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소식

제목 원폭 60년 히로시마 평화기행
작성일자 2018-08-16

원폭 60년 히로시마 평화기행

원폭 60년 히로시마 평화기행

맨발의 겐 독후감대회 수상자들과 함께 히로시마 평화기행을 다녀왔습니다. 수상자들 외에도 김중미 선생님, 류동훈 선생님, 김은아 선생님, 김대호 님, 효도 케이지님이 함께 다녀오셨고 일본 히로시마 평화교육연구소의 이승훈 선생님께서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성공회대학교의 김영호 학생이 쓴 기행문을 통해 여러분들도 히로시마 평화기행에 함께 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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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히로시마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김영호







2005년 8월 11일 목. 히로시마에 오다



난생 처음 타는 비행기에 귀에선 난리가 났다. 누가 강제로 귀마개를 깊숙이 눌러 논 것 같다. 바깥 경치라도 보면 좀 나을 것 같은데, 이건 완벽하게 중간자리다. 생전 안 하던 멀미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마음에 심호흡을 해본다.



내가 이렇게 비행기에 앉아 있는 이유는 학교 수업에 제출했던 리포트가 평화박물관이 주최한 [맨발의 겐] 독후감 대회에 운 좋게 뽑혀 해외여행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평소 무척이나 가고 싶었던 일본여행인지라 많이 설레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JAL기로 1시간 반가량 날아왔을까? 히로시마공항이 보이기 시작했다. 공항에 착륙할 때 비행기 내부에 있는 대형 스크린으로 직접 착륙하는 모습을 보여줘, 내가 마치 기장이 된 양 실감났다.



까다로운 입국심사를 마치고 - 때문에 애초 계획했던 시간보다 많이 지체되었다 -히로시마 공항을 나서자 3박 4일 동안 가이드 및 통역을 해주실 효도 케이지 씨를 만났다. 현재 한국에서 유학을 하고 계신다는 효도 케이지 씨는 한국어도 상당히 잘 하셨다. 문제는 효도 씨 역시 히로시마가 처음이라는 사실. 나만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에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끼며 우린 숙소로 향했다.



공항버스를 타고 오면서 일본에 대해 느낀 것 중 하나는 이곳이 정말 일본인지 한국인지 분간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게 틀린 말이 아니었다. 시내로 들어설 때 보이는 간판이름만 한국어로 바꾸면 여기가 히로시마가 아니라 한국이라고 우겨도 의심하지 못할 정도였다. 단지 다른 게 있다면 모든 게 작다는 사실이었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작고 아담한 차들, 귀여운 신호등들은 깨끗한 거리와 어우러져 한층 그 크기가 작게 들어왔다. 때문에 숙소에 도착하고 배정된 방에 있는 TV에서 ‘미니어처’ 만드는 프로가 나온다는 말을 들었을 땐, ‘역시’라는 생각을 했다.

‘스바라시(すばらしい-대단해요-)~~’



첫날은 까다로운 입국심사덕분에 계획했던 일정을 일부 수정해야 했다. 숙소에 짐정리를 마치고나자 시간이 많이 늦어서 히로시마 시내구경을 먼저 하기로 했다.



히로시마는 인구 112만 60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 도시로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 히로시마만(灣)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고, 주고쿠[中國:돗토리[鳥取]·시마네[島根]·오카야마[岡山]·야마구치[山口]·히로시마의 각 현(縣)을 포함한 지역]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라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히로시마가 유명한 것은 세계최초로 원자폭탄이 투여된 도시라는 점이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원폭 투하로 초토화된 히로시마는 이후 국제적인 평화도시로서 다시 주고쿠 지역을 대표하는 도시로 자리매김했다고 한다.



우리가 둘러본 지역은 히로시마 역을 출발점으로 해 혼도리(本通り), 신텐지(新天地), 나가레가와(流川)였다. 이 중 나가레가와는 공항에서 뽑아든 가이드에 의하면 전국에서 손꼽히는 유흥가라고 소개되어 있었는데, 둘러본 소감은 우리나라 명동만 못 하다란 느낌이었다. 오히려 혼도리를 꽤 오랜 시간동안 구경했는데, 혼도리는 가미야초(紙屋町)에서 핫초보리(八丁堀)를 연결하는 약 500미터의 거리로, 오래된 점포를 비롯해 최첨단의 부티크와 시계점, 일용 잡화점 다양한 상품을 갖추고 있다고 소개되어 있었다. 혼도리 역시 우리가 둘러본 시간이 너무 늦은 탓이었는지 대부분의 상점은 불이 꺼져 있었다. 일본은 우리나라처럼 24시간 영업하는 곳이 거의 없고 오후 8시면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는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다.



혼도리에서 우리 일행이 가장 많이 머무른 곳은 역시 서점이었다. 김중미 선생님이 이렇 게 넓은데 서점 하나 없다고 하자, 효도 케이지 씨가 열심히 물색해 발견한 서점에 우리 모두는 오아시스를 찾은 것처럼 잽싸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 서점에서 우린 우리를 일본에 오게 한 [맨발의 겐] 애장판 (총 3권짜리)을 발견할 수 있었다. 원폭의 도시답게 [맨발의 겐]은 서점입구 베스트셀러 진열장 옆 코너 한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이리저리 들쳐보던 중 정말 히로시마 사람들도 이 만화를 잘 보고, 알고 있을까하는 마음이 들었다. 단순히 원폭이란 것을 하나의 상품화하고 있을 뿐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책들 속에서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맨발의 겐]이 자랑스러운 기분과 함께 왠지 힘겨워보였기 때문이다. 단순히 히로시마의 한 상품으로서 진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서점 3층은 역시 망가(まんが)의 나라답게 전부 만화책으로 진열되어 있었다. 비록 일본어를 잘 몰라 그림만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지만, 만화의 천국이란 명성을 다시금 체험할 수 있었다.



혼도리를 걸어 나와 핫초보리 역에서 노면전차를 타고 히로시마 역에 도착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노면전차가 조만간 들어선다고 하는데, 괜찮을 것 같다. 버스보다 편리하고 지하철보다 재밌었다. 무엇보다 노인 분들이 이용하시기 편할 것 같았다.



숙소로 돌아온 우리 모두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순전히 수박 겉핥기 식 시내관광이 분명했지만, 나는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 일본이 한층 우리나라와 가깝게 느껴지는 느낌이었다. 이제 왜 먼 나라인지는 내일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고 시내관광을 마쳤다.



