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소식

제목 가엾은 핵의 아이, 모든 이들의 희망이 된다
작성일자 2018-08-16

가엾은 핵의 아이, 모든 이들의 희망이 되다

원폭피해자및원폭2세환우문제해결을위한공동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은옥님이 오마이뉴스에 올린 글을 소개합니다. 전은옥님은 김형률추모사업회와 평화시민연대에서도 활동 중이며, 고 김형률님을 비롯한 원폭환우2세 그리고 1세대 한국 원폭피해자의 삶과 마주치게 되면서 평화와 인권, 생명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전은옥님은 원폭문제관련 연대사업을 위해 평화박물관에서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 평화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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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엾은 핵의 아이, 모든 이들의 희망이 되다

한국 원폭 2세 환우 고 김형률 3주기, 평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출간

 

전은옥



"한국 원폭2세 환우들은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잔혹한 침략 전쟁의 희생자들이며 전쟁이 끝난 후에 태어난 해방 후 세대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원폭2세 환우가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몸은 21세기를 살고 있지만 (…) 20세기 일본 제국주의가 저질렀던 침략 전쟁과 식민지 수탈 정책이라는 광기의 역사가 지금 이 시간까지도 연장되어 우리들의 몸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 원폭의 후유증으로 평생동안 병마와 싸워야 했던 고 김형률씨.
그에게 있어 '환우'라는 이름은, 자신의 병이 우연적 질환이 아니라
원폭의 피해 때문임을 밝히는 역사적인 명칭이었다. ⓒ 휴머니스트





자신의 아픈 몸을 역사의 한가운데 세워 인권운동의 최전선에 섰던 사람이 있다. 그 자신은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외쳤지만 '자신의 삶을 계속되게 할 것인가, 나머지 아픈 이들의 삶을 계속되게 할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결국 후자를 선택'한 사람이 있었다.



163cm, 36kg의 여린 몸으로 한국 원폭2세환우의 인권을 위해 고투하다가 짧은 생애를 마감한 고 김형률의 3주기를 맞아, 그의 삶이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됐다. 책의 제목인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부제: 원폭2세환우 김형률 평전, 전진성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는 고인이 생전에 늘 외쳤던 말이다.



지인들에게 보내는 이메일의 끝자리에도, 자신이 운영했던 '한국원폭2세환우회' 인터넷 카페의 메인 화면에도, 모든 글귀의 언저리에도 항상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그의 간절한 소망이 빠짐없이 쓰여 있었다. 그는 만으로 스물 다섯 해를 살다가 피를 토하며 죽어갔지만, 그가 남겨 놓은 것은 결코 적지 않다.



그는 자신의 병든 몸을 통해, 그 형언할 수 없는 처절한 고통을 통해 "일본제국주의가 저질렀던 침략전쟁과 식민지 수탈정책이라는 광기의 역사"를 증언했다. 그리고 역사와 정치라는 거대담론에 가려 가장 소중한 것, 즉 생명의 가치를 잊고 있던 한국 시민사회에도 한 줄기 빛을 전해 주었다.



유전자를 통해 2세, 3세의 몸으로 재생되는 원폭의 고통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미국의 원자폭탄이 투하됐을 당시, 전체 피폭자 70만 명 중 한국인 피폭자는 7만 명에 달했다. 전체 피폭자의 10%에 해당하는 비율이다. 이들 희생자는 대부분은 경남 합천이나 경기도 평택에서 건너간 사람들로, 일제 수탈에 따른 경제적 곤궁과 전시 강제부역으로 어쩔 수 없이 원폭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생존자의 대부분은 귀향했으나 고국으로부터 아무런 의료적, 경제적, 정신적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을 질병과 가난의 대물림 속에서 살아왔다. 일제의 피폭자들이 피폭자 원호법에 의해 치료비 생활비를 비롯한 각종 사회복지의 혜택을 누린 데 반해, 한국 원폭피해자들에게는 일본 정부도 한국 정부도 무책임과 무관심으로 일관해 왔다.



이제는 그 피해자들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사람들은 원폭 피해의 문제가 이제는 과거의 역사가 됐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은 원폭피해의 문제는 결코 과거가 아니라 생생하게 현존하는 오늘의 산 역사이며 미래의 역사라고 말한다. 원폭 피해자의 고통은 한 세대에서 끝나지 않고 유전자를 통해 대물림되어 2세, 3세의 몸으로 고스란히 재생되고 있는 것이다. 그 역사의 얽힌 교차로에 바로 김형률이 있었다.



1970년에 태어난 김형률은 원자폭탄에 피폭당한 경험이 전혀 없으면서도 1945년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에 의해 삶이 규정돼 버렸다. 저자인 전진성 부산교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원폭 2세 환우로 태어났다는 것. 그것은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이 전혀 경험한 적이 없는 과거에 의해 전 생애가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거는 전혀 기억될 수 없으면서도 너무도 생생한 흔적을 남겼다. 환우의 몸은 아직도 과거를 산다. 제대로 현재를 영위할 수가 없다."



