그러한 태도는 인간을 개체가 아닌 전체로 보게 된다. 그 과정에 지워지는 개개인의 역사, 개개인의 고통, 개개인 속의 분열되고 혼선된 욕망과 기억 그리고 감각. 이것들의 중요성은 아무도 지지해주지 않게 된다. 너무나 미세하고 너무나 연약하고 너무나 쉽게 거대한 것들에 짓눌려버리기 때문에.
아시아의 역사는 너무나 오래 가려져있었고 너무나 오래 억압받아왔다. 연대도, 투쟁도 중요하다. 그러나 연대와 투쟁의 이름으로 가려질 수많은 개체들을 또다시 버려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미 그러했듯이.
첨부파일
작성일자 2018-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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