2005년 8월 12일 금. 히로시마 평화기행
원폭 투하 된 이후 8월에 흐린 날 없어




집 나가면 고생이라고 했다. 일단 자는 것, 입는 것, 먹는 것이 고생이다. 히로시마에 온 이후로 내겐, 다른 건 제쳐두더라도 먹는 게 고민이었다. 일행 중 가장 많이 먹는 연령 대(?)인 나는 무엇보다 일본식 아침식사가 고역이었다. 원래부터 소식인 일본음식은 아침이면 절정에 이른다. 단무지 두 쪽에, 김 3개, 계란말이 2조각. 멸치 볶은 거 조금. 정말이지 집이 그리워지는 식단이었다. 할 수 없이 밥을 2공기씩 먹으며 모자란 것을 보충해야 했다.



힘든 아침식사를 마치고 간편한 차림으로 숙소를 나왔다. 오늘 처음 갈 곳은 이제는 히로시마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원폭 돔과 평화 기념박물관.



어제 타 봐선지 어느새 익숙해진 노면전차를 타고 겐바쿠돔 마에(원폭 돔 앞)역에서 내려 원폭 돔을 향했다. 무수히 많은 종이학 더미로 뒤덮인 비석 위로 뼈대만 앙상히 남아 공포영화에 나오는 세트를 연상시키는 원폭 돔이 보였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리틀 보이’로 명명된 원자폭탄이 히로시마 도심 상공 800m에서 폭발했다. 당시 히로시마에 거주하던 24만 명 중 14만 명이 한순간에 사망했고, 건물 9천 채 중 6만 2천여 채가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이중 원폭 돔은 폭심지로부터 160m떨어져 있었는데 핵폭풍이 거의 수직으로 불어와 기적적으로 붕괴하지 않고 보전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철골구조물은 처참했던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증거물이자 평화를 갈망하는 이들의 상징물로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다고 한다.





원폭돔





원폭 돔은 히로시마에 오기 전 인터넷으로 봐서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인터넷에선 당시의 참상을 알려주는 잔해로서 보존하고 있다고 했지만, 60년이 지난 지금 내 눈에는 그 저 단순한 폐건물일 뿐이었다. 더군다나 당시 모습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이미 두 차례에 걸쳐 보수공사를 했기에(67년과 89년) 당시의 감정을 전달받기 어려웠다. 하지만 무엇보 다 피폭의 참상을 체감할 수 없었던 것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카메라의 셔터 소리 때문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원폭 돔에 온 거의 대부분의 이들은 마음으로 건물을 대하지 않고 그저 손에 들려 있는 사진기 속에 원폭 돔을 담으려 애쓰는 광경이었다. 나조차도 비석에 써 있는 내용엔 관심이 없고, 원폭 돔을 그저 사진 찍기 좋은 하나의 피사체로서만 인식하고 있을 뿐이었다. 60년이란 세월은 인류역사상 가장 처참했던 광경의 잔해조차 하나의 관광물로만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란 생각에,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와중에도 씁쓸한 생각이 들곤 했다.



원폭 돔을 지나 본격적으로 평화기념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박물관으로 가기 위해 다리를 건너는데 다리 이곳저곳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뭔가 열심히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도 예외 없이 붙들렸는데 효도 씨가 통역해주시는 말로는 핵무기 반대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는 분들이라고 했다. 옳다구나 하는 마음에 우리 일행은 썩썩 서명을 마쳤다. 비록 기부금은 내지 않았지만 우리 모두의 이름들이 모여서 핵무기를 폐지시킬 수 있기를 바랐다.



다리를 건너자 찌는 듯한 더위에 눈앞이 아른아른 거려서 뭔가 싶어 봤더니 웬 등이 타오르고 있었다. 김대훈 선생님 말씀으론 전 세계의 핵무기가 없어지길 기원하면서 지구상에 모든 핵무기가 사라지는 날 꺼지는 등불이라고 하셨다. 평화의 등불이라나?



현재 지구상의 핵무기는, 올해 북한의 핵무기 보유선언 이후로 조사된 결과를 살펴보면 약 3만개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수치는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일 뿐 실제 보유수는 더 많을 것이라고 한다. 더군다나 근래 들어 일본도 핵무기를 보유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한쪽에선 핵무기의 폐지를 염원하는 등불을 밝혀놓고 다른 한편으론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일본의 이중성을 말하시는 김대훈 선생님 뒤로, 평화의 등불이 안쓰럽게 타고 있었다.













원폭 어린이상



평화의 등불을 뒤로 하고 공원 안을 둘러보자 원폭 어린이 상이 보였는데, 이 조형물에는 사연이 있다고 한다.



2살 때 피폭을 당한 사다코라는 여자아이가 10년 후 방사선 노출 후유증으로 백혈병에 걸리게 되었다. 이 소녀는 병이 낫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종이학을 접기 시작했는데 천 마리의 학을 완성하기 전 숨을 거둔다. 이에 같은 반 친구들이 사다코가 미처 접지 못한 356마리의 종이학을 접어 사다코와 함께 묻어주었다. 이 동상도 사다코의 친구들이 전국적으로 벌인 모금운동으로 세운 것이고, 이를 기리기 위해 해마다 8월 6일이면 일본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보내온 종이학 꾸러미로 동상을 장식하고 있다고 한다.



일부 소수의 잘못된 선택과 아집은 이렇듯 아무 죄 없는 어린 소녀의 목숨을 앗아갔다. 원폭은 건강했던 사다코가 죽는 것을 남겨주었다는, 사다코의 반 친구의 편지에서처럼 전쟁과 원폭은 파멸과 고통만을 가져올 따름이었다. 원폭 어린이 상을 둘러쌓고 있는 수많은 종이학더미들에 담긴 아이들의 간절한 염원이 부디 어른들에게도 이어지길 바란다.





조선인 원폭피해자 위령비



원폭 어린이 상 다음으로 찾은 것은 바로 한국인원폭희생자 위령비였다. 원폭은 일본인에게만 국한된 기억이 아니다. 당시 히로시마에 강제 징용을 비롯해 끌려오다시피 한 한국인 은 4만 명이었고 이중 원폭에 희생된 이는 히로시마 일본인 희생자의 1할에 해당하는 2만여 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자국민만이 유일한 피폭자라며 외국인 피폭을 인 정하지 않았다. 1970년, 평화공원 밖 다리 밑에 세워진 이 위령비 또한 일본인들의 홀대 속에 지금의 자리에 옮겨지기까지 무려 20여년이 걸렸다고 한다. 다리에서 현재 위치까지는 불과 200m. 대외적으로 평화를 외치고 있는 히로시마와 이 평화공원이 진정으로 평화를 염원하고 있는 것인지 새삼 의문이 들었다. 자신들이 초래한 일의 원인은 망각한 채, 자신들만이 피해자라고 소리 높이는 것이 진정 평화를 위한 길인지 다시금 생각하길 바라면서 위령비 앞에 잠시 동안 묵념을 했다.