그리고 한국원폭피해자들의 불행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일제 과거가 낳은 '필연의 역사'임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김형률은 태어나면서부터 기관지가 좋지 않아 늘 감기와 폐렴을 달고 살았다. 그와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난 동생도 태어난 지 1년 6개월 만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초등학교 6년 동안은 학기 마다 한 달 이상씩 결석을 할 정도로 몸이 자주 아팠다. 중학교 1학년 때는 동생을 앗아간 폐렴으로 그도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25세가 된 1995년에도 한 해 동안 세 차례나 폐렴으로 입원했는데, 정확한 병인을 알아보기 위해 특수 피검사를 했다. 그의 병명은 '선천성 면역글로불린 결핍증'이라는 희귀병이었다. 당시 주치의는 어머니가 원폭피해자인 것과 이 병의 관련성을 암시했으나 그 이상 책임질 만한 언급은 회피했다고 한다. 김형률은 그제서야 자신이 왜 그토록 아파야 했는지, 왜 평생을 병마에 발목 잡혀 인간된 권리도 누리지 못하며 살아야 했는지를 알게 됐다.



"가엾은 핵의 아이, 모든 이들의 희망이 되다"



▲ 사진작가 윤정은씨가 촬영한 고 김형률씨 모습. ⓒ 윤정은



이후 김형률은 건강 때문에 제대로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한 것을 만회하기 위하여 야학에서 학업에 정진했고,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그리고 대학에서 전산을 전공한다. 자신의 병치레 때문에 늘 고생만 하는 부모님과 형제에 대한 미안함을 갖고 있던 김형률은 졸업 후 취직이 잘되고 재택근무를 할 수도 있다는 주변의 권유에 의해 전산학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이때도 죽음의 그림자는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끈질기게 따라 붙으며 병마로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의지가 강했던 김형률은 자기 힘으로 당당하게 삶을 가꾸어 나가겠다는 결연한 각오로 졸업 후 누구보다 열심히 직장 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웹디자인 계통에서 일하면서 야근과 격무에 시달리던 그는 여러 차례 병으로 쓰러졌다. 2001년 5월 급성폐렴의 재발로 병원 응급실로 옮겨진 그의 마음 속에는 그간 애써 억눌러 왔던 울분이 활화산처럼 터져 나온다. 당시 김형률의 상태에 대해서 저자는 이렇게 기술한다.



"그는 이때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모든 것이 사라지자 비로소 자신의 존재가 명징한 실체로서 다가왔다."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참담한 심정의 그는 우연히 진료기록부에서 '면역글로불린 M의 증가가 동반된 면역글로불린결핍증'이라는 제목의 의학논문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병을 연구 주제로 삼은 논문이었다. 환자나 보호자도 모르게 작성된 연구논문에 대해 몹시 화가 났지만, 개인적인 분노를 넘어 김형률은 삶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이제는 어엿한 생활인으로 남들과 똑같이 살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규정 지어 버린 원자폭탄과 유전 문제에 대해 삶을 바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가엾은 핵의 아이는 고통과 소외의 극한 지점에 이르러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그럼으로써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희망을 품게 하는 새로운 길을 열어가게 된다"고 표현했다.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는 현실에서 한국 원폭2세 환우 스스로 자각하고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될 절체절명의 상황이며 우리들의 생명권과 생존권, 건강권은 우리 스스로 지켜내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에 놓여 있습니다."
- 김형률, 2003년 7월26일 부산심포지엄 발표문(미발표)




퇴원 후, 김형률은 신문이나 잡지 기사에서부터 관련도서, 영상물, 공문서, 인권단체 회의록, 원폭피해자 주소록, 심지어는 외국의 의학논문에 이르기까지 원폭과 관련된 모든 것을 수집하고 연구했다. 일어나 영어로 된 문서는 일일이 번역까지 부탁해서 읽었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원폭 문제에 관한 한 국내에 형률씨와 견줄만한 전문가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원폭에 의한 유전병을 밝혀내기 위해 증거 자료를 모으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건강은 더욱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그리고 2002년 봄, 그는 아버지와 함께 대구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국내에서 최초로 자신이 원자폭탄 피해를 당한 어머니를 둔 원폭2세로서 33년간 병마와 싸우며 원폭후유증을 앓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다.



방사능과 유전, 과학적 입증 따지기 전에 인권 문제





▲ 2002년 3월 대구 한 시민단체에서 피폭 2세 김형률씨가
첫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그의 길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아버지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도 초기에는 김형률을 이해하지 못했고, 원폭1세들의 질타도 만만치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평생을 원폭피해자로서 사회로부터 당해온 소외와 아픔의 피해의식이 큰 이들에게 원폭의 유전 문제를 공론화한 김형률의 기자회견과 향후 활동이 건강한 2세 자녀들에게까지도 사회적으로 취업과 결혼, 가정생활에 있어 불이익을 미칠까 두려웠던 것이다.



