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소식

제목 베트남 전쟁과 나 / 김진호 (한베진실상 수상작)
작성일자 2018-08-16

베트남 전쟁과 나 / 김진호 (한베진실상 수상작)












2005년 봄 실시한 베트남 전쟁 종전 30돌 맞이 수기공모 대회 [베트남 전쟁과 나] "미안해요 베트남, 미안해요 이라크, 사랑해요 아버지, 힘드셨조 어머니" 당선작을 싣습니다.
 

 


베트남 전쟁과 나



 

김진호 (국가유공자. 고엽제 후유증환자)





저는 광주광역시에 살고 있는 한겨레 신문 구독자 김진호입니다. “베트남전쟁과 나”라는 주제의 글을 공모하는 광고기사를 보고 이 글을 쓰게 됐습니다.



예순 한해를 살아온 내게 아직까지 가슴 속에 뚜렷이 남아 있는 기억들은 38여년 전 베트남전 때의 일들인데, 그것은 내가 철이 들어서 찾아온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나의 인생과 우리 가정이 형편없는 지경에 이르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부대가 베트남전에 참전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시에 우리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주간에 경비초병을 교대로 서고 있었다. 어느날 나는 근무교대를 하고 철조망 주위를 살폈다. 무덥고 한적한 농촌 풍경에 밭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자 두 명은 괭이로 밭을 파고 있었고 남자 한 명은 넝쿨나무그늘 풀밭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앉아있는 남자 옆 풀밭에는 큼직한 바구니와 몽둥이 같은 것이 몇 개 있었다.



한참 밭을 일구던 여인들이 작업을 중단하고 앉아 있는 남자 옆에 모여 앉았다. 그들은 바구니에서 음식을 꺼내 나눠 먹었다. 잠시 후 남자가 일어섰다. 다리가 하나 없는 외다리였다. 목발을 짚고 소변을 보고 자리로 돌아온 남자는 누워있는 여자들 옆에 들어 누웠다. 나도 C-레이션 깡통을 까서 식사를 했다. 그들의 바구니에는 폭발물이 아닌 음식물이, 몽둥이는 AK소총이 아니고 그의 목발이었는데 의심하고 경계했던 것을 미안해 하며 먹던 C-레이션 박스를 정리해 놓고 그들이 낮잠에서 일어날 때를 기다렸다.



얼마 후 그들은 일어나 여자들은 밭으로 들어가고 남자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나는 C-레이션 박스를 옆에 끼고 철조망으로 다가가서 남자를 불렀다. 그리고 박스를 철조망 너머로 던져 주었는데 남자는 박스를 열어보더니 앉았던 자리로 돌아가서 박스를 놓고 조그만 바나나 송이를 가져와서 내게 던져 주었다. 고맙다는 표시를 했다. 나도 그랬다. 뜻밖의 물물교환을 하게 됐다.



교대 근무자에게 바나나를 나눠 주고 벙커에 돌아와 나는 그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 즈음 우리는 쌀이 지급돼 밥을 해먹고 있어서, 일주일치씩 지급된 C-레이션이 몇 박스 씩 여유있게 가지고 있었다. 이튿날 근무교대를 나갈 때 뜯지 않은 새 박스를 가지고 갔다. 의아해 하는 근무 교대자와 근무 교대를 하고 주변 상황을 점검하며 어제의 그들을 찾았다.



그런데 오늘은 인원 변동이 있었다. 여자 1명, 남자 1명이 있었다. 여자는 씨앗을 밭에 심고 있었고, 남자는 어제와 같은 자세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남자는 내가 있는 초소를 힐끗힐끗 보곤 했다. 나는 초소를 나가 사선에 올라서서 손을 들어 인사했다. 그가 바나나 한 송이를 들고 철조망 가까이 왔다.



나도 C-레이션 박스를 어깨에 메고 그에게로 가서 또 물물교환을 했다. “당신은 내게 바나나를 주지 않아도 된다. C-레이션은 여유가 있어서 주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싶었으나, 6개월 훈련중에 잠시 배운 월남어 실력으로는 이야기가 되지 않았다. 졸지에 물물교환을 또 하고 말았다.