‘비옵건대 2만여 위의 혼령께서는 모든 원한과 증오를 다 잊으시고 길이 평안히 쉬시옵소서. 앞으로는 이러한 비극의 씨를 뿌리는 자도 이를 받는 자도 없게 하시고, 침략의 최를 범하는 자도 침략의 슬픔을 받는 자도 없게 하시어, 먼 나라와 가까운 이웃이 길이길이 서로 도우며 화목하게 살 수 있도록 보살펴주옵소서.’ 위령비 비문에 적힌 글이다.



묵념을 하고 돌아서서 평화박물관으로 가는 걸음을 빨리 했다. 오후에 피폭경험자이신 분과 만남이 있기 때문에 일정이 빡빡했다. 안 그래도 더운 날씨인데 잰걸음으로 이동하느라 얼굴, 목 할 것 없이 땀이 흘러내렸다. 다행히 나는 주말에 하는 아르바이트가 하루 종일 땡볕에서 하는 일이라 어느 정도 견딜 만 했지만, 일행 중 나이가 제일 어린 예인이는 많이 힘들어 보였다. 하긴 아직 초등학생이니까. 그런데 요새 애들은 뭘 먹어서 저리 큰지. 아직 초등학생인데 거의 내 키 수준이다. 내가 작은 건지.



안쓰러워 도와주고 싶었지만 같이 오신 선생님도 있고 어제와는 달리 한결이랑 죽이 그새 맞았는지 아주 친자매처럼 붙어 있기에 괜히 끼기도 뭐해서 그냥 놔두었다. 이 둘은 여행 막바지에는 거의 친언니, 동생이 되어 버렸다.



평화박물관으로 들어서기 전 원폭 사몰자 위령비가 보였다. 뭐 자국민을 달래는 위령비니까 이런 좋은 자리에 있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 옆에 우리 한국인원폭희생자 위령비가 있었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을 했다. 원폭으로 희생된 이들마저 차별하는 위령비가 진정으로 평화를 위한 것일 수 있는지 의문이다. 이 위령비 아래에는 원폭으로 희생된 이들의 명부가 들어있는 석함과 비석이 있는데, 약 14만 명의 희생자 명단이 적혀있고, 지금도 계속 새로운 이름이 적히고 있다고 한다. 그 이름들 중에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의 이름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가이드 책자에는 비문에 이런 내용이 쓰여 있다고 했다.



‘편히 잠드소서. 잘못은 되풀이하지 않겠습니다.’



일본인들은 정말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는 걸까? 왜 나에겐 그 잘못이란 글자가, 당시 일본이 약해서 원자폭탄을 못 막았다. 이제는 더욱 강해져서 이런 치욕을 받지 않도록 하겠다는 뜻으로 전달되는지 모르겠다. 얼마 전 히로시마 평화의 날 행사 며칠 전에 이 비문에 새겨진 ’잘못‘이란 글자를 훼손한 일본인이 붙잡혔는데, 그 일본인이 말하길 일본인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잘못이라고 적혀 있어 망가트렸다라고 했다고 한다. 아직 일본인 중 일부는 잘못이란 단어의 뜻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검은 비





히로시마 평화 기념박물관은 1955년에 설립되었으며, 피폭 당시 자료를 3만 여점 전시하고 있다. 서관과 동관으로 나누어져 있고 동관은 3층 구조로 되어 있다. 서관에는 피폭 당시 사람들의 유품과 피폭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동관 1층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전후의 과정을 영상과 모형 등을 통해 체험할 수 있고, 2~3층은 피폭 후 히로시마의 모습과 현재 핵 상황에 대해 보여주고 있었다.



외국인을 위한 음성 해설기를 들고 일행과 떨어져 하나씩 둘러보기 시작했다. 피폭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던 서관은 피폭당시의 처참함을 최대한 드러내고 있었다. 검게 타버린 도시락, 열 폭풍에 비틀어져버린 철문, 걸레조각처럼 변해버린 옷가지. 그중 내 시선을 끈 것은 흰 벽에 남은 검은 비의 흔적이었다. 피폭 후 20 ~ 30분부터 히로시마 북서부지역에 내리기 시작했다는 이 비는 핵분열 당시 생긴 다량의 방사능을 함유하고 있었다. [맨발의 겐]에서 피폭 후 뛰어다니던 겐의 머리 위로 내리던 바로 그 검은 비였다. 나중에 겐의 머리를 뭉텅 빠지게 한 오염된 비. 당시 타는 듯한 열기에 심한 갈증을 느낀 대다수의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이 비를 맞았고, 이후 심한 방사능 후유증으로 시달렸다고 한다. 겐은 그나마 머리만 빠지고 말았지만, 이 비를 맞고 죽은 사람도 상당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맞는 비 또한 예전의 깨끗한 비가 아니듯이 원폭은 자연현상마저 바꿔버렸다.



<참고로 한국에 돌아와서 수질관리를 전공하는 친구에게 들은 얘기로, 현재 한국에 내리는 비도 처음 5분간 내리는 비의 산성농도는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산성비라고 한다.>



동관은 일단 원폭 돔을 축소해 놓은 모형이 시선을 끌었다. 계속되는 음성 해설기의 해설을 들으며 둘러보던 중 인상적인 것은 모형으로 보여주는 피폭 전과 피폭 후의 히로시마 거리 모습이었다. 빼곡히 차 있던 건물 모형이 피폭 후에는 그야말로 초토화되다시피 했다. 그야말로 원폭의 위력을 한 눈에 보여주는 전시물이었다. 피폭 후의 히로시마는 그야말로 검게 그을린 허허벌판이었다. 동관 2층과 3층은 원폭 투하 후에도 아직 핵무기가 늘어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하고 있었다. 3층에서는 우리가 읽은 [맨발의 겐]을 애니메이션화한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길고 긴 평화 기념박물관 견학을 마치고 나오자 화창한 햇살 아래로 잘 조성된 평화공원이 한 눈에 보였다. 군데군데 방명록을 적는 외국인과 일본인들이 있었다. 햇살이 너무 좋았던 탓인지 원채 게으른 탓인지 방명록을 뒤로 하고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한 순간 숨이 턱하고 막혔다. 시원한 안에서 보던 것과 달리 강한 햇살과 더위에 열기가 한순간에 덮친 까닭이다. 순간 당시 피폭의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느꼈을 감정이 생각났다. 그 때 그 사람들은 이런 것의 몇 백 배되는 열기를 경험하고 고통스러워 했겠구나싶었다.



