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제목 박정희가 두려워한 장준하 암살 (오마이뉴스, 190412)

박정희가 두려워한 장준하 암살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 70회] 사건 관련자들이 뒤늦게나마 역사 앞에 사죄하는 모습을 보고싶다
19.04.12 16:56l최종 업데이트 19.04.12 16:57l

김삼웅(solwar)             
 
 18일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약사계곡에서 열린 고(故) 장준하 선생 43주기 추모식에서 고인의 영정과 꽃이 놓여 있다.
 18일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약사계곡에서 열린 고(故) 장준하 선생 43주기 추모식에서 고인의 영정과 꽃이 놓여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결정적 증거 앞에서도 오류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고집하는 날 바로 그때 진정한 과오가 시작된다"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에서 한 말이다.

75년 8월에 포천군 약사봉 계곡에서 암살당한 장준하의 오른쪽 두개골 부위에서 지름 6cm크기 원형으로 함몰돼 있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서울대 의대 법의학연구소의 이윤성 교수가 검사한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 사진. 두개골에 있는 깨지고 함몰된 부위가 외부 타격에 의한 타살임을 선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서울대 의대 법의학연구소의 이윤성 교수가 검사한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 사진. 두개골에 있는 깨지고 함몰된 부위가 외부 타격에 의한 타살임을 선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 장준하기념사업회

관련사진보기

전문가들에 따르면, 두개골 함몰은 망치와 같은 예리한 둔기로 가격당한 흔적이라 한다. 바위에서 추락사했다면 두개골 전체가 망가졌을 터인데, 한 부위만 함몰돼 있는 상태는 인위적인 가격이라는 소견이다.

장준하 유골은 전문가가 아니라도 타살 흔적을 확연하게 드러낸다. 두개골 오른쪽 원형으로 금이 간 상처 부위는 깊이 1cm가량 들어간 상태로 나타났다. 상처 오른쪽 위 45도 각도로 금이 가 있고, 왼쪽과 아랫쪽으로도 갈라져 있었다.

진실은 무엇인가?

장준하는 왜 의문사를 당해야 했고, 긴 세월 진실은 묻혀졌는가? 40여 년  만에 드러난 유골은 무엇을 말하는가?
 
 <독립원정대의 하루살이 -3부, 국내로 진격하라>장준하와 동지들
 <독립원정대의 하루살이 -3부, 국내로 진격하라>장준하와 동지들
ⓒ 장준하 평전

관련사진보기

그가 광복군 대위로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기 위해 해외 망명 지사 중에서 가장 빨리, 45년 8월 17일 고국에 들어왔다가, 일제에 쫓겨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고, 뒤늦게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했다. 그리고 정확히 30년 뒤 같은 날 일본군 장교 출신들이 지배하는 고국에서 '실족사' 이름의 의문사를 당하였다. 정확한 표현으로는 암살되었다.

장준하 암살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는 그가 변사하기 전에 보인 행적을 돌아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단순 실족사로 묻어두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내키지 않을지 모르지만, 진실은 모든 가치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장준하가 암살을 당한 시점은 박정희 대통령의 '전성기'였다. 그는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이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 장교가 되어 일제와 싸울 때 박정희는 혈서를 써서 만군에 들어가고,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다카키 마사오'의 이름으로 일제에 충성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박정희의 권력 주변에는 만군ㆍ일군장교 출신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75년의 상황을 되돌아보자.

2월 12일 박정희는 강압적인 수법으로 유신체제 찬반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고, 3월 8일 〈동아일보〉를 탄압하여 112명의 기자가 해고되었다. 4월 8일에는 긴급조치 7호를 선포하고, 이튿날 인혁당 관련자 8명에 대해 전격 사형을 집행했으며, 4월 11일 서울농대생 김상진 군이 유신체제와 긴급조치에 항의하며 할복 자결하였다.
  