곧바로 우리 부대는 작전을 시작하면서 외곽 방어선을 넓혀 나갔다. 그들이 일궈놓은 밭은 짓밟혀 버렸고 그 가족에게 사과 한마디 못했다. 미군들의 네이팜 폭격으로 뜨겁고 시커먼 연기로 자욱한 정글을 탱크와 불도저를 앞세우고 계속해서 우리땅을 확보해 나갔다. 식수가 떨어지면 모래땅 바닥에 웅덩이를 파놓으면 물이 고였다. 5겔톤 물통에 담아 오물을 거른다. 물통 아래에 구멍을 뚫고 통 속에 모래와 나뭇잎을 한켜한켜 넣고 물을 부으면 대충 물이 깨끗해진다.



우리를 지원하는 미헬기는 실탄 식량 배터리를 우선 공급하며 식수는 그 다음이었다. 일기가 좋지 않거나 적의 저항이 심하다 싶으면 보급지원을 중단하고 철수해 버려서 식수가 자주 부족했다. 늪지대를 만나면 지천으로 깔려 있는 우렁이를 건져내서 탄 통에다 삶아서 먹곤 했다.



치열한 전투가 있던 날 나는 빗발치는 총탄을 피해 10여 미터 언덕에서 뛰어내리며 늑골에 심한 타박상을 입고 한동안 심한 고통 속에서 전투를 해야 했다. 그때의 흔적이 지금도 내 몸에 남아 있다. 사상자가 속출할 무렵 나와 가장 가깝게 지내던 정수병이 매복지에서 주검으로 돌아왔다. 그는 고향에 홀어머니와 세 동생이 있는 가정에 장남이었는데 그 정수병이 알아보기 힘든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며칠 후 정수병에게 편지가 왔다. 내가 뜯어 보았다. 국교 5년생 그의 막내 여동생이 연필로 또박또박 쓴 편지엔 오빠에 대한 그리움, 걱정, 건강한 몸으로 돌아와 만나자는 기대들이 적힌 글을 읽으며 나는 허탈함과 분노를 느꼈다. 나는 눈물을 훔치면서 그의 관품을 정리했다. 분했다. 대대장님의 말처럼 꼭 살아 돌아가자고 개죽음을 당하지 말자고...



고향이 같은 우리 둘은 같이 귀국휴가를 보내는 얘기도 몇 번이나 했었는데...



그의 홀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은 이 장남의 죽음을 어떻게 감당할까? “정의와 자유를 길이 지키려 해병은 간다”고 했다. 미국은 “세계평화”를 위해 전쟁을 한다고 그때나 지금이나 떠들어댄다.



“정의와 자유”를 길이 지키고 “세계평화”를 위한다 함은 우리 모두가 행복한 인생을 살자는 것일진대 행복은커녕 너와 나의 가족 모두에게 쓰라린 아픔만 주는 구호만 그럴듯한 망할 놈의 전쟁 속에서 함께 하고 있는 나는 한없는 비애를 느꼈다.



나의 조국 우리의 조국을 위해 우리의 적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면 명예로운 죽음이라는 위로라도 있을 것인데...



한국전쟁이 있게 한 남북 분단상태를 만들어 놓고 그로인해 생긴 전쟁을 도와주는 바람에 또 밀가루, 우유가루를 퍼다줬던 그 바람에 거절 못하고 생판 우리와 안면도 없던 베트남의 전쟁터에 등 떠밀려갔던 우리는 약소 국가의 국민이었음을 어쩔 수 없었다.



갈등하는 마음은 엄격한 규율 속에 묻혀 버리고 군대는 명령이고 명령은 전투였다. 크고 작은 전투를 계속했다.



전투가 계속되면서 베트남 땅은 폭발물과 못된 약품으로 황폐해 갔다. 베트남 국민들은 이 못된 폭발물과 약품으로, 몸을 망치고 가정이 파괴되어 갔다.



우리네 한국군도 죽음으로 불구자로 또 엄청난 “비극의 씨”를 몸 속에 넣고 왔다.



미국은 베트남전 패전 후 자국의 고엽제 환자 등 전쟁 피해자들에게 넉넉한 보상을 해주었단다. 저희가 벌려논 전쟁에서 피해를 본 베트남과 한국은 외면하고 있다. 구차한 이유를 갖다대면서 좋다 다시는 너희들에게 빚을 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낄 상처를 치유하며 살아가겠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우리도 서로 위로하며 살아간다.