히로시마에 오기 며칠 전, 설레며 살펴봤던 인터넷 기사 중에서 이런 글이 있었다.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떨어진 날 이후, 매년 8월의 히로시마는 흐린 날이 없이 언제나 강한 햇살과 무더운 날이 계속된다고 한다. 피폭 당시에도 더운 여름이었던 그 날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열기를 잊지 않으려 하려는 듯이 말이다.



무더운 8월의 여름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마치 태양을 옮겨놓은 것 마냥 히로시마의 온갖 것들을 불태우고 휩쓸었다. 무수히 많은 이들이 숨 막힐 듯한 열기에 죽거나 고통스러워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참혹한 광경이 벌어진 8월 6일 이후, 지금의 히로시마와 일본은 평화를 외치고 있다. 하지만, 평화 기념공원에 들어선 이후로 본 여러 전시물들에서 느낀 감정은 히로시마가 결코 진실한 평화의 모습을 추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히로시마가 오로지 원폭의 피해자라는 시각은, 잘못은 뉘우치지 않고 혼난 것만 억울해하는 철부지 어린아이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아침부터 공원이다 박물관이다 하도 돌아다녔더니, 안 그래도 부실하게 먹은 아침 탓에 배가 무지 고팠다. 박물관을 나서자 우리 일행이 이구동성으로 외친 말은 “밥 먹고 갑시다.”



들어왔던 다리를 되 건너 혼도리로 접어섰다. 점심은 우동!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 들어간 가게에는 사람들이 한산히 앉아있었다. 효도 씨의 도움으로 각자 취향대로 우동을 골아든 일행은 곧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난 국물 있는 걸 원했는데, 이건 뭐, 시원한 거라 국물이 없다나? 이런, 우동은 국물 맛 아닌가? 그러나 이미 주문해서 젓가락이 들어갔는데 물러달랄 수도 없고. 우걱우걱 입으로 밀어 넣는 수밖에. 다행히 같이 먹으려고 고른 튀김이 맛있었다. 휴, 그래도 아침식사보단 낫지.



우동을 먹고 우리가 간 곳은 히로시마 성과 축경원(슉케이엔)



1591년에 지어졌다는 히로시마 성은 일명 잉어성(라죠)이라고도 부른다. 잉어성인 이유는 성 전체 색이 검기 때문. 16세기 무장 모우리 데루모토에 의해 축조되었으며 이후 히로시마는 성곽도시로 발전한다. 지금 남아있는 건 1958년에 재건된 천수각으로, 대부분은 원폭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내 딴에는 히로시마 성이라고해서 사진도 찍고 포즈도 취하고 했는데 한국에 돌아와서 사진을 본 친구가 하는 말.



“너 경주 불국사 갔다 왔냐?



축경원은 1620년 히로시마의 지방영주인 아사노가 축조한 일본식 작은 정원이다. 중국 절강성의 서호를 모델로 여러 개의 경승지를 한 곳에 축소하여 모아두었다는 뜻을 지닌 회유식 정원이라고 소개되어있다.



첫날 TV에서 틀어줬다는 프로처럼 역시 미니어처의 왕국, 일본다운 정원이라고 생각했다. 아기자기하게 늘여놓은 풍경이 참 아름다웠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던 중 자갈로 해변처럼 만들어 논 곳에 들어섰는데, 자란지 거북인지가 모여 있기에 잽싸게 사진을 찍었다. 한국에 와서 자랑스레 사진을 보여줬는데, 예의 그 친구가 하는 말.



“여기 가평 아니야?”



히로시마 성과 축경원을 둘러보고 나자 어느덧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원래는 숙소까지 걸어갈 예정이었지만, 일행 모두가 지쳐있어 택시 두 대에 나눠 타고 돌아왔다. 하긴 아침에 노면전차를 탄 것을 제외하면 하루 종일 걸어 다녔으니 지칠 만도 했다. 더군다나 일본에 오기 전 살펴본, 소나기와 천둥번개를 동반한다는 일기예보가 무색할 정도로 무더운 날씨 또한 우리를 지치게 하는데 한 몫 했다.



숙소에 들려 간단히 정리를 하고 휴식도 취하고 나서 간 곳은 히로시마의 명물 오코노미야키 전문점이었다. 오코노미야키란 우리나라 부침개 같은 요리인데, 히로시마에서는 독특한소스로 인해 전국적으로 인기 있는 음식이라고 한다.






히로시마의 명물 오코노미야키




우리가 찾아간 식당은 동네 분식점 같은 규모였는데 주문을 하면 즉석에서 철판에 구워 내놓는 집이었다. 오코노미야키에 들어가는 재료는 양배추, 고기, 각종 해물 등인데 여기에 파 래김이나 가다랭이포를 뿌린다고 한다. 우리는 일반 오코노미야키와 새우 오코노미야키를 시켜서 먹었는데 무척 맛있었다. 일행이 8명이었는데 시킨 요리는 모두 7개. 적을 줄 알았는데 양이 푸짐했다. 나 혼자 거의 3접시가량을 먹었다. 처음에는 무척 맛있었는데 소스 탓인지 나중에는 약간 느끼하기도 했다. 그래도 맛도 맛있고 양도 푸짐해서 좋았다.



재일한국인 강문희 선생님과 함께



일본에 와서 오랜만에 포식을 하고 나서 우리는 이번 여행의 중요한 프로그램인 피폭자강연을 듣기 위해 숙소 뒤편에 있는 히로시마평화교육연구소로 향했다.






  강문희 선생님






일본인 중 1/3은 한국인



너무 더워 세수를 하고 일행 중 마지막으로 평화교육연구소 내 회의실 문을 들어서자, 양복을 차려 입으신 강문희 선생님과 마주보고 앉게 되었다.



강문희 선생님은 민단에서 30년간 근무하신 분으로 히로시마 피폭 당시 직접 원자폭탄을 경험하신 피폭자셨다. 하루 종일 걸은 데다 방금 저녁을 먹은 뒤라 졸음기가 약간 있었지만, 어느새 선생님의 말씀에 빠져들었다.



태평양전쟁이던 일본은 부족한 노동력과 군사력을 채우기 위해 한국인들을 집단으로 이주시켰는데, 히로시마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히로시마 미쯔비시 회사에서 고용된 한국인은 2천 3백여 명. 이 중 강문희 선생님 또한 포함되어 계셨다고 했다.