 1973년 12월 24일 서울 YMCA 2층 총무실에서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발표하는 장준하
 1973년 12월 24일 서울 YMCA 2층 총무실에서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발표하는 장준하
ⓒ 장준하기념사업회

관련사진보기

정부는 5월 13일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여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ㆍ비판ㆍ개정 주장 및 긴조 9호에 대한 비판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유신체제도 긴급조치도 장준하의 입과 행동을 막지는 못하였다. 73년 12월 '민주회복을 위한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가, 이듬해 1월 긴급조치 1호 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

'운명의 해' 인 75년 1월 8일 장준하는 대통령 박정희에게 '공개서한'을 보내었다.

"국헌을 준수한다고 서약한 귀하 스스로가 그 선서를 헌신짝 같이 버리고 헌법기관의 권능을 정지시키고, 헌법제정 권력의 주체인 국민을 강압적인 계엄하에 묶어놓고 '국민투표' 라는 요식행위를 통해 제정한 소위 '유신헌법' 으로 명실상부하게 귀하의 1인독재체제만을 확립시켰다"고 매섭게 비판, 파괴된 민주헌정의 회복을 위해 대통령 자신이 개헌을 발의하라고 촉구하였다.

하지만 장준하의 충고는 철저하게 배척되고, 박정희는 오히려 그동안 계엄령, 위수령, 긴조1~8호의 종합세트격인 긴조 9호를 선포하며 막장으로 치달았다.

장준하는 중국 망명기 불로하(不老河) 강가에서 불렀던 애국가와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의 다짐을 돌이키면서, 변고를 당하기 전 무엇인가 중대한 일을 앞둔 사람처럼 '신변정리'를 서둘렀다.

장준하는 서울에서 함석헌ㆍ김대중을 만나고 광주로 내려가 홍남순 변호사를 만났다. 홍 변호사와는 무등산 등반을 하면서 긴 얘기를 나누었다. 장준하의 일련의 만남은 재야 대표적 인사들이 긴조 9호의 해제는 물론 박정희의 퇴진을 비롯한 초강경 투쟁의 방안이 논의되었던 것으로 전한다.

이와 같은 장준하의 수상한 행보는 권력의 촉수에 잡히게 되었을 터이다. 오래 전부터 박정희 정권은 장준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김옥길 이화대학 총장이 쌀 한 가마를 장준하의 셋집에 실어다 준 것까지 보고 받고 있었다.

장준하의 약사봉 변고 다음날 진종채 보안사령관이 법무장관이나 중앙정보부장에 앞서 47분 동안 청와대에서 박대통령을 독대한 것으로 밝혀졌다. 장준하 사망 당시 105보안부대장이 검안현장을 방문했고, 그 결과를 보안사령부 본부에 텔레타이프를 통해 보고했으며, 당시 진 보안사령관에게 직보한 사실이 의문사위원회가 발간한 보고서에 나타난다. 법무장관은 19일, 중정부장과 국방부장관은 21일 각각 대통령에게 장준하 변사사건을 보고했다.
  
1975년 10월 장준하의 49재를 맞아 열린 ‘장준하 추모의 밤’에 참석한 함석헌과 이희호, 김대중(앞줄 왼쪽부터).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함석헌은 <사상계> 7월호에 실린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논설을 통해 박정희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가한다. 1975년 10월 장준하의 49재를 맞아 열린 ‘장준하 추모의 밤’에 참석한 함석헌과 이희호, 김대중(앞줄 왼쪽부터).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함석헌은 <사상계> 7월호에 실린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논설을 통해 박정희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가한다.
▲ 1975년 10월 장준하의 49재를 맞아 열린 ‘장준하 추모의 밤’에 참석한 함석헌과 이희호, 김대중(앞줄 왼쪽부터).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함석헌은 <사상계> 7월호에 실린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논설을 통해 박정희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가한다. 1975년 10월 장준하의 49재를 맞아 열린 ‘장준하 추모의 밤’에 참석한 함석헌과 이희호, 김대중(앞줄 왼쪽부터).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함석헌은 <사상계> 7월호에 실린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논설을 통해 박정희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가한다.
ⓒ 장준하기념사업회

관련사진보기

중정의 움직임도 의문투성이었다.