또 김형률은 운동과정에서 원폭의 유전성을 과학적으로 증명해보라는 '부당한' 요구에도 자주 부딪혀야 했다. 이때마다 김형률은 "원폭과 유전 문제는 한 개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시민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그리고 과학적 입증의 필요성을 따지기 전에 원폭문제가 근본적으로 인권의 문제임을 인식할 때, 비로소 그것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길도 열린다고 믿었다.



김형률은 외로웠다. '병고를 통해 깨달은 시대적 소명'으로 인권운동가로 거듭났지만, 그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헌신적인 활동에 불구하고 원폭피해 1세 어른들은 2세 운동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유전' 문제만큼은 쉬쉬하기를 원했고, 이 때문에 김형률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많았다.



또 김형률은 원폭피해자의 다양하고 참혹한 후유증에 대한 고통의 연대와 공감 없이 '원폭투하 몇 주년, 핵무기, 반핵, 평화, 일제피해자, 일본과 미국의 책임' 등 원폭피해자들의 문제를 쉽게 도식화하고 정치적 대상화하는 일부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경계했다. 그에게 있어 원폭 문제는 곧 개개의 생명들이 감수해야 했던 아픔을 공감하고, '인권'적 측면에서 세심하게 접근해야 하는 절박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는 사회적 차별이나 경제적 궁핍 등 여타의 인권문제보다 최우선시 되어야 할 인권은 '생명을 유지할 권리' 즉, 생명권이라 주장했으며, 생명권의 선구적인 운동가가 되었다. 그의 '피와 땀에서 나온' 사상과 실천에 감동을 받은 의사, 변호사, 시민운동가, 노동운동가, 역사학자, 정치인, 기자, 다큐감독에 이르기까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그의 운동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의 노력으로 사회적으로 자기 존재를 드러내기를 극도로 꺼려해 초기 2명에 불과했던 '한국원폭2세환우회'는 그가 죽기 직전까지 61명으로 늘어났다. 또 인권위가 정식으로 '원폭피해2세환우의 현황과 건강상태 조사연구'를 실시하도록 이끌어낸 것도 김형률의 노력 덕분이었다.



이뿐 아니라 그는 인권위와 복지부에 직접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것은 바로 "선지원 후규명"이라는 해법이었다. 날로 악화되는 환우들의 건강은 면밀한 조사와 법적 공방을 기다릴 여유가 없다. 따라서 실태조사에 앞서 먼저 최소한의 생존권인 의료비 지원을 법적으로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일본처럼 국립원폭전문병원을 설립할 필요성도 제기했다.



마지막으로 생애 최후의 단계에서 김형률이 죽음을 불사하며 노력했던 것은 가칭 '한국원자폭탄피해자와 원자폭탄2세환우 등의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의 제정이었다. 그러나 이 법안은 김형률씨 사후인 2005년 8월 당시 민주노동당 조승수 의원 등 79명의 의원의 발의에도 불구하고, 국회 본회의 안건에도 상정되지 못하고 지금까지 표류하고 있다. 인권위에 보냈던 '선지원 후규명'의 정책권고안 역시 인권위와 복지부가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사이, 환우들의 인권은 한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시간만 흐르고 있다. 고인의 빈 자리가 너무도 큰 것이다.



한국원폭2세환우의 고통, 한국사회 전반의 책임과 각성 필요





▲ 2006년 부산대에서 열린 고 김형률씨 1주기 추모식 알림막. 생전에 그가 강조했던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글귀가 쓰여 있다. ⓒ 윤성효



김형률은 생전에 일반 시민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원폭관련 단행본이 출간되어,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원폭피해자에 대한 높은 인식을 갖게 되기를 바랐다. 그러면 한국원폭피해자들의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살아있을 때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지원하는 모임'에 참여하며 그를 가까이서 지켜봐온 저자 전진성 교수는 이 책이 그런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한국원폭2세환우의 고통스런 현실을 사회에 알림으로써 이들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는 데 미력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염원"한다고 평전 집필의 취지를 밝혔다. 이와 함께 "원폭2세환우들의 고통을 공론화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이들만의 고독한 투쟁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의 각성과 노력이 요구된다"며 이 과정이 어쩌면 진정한 시민사회적 윤리를 확립하는 일대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책을 출간한 출판사 휴머니스트는 불꽃보다 더 뜨겁고 아프고 진실했던 김형률의 삶에서 1970년 자기 몸을 불살라 시대를 일깨운 전태일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했다고 했다. 출판사 측은<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원폭2세환우 김형률 평전>이 2008년 새 시대를 일깨울 책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온몸 던져 역사를 증언하고, 인권(특히 생명권) 운동의 새로운 방향과 원칙을 제시한 고 김형률. 고통의 극한에서 자기를 밀어 올려 진정한 인권운동가와 평화운동가로 거듭났던 그의 삶은 원폭2세환우뿐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규범이 될 수도 있으리라.



/ 2008.05.20 13:04 ⓒ 2008 Ohmy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