“말이 고용이었지 실제적으로 한 일은 중노동이었습니다. 원폭 투하 당시 일본 내 한국인은 약 350만 명이 있었습니다. 이 중 히로시마에 8만 3천 명이 있었습니다. 피폭 당시 히로시마에는 6만 명이 살고 있었지요.”



벌써 60년이나 지났음에도 강문희 선생님은 숫자 하나까지 세세하게 알고 계셨다.



“피폭 당시에는 공습경보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피해가 더 컸지요. 피폭 며칠 전에 하늘에 비행기만 왔다 갔다 했지 폭탄은 떨어뜨리지 진 않았거든요. 그래서 정작 원자폭탄을 떨어뜨릴 때도 안이하게 생각했었지요.”



피폭 후 당시 일본 언론 피해 축소 보도



원자폭탄이 떨어진 후에도 일본 수뇌부는 전쟁을 그만 둘 생각이 없었다. 히로시마가 아비규환으로 변해가고 있을 때, 일본 매스컴은 히로시마에 단지 신형폭탄이 떨어졌을 뿐이라고만 발표했다. 강문희 선생님은 그 때 바로 항복을 선언했다면 나가사키 사례는 없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 하셨다.



“피폭 전에는 히로시마의 일곱 개 강에서 물고기가 살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물고기가 노니는 곳이 하나도 없어요. 60년이나 지났는데 말이죠.”



언론이 국민의 편에 서지 않고 알권리를 막아서며 권력의 스피커 역할로 전락할 때 벌어질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사레였다.



평화공원으로 옮겨지기까지 28년 걸려



피폭 후 한국인들은 더욱 살기 힘들었다고 하셨다. 일본인들은 자신들만이 원폭 피해자이길 원했기 때문이다.



“ 피폭 후 3년 정도 지났을 때 ‘함바‘라고 조선인끼리 부락을 모여서 같이 살기 시작했어요. 전쟁이 끝나고 일본이 망한 책임을 애꿎은 조선인에게 덮어씌우는 바람에 생명이 위험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래선 안 되겠다. 우리사람 우리가 보호하자란 목적으로 조선부락(함바)이 생겨난 거지요.”



“우리가 모여 살기 시작하고 세력도 불어나자 일본인들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 시작했어요. 평화공원이 조성되고 위령비가 세워지자 당연히 우린 우리 이름도 넣어달라고 했죠. 하지만 거절당했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우리 손으로 위령비를 세웠지요. 그런데 이 위령비를 평화공원 안에 둘 수 없다는 거였어요. 기가 막혔지만 일단은 평화공원 밖 다리 밑에 세웠죠. 지금 있는 위치로 옮겨오기까지 무려 28년이 걸렸어요.”



한국정부가 좀 더 따뜻하게 관심 가져 주었으면…….



피폭 전과 후에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태도는 이중적이었다. 피폭 전 전쟁 중에는 다 같은 일본제국의 신민이니 한국인도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외치고는 전쟁 후 해방을 했으니 더 이상 일본인이 아니므로 전쟁보상이나 피폭보상에서 한국인은 제외했다.



“참 어렵게 살았습니다. 해방은 했지만 우리는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니었으니까요. 소위 우리끼리 하는 말로 ‘반쪽바리’였습니다. 피폭에 대한 보상은 일본은 물론 한국도 무관심했어요. 지금 와서 한국정부에게 크게 바라는 건 없어요. 단지 우리가 입국할 때 좀 더 따뜻하게 맞아주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입국 시 한국이면서도 왜 한국말을 못하냐고 무시당했다는 경험을 말씀하실 때는 나도 모르게 무언가 치미는 느낌이었다. 같은 민족인데도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끝으로 선생님은 요즘은 집회를 해도 100명이 채 모이지 않는다고 하시며, 앞으로는 우리 같은 젊은 세대들이 잘 해나가야 한다며 당부의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일본은 삼국시대 때 백제 사람들도 건너와 살았어요. 그 때부터 같이 살기 시작했으니까 지금 일본인 중에 1/3은 한국 사람이에요. 그러니 너는 일본인, 너는 한국인 하는 식으로 구분 지어서 차별하지 말고 다 같이 잘 살면 좋겠어요.”



너와 나의 구분이 없어지고 모두가 하나라는 생각. 바로 김구 선생이 제창했던 사해동포주의와 다름없었다.



1시간가량의 만남을 뒤로 하고 평화교육연구소를 나서려는데, 연구소에서 근무하시는 이승훈 선생님이 산책하러 가지 않겠냐고 물으셨다. 처음에는 남자 일행만 가겠다고 했는데 어쩐 일인지 일행 모두가 따라나섰다.



민족학교를 방문하다.



우리가 걸어 올라간 길은 숙소 뒤편으로 나있는 역사 산책로였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자 웬 학교건물이 보였다. 이승훈 선생님 설명으로는 히로시마 내에 있는 조선계(북한)학교라고 하셨다. 지금은 방학이어서 문을 열지 않는데 마침 숙직하시는 선생님과 연락이 닿아서 운 좋게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조선초중고학교란 간판을 읽고 있자니 숙직하신다던 선생님 한 분이 내려오시더니 문을 열어주셨다. 문을 열어주신 선생님이 어릴 적 다니던 태권도장의 관장님과 너무 닮으셔서 순간 놀랐다. 원래는 학교 위에 올라가 야경만 구경하고 내려올 계획이었는데, 숙직하시는 선생님이 학교 내부를 구경시켜주시겠다고 하셨다. 이게 웬 횡재냐 싶었다. 말로만 듣고 그림으로만 보던 북한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를 직접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맨 처음 구경한 곳은 우리나라 과학 표본실 같았다. 여러 물고기를 해부해 놓은 것들하며, 박제된 꿩, 까치들. 그리고 실제로 연주한다는 악기들도 있었다. 백두산 나무표본을 한데 모아둔 것도 있었다. 과학 표본실을 시작으로 우린 체육관, 무용실, 교실 등을 둘러봤다. 조금씩 차이는 있었지만 한국의 여느 학교의 모습과 별 다를 바 없었다. 단지 교실에 태극기 대신 김일성, 김정일 부자(父子)의 사진이 걸려 있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역시 우리는 갈라져 있지만 한민족이었다. 밝은 웃음으로 우리를 안내해주시던 선생님이 한층 더 가깝게 느껴졌다.



이 조선초중고 학교는 히로시마에 사는 한국인 2세, 3세들이 많이 다닌다고 한다. 히로시마 내에서 조선어를 가르치는 유일한 학교인 셈이다. 그런데 일본당국에서 이 학교를 정식학교로 인정하고 있지 않아, 이 학교를 나왔어도 고등학교 졸업인정이 안된다고 한다. 때문에 대학진학을 위해서는 따로 검정고시를 거쳐 대입시험을 치러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이승훈 선생님은 이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의 표정이 다른 학교 학생들보다 훨씬 밝다고 말 씀 하셨다.