38년 전 베트남 어느 항구에 우리가 처음 상륙했을 때 그 곳에서 아주 낮익은 소년 둘을 만나게 되었는데 아이스케키얼음과자통을 어깨에 메고 들고 다니며 장사하고 있었다. 그 모습들은 그 옛날 우리의 형과 동생들의 모습과 매우 닮아 보였다. 전쟁으로 불우하게 된 두 나라의 같은 어린이들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베트남 어린이들은 표정이 밝게 보였다. 전쟁의 아픔도 슬픔도 없어 보였다. 밝게 웃던 순수한 그 어린이들의 모습이 지금까지도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다.



얼마 전 TV에서 베트남 거리 풍경을 보았는데 그 옛날 맑고 순수했던 그 어린이들이 거기에 있었다. 거리의 이발사, 아오자이 펄럭이며 자전거를 달리는 여학생들, 복권장사 아주머니들 모두가 밝은 모습이었다. 순수하고 맑은 그 때의 어린이들이 오늘 하나 된 나라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그들의 아름다운 조국을 이룩했을 것이다.



세월이 많이 흘러 근자에는 우리나라 기업들이 많은 제품으로 연예인들이 여러 가지 영화나 드라마를 베트남에 진출하고 있다. 그러나 멋진 상품과 예쁜 모습으로만 그들에게 다가가서는 안된다. 아픔과 괴로웠던 그들의 과거 속에 우리 한국도 있었음을 잊지 말고 사랑과 우애의 정으로 그들의 마음 속까지 들어가 함께 해야 할 것 같다.



5,60년대 “아이스께끼”통을 메고 거리를 누비던 우리의 소년들은 어려운 형편에도 꿋꿋이 자라나서 군대도 가고 낮설은 전쟁터에 보내져서 주검으로, 불구자로, 또는 건강한 청년이 되어 돌아왔다.



15개월만에 귀국한 나를 가족들은 몸도 마음도 황폐해있는 나는 사랑하는 가족들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건강해지고 있던 차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좋은 처녀만나 결혼도 해서 남매를 얻어 행복한 내일을 꿈꾸며 열심히 일했다.



빵 한 개로 야식을 때우고 허리띠 졸라메고 야간 수당도 없이 진땀 흘리며 생산 수출을 했다. 나라 경제가 상당히 좋아지고 있었다. 부자도 많이 생겨나고 백화점도 많이 생겼다. 그러나 내 몸엔 이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말초혈관에 이상이 오며 자주 피곤했다. 좋아하던 운동도 못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 직장생활도 못하고 가정불화가 잦아졌다.



자식들은 내게서 멀어져갔다. 아내는 한동안 몸에 좋다는 약이나 음식을 구해다 먹이곤 했는데 차츰 무관심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조그만 개인사업을 어렵게 꾸려가며 생활하던 중에 치아가 한개 한개 빠지기 시작했다.



볼품없는 중년이 돼 버렸다.



모든 일에 자신이 없어지고 화를 자주 내는 성격으로 변해갔다. 아내와 자식들은 거의 남인 양 변했다. 주변의 친구들과 멀어져갔다. 죽음을 생각하며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향에 내려온 나는 형님과 함께 부모님 산소에 찾아갔다. 98세에 노환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와 93세에 아버지를 따라가신 어머니께 죄송스럽기만 했다.



“건강이 나빠 괴로워하는 동생이 처와 자식들과 함께 살아가게” 도와달라고 하나님과 부모님께 눈물의 기도를 하시며 형님은 몹시 괴로워하셨다. 가족들을 서울에 두고 고향에 내려와 나는 신앙생활을 하며 치료에 힘쓰던 어느날 “뇌졸증”으로 쓰러졌다.



몇 군데 병원을 거쳐 보훈병원에서 정밀신체검사를 받고 “고엽제 후유증 중등도” 판정을 받고 현재까지 뇌경색, 고혈압, 신경병증, 당뇨병 등의 약물 치료를 받고 있다. 이제 시록이 향기로운 5월이 오고 있다.



전쟁의 상처를 딛고 열심히 살아가는 베트남 국민과 망가진 몸으로 투병생활하고 있는 우리의 전우들과 우리를 간호하고 보살펴주고 고생하시는 모든 가족들께 5월의 싱그러운 행복과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2005 봄 광주에서 김진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