유일한 '목격자' 라는 김용환이 중정의 사설정보원이란 진술이 중정 직원에 의해 확인되었다. 김용환은 사고 발생 직후인 당일 오후 4시께 사고 현장을 이탈하여 밤 12시까지 행방이 묘연했다. 당일 실시한 현장검증에 동행하지도 않았다.

현지 경찰관서인 포천서 이동지서 경찰관은 사고 신고를 받기 전에 이미 경기도경으로부터 사망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으며, 중정 요원들은 당일 오후 5시경 사고현장을 시찰하고, 사고현장에서 경찰에게 "안 본 것에 대해 쓸데없는 말 하지 말라" 고 윽박질렀다.

중정 안전조사국(6국)과 경찰은 오랫동안 자체 정보요원과 사설 정보원을 동원하여 장준하의 활동을 집중 감시해왔다. 그의 "개헌운동 계획을 사전에 탐지해 와해, 봉쇄함으로써 조직 확장을 방지" 하고 "공작 필요시 보고 후 실시한다" 는 내용이 담긴 중정의 문건이 나왔다.

의문사위원회는 여러가지 정황에서 "중정요원의 사건조사 개입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중정의 장준하 사찰기록은 변고 당일치만 공백으로 남아 있다. '공백' 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고 당일 오후 3~4시 사이에 장준하의 상봉동 자택에 사고를 알리는 익명의 전화가 걸려왔다. 산행 일행 중에는 같은 시간에 하산한 사람이 없어서, 괴전화의 정체가 의문이다. 사건 뒤 10시간 동안 사라졌던 김용환은 자신의 통화 시실을 부인했다.
  
 장준하 선생이 의문의 추락사를 당한 경기도 포천 이동면의 운악산 약사봉 전경
 장준하 선생이 의문의 추락사를 당한 경기도 포천 이동면의 운악산 약사봉 전경
ⓒ 장준하기념사업회

관련사진보기

필자는 사건 후 7차례 정도 약사봉 현지를 찾았다. 야당의 조사단에 참여하여 김용환 씨를 증인으로 '모시고' 장준하와 함께 정상을 거쳐 하산했다는 코스를 답사했다.

그는 '목격자' 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산행 코스를 전혀 몰랐고 암벽에서 '추락' 과정의 목격담도 오락가락했다. 사고 뒤 왜 고인의 시계를 차고 있었느냐고 묻자 "누가 훔쳐갈까" 우려되어 사체에서 시계를 풀었다고 말했다. 존경하는 분의 변고를 목격하고, 그 경황에 시계를 풀어 자기가 차고 있었다는 것이 상식적일까, 의문이 따른다.

일본군 장교 출신 대통령의 권력체제에서 광복군 장교 출신 '재야 대통령' 의 의문의 죽음은 한국현대사의 가장 부끄러운 대목의 하나로 꼽힌다. 독립운동의 상징 백범 김구가 친일ㆍ분단ㆍ외세의 종합세트인 이승만 정권의 하수인에게 암살당한 사건과 함께 민족모순, 역사모순의 상징이다. 민족과 반민족, 독립과 식민, 자주와 사대, 민주와 독재의 대결에서 김구와 장준하는 패자가 되었다. 그리고 암살과 의문사의 배후는 여전히 미궁인 채로 남아 있다.
  
약사 계곡을 찾은 장호권 선생과 집행위 약사 계곡을 찾아 추모하고 있는 장준하100년위원회 회원들
▲ 약사 계곡을 찾은 장호권 선생과 집행위 약사 계곡을 찾아 추모하고 있는 장준하100년위원회 회원들
ⓒ 장준하100년위원회

관련사진보기

진실은 냉혹하다. 99%의 의혹에도 전혀 다른 1%의 가능성은 존재한다.

장준하 의문사의 진실은 여전히 역사의 장막에 덮혀 있다. '혐의'를 받는 측이 억울하다면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라도 진실 밝히기에 주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사건에 관여했던 정보기관원들이나 관련자들이 뒤늦게나마 역사 앞에 사죄하는 모습을 보고싶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첨부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