  민족학교 실내에 붙어있는 글귀






  민족학교 무용연습실의 글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조국의 말과 글을 배우며 학교를 다닐 학생들이 자랑스러웠다.



학교를 나오는 길에 도저히 그냥 갈 수 없어서 이승훈 선생님께 부탁해 안내해주신 선생님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더니 흔쾌히 승낙해주셨다. 그래서 기왕 찍는 김에 우리 일행을 대표해서 김대훈 선생님도 같이 찍어 드렸다. 나중에 보니 그 사진은 남과 북이 하나로 모인 사진이 되었다. 부디 한국과 북한 사람들이 이렇게 서로 밝게 웃으며 자유로이 함께 사진 찍는 날이 한국과 북한 땅 여기저기서 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랬다.



2005년 8월 13일 토. 오쿠노시마
덮어버린 진실, 오쿠노시마




생전 안 걷다가 갑자기 무리해서 걸은 탓인지, 아님 저녁 늦게 또 히로시마 길거리를 배회한 탓인지 조금 늦게 일어나게 되었다. 그래도 평소 집에서 일어나던 시각보다는 한참 일찍 이라 여전히 졸음기가 남아 있었다. 오늘은 오쿠노시마(일명 독가스 섬)로 가기로 되어 있는 날이다.



아침을 대강 먹고 오쿠노시마(大久野島)로 가는 배를 타기위해 기차를 타고 가는 와중에도 연신 하품을 했다. 반쯤 졸며 바깥 풍경을 구경하고 있으니 어느새 오쿠노시마로 가는 항구 역에 도착했다. 역을 내리자 우리를 반겨 주신 분은 오쿠노시마에서 안내를 해주실 자원봉사자분들이었다. 남자분과 여자 분이 준비하신 차를 타고 20여분 가자 우릴 섬에 데려다 줄 배들이 모여 있는 항구가 보였다. 두 분이 우릴 내려주고 주차하실 동안, 우리는 오쿠노시마로 가는 승선표를 샀다. 오쿠노시마가 여기서 배로 10여분이 채 안 걸리는 거리라 우리가 타고 갈 배는 생각했던 것보다 작았다. 그래도 난생 처음 타보는 배라 비행기와는 또 다른 흥분이 일었다. 이곳 일본에 오면서 그동안 못 해봤던 것 두 가지를 한꺼번에 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배 타는 일이었다. 물론 다른 하나는 비행기 타보는 것. 여러모로 이번 여행은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주었다.



오쿠노시마는 세토나이카이에 있는 히로시마 현에 위치한 섬으로 1927년 일본 육군에 의해 독가스제조공장이 들어서면서 이후 계속되는 전쟁에 필요한 독가스 원료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 이후 그 생산량이 급격하게 늘어나게 되며, 이에 따라 안전사고 또한 빈번했다고 한다. 1938년경부터는 독일식 이페릿이란 독가스를 제조하면서 복잡한 마지막 공정단계 때문에 많은 이들이 중독 되었고, 심하게는 지금까지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종결 후 지금은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비교적 유명한 관광지로 탈바꿈했다고 한다.





  독가스섬 박물관




배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오쿠노시마가 독가스제조를 했던 섬이란 증거물을 모아놓은 전시관을 찾았다. 비록 작은 전시관이었지만, 독가스제조를 위한 여러 기계장치들, 독가스를 보관했던 통, 제조공정 시 입었다던 보호복과 독가스제조를 명령했던 서류들은 지금은 화려한 관광지로 변해버린 이 섬이 60년 전에는 대량살상무기를 만들어낸 섬이란 것이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안내를 맡아주신 야마우치 마사유키는 이 전시관은 일본의 가해를 전하는 곳이라고 하셨다. 일본은 세계가 독가스 사용을 금지하는 조약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섬에서 몰래 독가스를 제조해 중국 등으로 반입했다고 한다. 여기 전시관에서 본 것을 한국에 돌아가서 많은 이들에게 알려주길 바란다고 말씀하셨다. 직접 독가스에 대한 자료집을 들고 일일이 펼쳐가며 설명하시는 마사유키 씨의 모습이 참 인상 깊었다.



전시관을 나서고 우리는 오쿠노시마에 남아있는 독가스제조의 흔적들을 살펴봤다. 독가스 통을 보관하던 저장고, 섬 뒤편에 아직 치우지 못한 제조공정에 필요한 기계들의 잔해들, 독가스 제조를 관리하던 기지는 짙푸른 잔디와 밝은 햇살, 그리고 이국적인 활엽수로 치장하고 있는 이 섬이 숨기고 있는 또 하나의 진실이었다.



섬을 둘러보면서 놀라웠던 것은 이 섬을 찾는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했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그 시절 사용했던 독가스의 일부가 이 섬 지하에 묻혀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일본정부는 이 같은 사실을 밝히길 꺼려하고 있다고 한다.



사람을 죽이기 위한 무기를 만들었던 곳이 이제는 사람들을 위한 휴식공간이 되었다는 웃지 못 할 사실 앞에 잠시 아연해졌다. 지금 내가 밟고 지나는 이 길이 어쩌면 독가스에 오염된 몸을 이끌고 일을 하던 사람들이 걸었다고 생각하니 섬뜩하면서도 한편으론 안타까웠다. 이 섬에 잠든 그 수많은 원혼들은 위로받지도 못한 채 아무것도 모르는 관광객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감추고 숨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터인데, 치부를 감추기에만 급급한 일본의 태도에 답답함을 느껴야 했다. 그래도 마사유키 씨처럼 일본 내부에서도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 사실을 드러내면서 진실한 마음으로 평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희망을 가져본다.



오코노시마를 뒤로하고 히로시마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바로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직행했다. 이번에는 이승훈 선생님의 안내로 히로시마에서 가장 맛있다는 식당에 갔다.



도착한 식당은 재일한국인 1세 분이 운영하시는 가게였는데, 이승훈 선생님은 일주일에 꼭 한 번은 이 집 음식을 드신다며 음식자랑을 하셨다. 일행은 두 가지 음식을 시켰는데, 소바요리와 쯔께멘이란 요리였다. 소바요리는 이 집에서 직접 개발한 것 이라하고, 쯔께멘은 매운 맛이 일품이라 하셨다. 마침 배가 고팠던 나는 정신없이 음식을 먹었는데, 아주 맛있었다. 다만 이번에도 국물이 없어서 뭔가 허전했다. 역시 한국 사람은 국물이 있어야 해.



재일조선인 이실근 선생님과 함께



맛있는 저녁을 먹고 일행은 어제 들렸던 평화교육연구소 회의실로 들어갔다. 어제처럼 피폭경험자분의 강연이 있기 때문이었다. 저번분이 민단소속이셨다면, 이번에 만날 분은 총련에 계시던 분이라고 하셨다. 역시 이번에도 내가 꼴찌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번엔 바로 옆 자리였다. 마주보고 앉는 거나 바로 옆자리나 부담스럽긴 매한가지다. 역시 모든 일에 지각하면 결과가 안 좋은 법이다.



과거 청산 없이는 미래지향 없다



이실근 선생님과의 만남은 김대훈 선생님의 이색제안으로 자기 오른편에 앉은 사람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자기 자신을 소개하는 것도 어색한데, 타인을 타인에게 소개한다는 것이 처음엔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무뚝뚝하게 ‘나는 00입니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부드러운 자리가 만들어졌다.



이실근 선생님은 일본근현대사 교사로 근무하셨고, 현재 재일조선인피폭자협의회의 회장을 역임하고 계신다.



원자사막으로 변한 히로시마



선생님은 당시 히로시마가 아닌 고베에 거주하셨기 때문에 원폭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는 입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 시절 선생님은 [맨발의 겐]에서 나오는 한국인 박씨처럼 쌀장사로 생계를 꾸려가고 계셨는데, 원폭이 투하된 날 마침 일을 끝내고 고베로 돌아가기 위해 히로시마 시내로 들어서는 길이었다고 하셨다.






이실근 선생님




“엄청난 소리와 함께 버섯모양의 구름이 히로시마에서 보였지요.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44초에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떨어진 거였어요. 처음엔 영문을 몰라 빨리 히로시마 시내로 들어갔지요. 시내는 말 그대로 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어요. 원자사막이 뭔지 아시나요? 원자폭탄으로 죽어나간 사람들이 말 그대로 사막의 모래언덕처럼 쌓여있는 시체더미를 뜻하는 말이지요. 우린 그 시체더미를 헤집으며 수 시간을 걸려 히로시마를 빠져나와 야마구치 현으로 돌아갔어요.”



다행히 원자폭탄을 직격으로 맞는 것을 모면하신 선생님이었지만, 오랜 시간 히로시마 시내에 계셨던 터라 방사능으로 인한 후유증까지는 비켜 가실 수 없었다고 한다.



“집에 돌아오고 3일 후에 병에 시달렸지요. 고열에 설사까지. 그래도 우리 조선 사람은 변변한 치료하나 받을 수 없었지요. 일본인 의사가 조선인은 치료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쑥물을 타서 먹어나 애핀(양귀비 - 마약원료)같은 풀을 먹는 등 민간요법으로 치료할 수밖에 없었어요. 다행히 나는 그렇게 해서 나았으니 운이 좋았지요.”



이렇게 선생님처럼 직접 피폭을 당하지 않았어도 방사능에 의해 병이 생긴 희생자들이 많다고 한다. 이처럼, 현재 피폭 생존자 중 대부분은 방사능 피해자라고 하셨다.



한국인 피폭의 책임은 일본책임



피폭으로 인한 피해는 비단 일본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피폭 후 발표한 14만 명의 피폭 희생자에 한국인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일본이 유일한 피폭 국가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일본인만이 유일한 피폭자는 아니지요. 피폭 당시 히로시마에 있었던 것은 일본인만이 아닙니다. 조선인도 분명 있었습니다.



그 때 있었던 조선인이 정말 일본이 좋아서 들어와 살았을까요? 피폭을 당했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군사도시였습니다. 절대적으로 노동력이 부족했지요. 이곳에 있던 조선인들은 대다수가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조선인은 할 수없이 일본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원자폭탄으로 피해를 본 조선인들은 일본의 책임이지요. 그런데도 일본정부는 조선인 피폭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북한에도 피폭생존자가 920여명이 있지만 아무런 혜택을 받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북한과 일본은 수교가 안 된 상태라 더욱 어려움이 크지요. 때문에 일본정부는 검토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지금까지 아무런 확답을 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일본의 잘못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부분에서는 선생님의 말씀에 다소 열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음은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고 나왔던 몇 가지 질문들은 간추린 것이다.



일본이 이렇게 재일조선인 피폭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등,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까닭이 뭘까요?



그야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지요. 일본은 피폭을 당하기 전, 수많은 전쟁을 치렀습니다. 일본에 의해 침략을 당한 나라는 조선만이 아닙니다. 중국을 비롯해 동남아시아 국가들 또한 일본에 의해 피해를 당한 나라들입니다. 만약 일본이 조선인 피폭자를 인정하게 되면 중국인에 대한 피폭여부와 전쟁보상금, 나아가 동남아시아 전체에 보상해야할 금액은 천문학적인 수치일 것입니다. 때문에 일본은 과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거나 감추려는 것이죠.



앞서 말씀하셨을 때, 일본인들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이유가 연합군포로수용소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맨발의 겐]을 보면 피폭을 피하기 위해 포로수용소가 있다는 표식을 지붕에 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정말 히로시마엔 포로수용소가 없었나요?



히로시마에 연합군 포로수용소가 없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원폭이 투하된 것이 단지 이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은 원폭 투하에 대한 책임을 오로지 미국으로 넘기고 자신들은 피해자란 입장을 내세우기 위한 일종의 변명과 같습니다.



원자폭탄이 투하되기까지 히로시마는 일본 제 1의 군항(軍港)도시였습니다. 1894년 10월, 명치천황에 의해 히로시마는 군도(軍島)로 우지나 항은 군항(軍港)으로 선언됩니다. 이후 51년간 히로시마는 청일, 노일, 만주사변, 중일, 태평양 전쟁의 전초기지로서 일본 최대의 군항으로서 역할을 수행합니다. 때문에 단순히 연합군포로수용소가 없었단 이유로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것은 아닙니다. 히로시마는 원폭의 목표가 되기에 충분한 군사도시였던 것입니다.





이런 일을 시작하시게 된 계기는?



당시 총련에서 근무하던 중에는 재일조선인을 위한 원폭 피해단체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피폭 후 우리 조선인들은 피폭 전보다 더 심한 차별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눈앞에서 일가족이 몰살되어 버린 한 동무는 피폭자 성명 발표 후 10일이나 경과 했는데도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기다리다 지쳐 찾아간 정부기관에서는 해방을 이유로 피해보상금을 줄 수 없다는 말만 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차별을 받으면서도 우리 조선인은 하소연할 곳조차 없던 실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총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직접 원폭문제에 대한 단체를 만들어 재일조선인 피폭 사례를 알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60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일본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않고 있습니다. 이는 일본과 히로시마가 자기검토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패전처리를 국제 연합군 군사재판에만 맡겨버림으로서 정작 중요한 일본천황의 책임은 묻지 않고 지나쳐버린 거지요. 일부에선 일본천황은 책임이 없고 일부 수뇌부의 잘못이라고 하지만,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대본영회의의 최고 책임자는 엄연히 천황입니다. 이런 그가 패망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건 일본이 진실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지요. 오히려 현재 UN 상임이사국에 진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일본은 핵을 보유하려는 야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상임이사국인 5개국은 핵무기보유국입니다. 일본의 확실한 과거 청산 없이는 미래지향을 바랄 수 없습니다.”



얼마 전에 한국도 ‘과거사 논쟁’이 뜨거웠다. 그러나 중요한 건 과거를 드러내 잘잘못을 따지는 것 자체가 아니라, 과거의 잘못에 대해 반성하고 책임지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진실을 왜곡하거나 덮어버리고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으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일본이 하루 빨리 깨닫기를 바라면서 선생님의 강연을 마무리했다.



2005년 8월 14일 일. 기행을 마치고
히로시마 평화기행을 마치며




3박 4일이란 여정을 마치고 어느새 나는 인천국제공항으로 돌아오는 JAL 비행기 안에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창가 자리는 앉지 못했다. 그래도 승무원 몰래 두 컷이나 건졌다는 것으로 내심 위안을 삼았다.



마지막 날 간 곳은 일본 삼경이라 불리는 미야지마 섬이었는데, 시간에 쫓겨 대충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한글로 된 안내문에는 적어도 3시간이상은 해야 제대로 관광을 하는 거라고 쓰여 있었지만, 우리는 속성으로 2시간으로 끝냈다. 그래도 가볼 만한 곳은 다 가보았다. 일본에서 유일하게 바다에 위에 세운 신사라는 이쯔꾸시마진자와 바다 위에 서 있는 오도리(大烏居)를 시작으로 에도 말기 상인이었던 에가미 가(家)의 집과 대지를 그대로 보존시켜 놓은 역사민속자료관, 우리나라 정자 같았던 센죠오카쿠, 공사 중이어서 쳐다만 봤던 5층탑 고쥬우노토오 등을 보고 돌아왔다. 이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오도리도 신사도 아닌 미야지마 항을 나오자마자 우릴 덮친 사슴무리였다.






미야지마의 사슴








항구 앞 광장에 제멋대로 돌아다니고 있는 사슴 떼는 우리 손에 들린 관광 책자를 순식간에 물고는 달아나 버렸다. 이건 사슴이 아니라 거의 염소 수준이었다. 매 동물원 우리 속에서만 보던 사슴을 코앞에서 보고 만져보니 참 색다른 경험이었다. 특히, 사슴뿔을 만질 때는 겁나기도 하면서 신기했다. 그런데 왜 그 때 녹용 생각이 났는지……. 비록 순수한 상태의 사슴이 아닌 관광객에 맞춰 재롱부리는 약아버린 사슴이었지만 자유롭게 노니는 모습이 좋아보였다. 선생님 손에 물론 이것도 관광객을 위한 조치였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2번째라고 귀가 저번처럼 극성을 떨진 않았다. 기내에서 주는 녹차를 먹고 잠깐 잠들었을까싶더니 어느새 한국이란다. 착륙하는 비행기 창 너머로 반가운 우리나라 산이 보인다. 그동안 회화사전을 보고 익힌 일본어 중 가장 자신 있는 말을 스튜어디스에게 하고 비행기에서 내렸다.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얼떨결에 접한 소식에 역시 얼떨결에 간 일본이었다. 단순한 관광이 목적이 아니었음에도 충분히 그 의미를 되새기고 왔는지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비록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외양이었더라도 히로시마의 모습 하나하나는 내게는 새로운 것이었고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때문에 히로시마에 감쳐진 모습을 읽기보다는 겉모습만 카메라에 담아내느라 정신이 없기도 했다. 히로시마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 것은 오히려 돌아온 날 저녁에 우연히 본 다큐멘터리에서였다. 광복 60년을 맞아 특별 기획된 다큐멘터리로 제목이 아마 ‘히로시마의 두 얼굴’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원폭을 맞고 평화의 도시로 탈바꿈한 히로시마의 대표적인 항구인 우지나 항에 핵무기를 탑재한 미국 잠수정이 떠 있는 화면은 히로시마의 양면성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원폭이 얼마나 처참한 것인지 직접 겪은 도시로서 평화를 외쳐대는 목소리 뒤편에 핵무기를 껴안고 있는 형상은, 나는 저런 곳을 갔다 온 것인가 하는 생각에 3박 4일 동안 내가 보았던 히로시마의 모습과 겹쳐져 한순간 오싹함을 느끼게 했다.



진정한 평화는 올바른 인식에서부터 이뤄져야 한다.



오쿠노시마에서 점심을 먹던 중 김대훈 선생님이 안내를 맡으신 야마우치 마사유키 씨와 이런 대화를 나누시는 걸 들었다. 마사유키 씨는 피해만을 강조한 일본정부와 달리 가해사실을 드러내는 일을 하고 계시며, 이것은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는 올바른 일이라고 하셨다. 이처럼 한국에서도 피해만을 강조한 전시관이 아닌, 베트남 학살 같은 가해 사실도 함께 보여주는 평화박물관 건립을 추진하고 계신다고 하셨다.



진실로 평화를 사랑하고 염원하는 마음은 지난 역사에 대한 올바른 검토와 인식에서 출발한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의 책임을 다른 누군가에게 미루거나, 자신이 입은 상처만을 호소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독가스 공장 위로 푸른 잔디와 활엽수를 심어 덮어버리는 것은 쉬운 일일지 모른다. 허나 천 마리의 학을 접었던 사다코와 친구들이 원했던 것은 허울뿐인 [편히 잠드소서.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겠습니다]란 문구의 비문이 아닐 것이다.



환부는 도려내지 않고 그냥 두면 곪는 법이다. 드러내야할 치부는 드러내고, 받아야할 수술은 온전히 받아야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 일본이 계속해서 겉과 속이 다른 가면을 쓰고 있는 다면, 우리와는 언제까지나 가깝지만 먼 나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히로시마가 진정한 평화의 도시로 거듭나길 바라면서, 강문희 선생님이 말씀하신 너와 내가 하나 되는 날이 오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