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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베트남 전쟁과 나 / 이주희 (한베진실상 수상작)
작성일자 2018-08-16

베트남 전쟁과 나 / 이주희 (한베진실상 수상작)






2005년 봄 실시한 베트남 전쟁 종전 30돌 맞이 수기공모 대회 [베트남 전쟁과 나] "미안해요 베트남, 미안해요 이라크, 사랑해요 아버지, 힘드셨조 어머니" 당선작을 싣습니다.
 

 


베트남 전쟁과 나



 

이주희





필자가 베트남전쟁을 겪기 시작한 때는 필자가 국민학생 이었을 때다. 월남에서 전쟁을 하고 있던 국군에게 위문편지를 쓰는 것이 월남과의 첫 만남이었다. 당시만 해도 나는 이 전쟁이 '옳은 전쟁'으로 생각했었다. 열대의 무더위에 땀을 흘리며, 이국땅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당시 '베트콩'으로 지칭되었으며, 후에 이들은 '민족주의자'로 재인식되었다.) 때려잡는 우리 군에게 경의와 존경의 뜻을 전했던 것이다. 당시 극장에 가면 '대한뉴스'라는 프로가 본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상영되곤 했다. 그 중에 자주 나오던 장면은 월남에서 베트남사람들의 건강을 돌보아 주는 의사며, 집을 지어주고, 도로를 닦아주는 공병대원 등이었다. 또 휴가를 갔다가 다시 월남항구에 내리던 씩씩한 모습의 맹호, 청룡부대원들도 볼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 군들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추호의 의심도 없었던 것이다.



또 우리 반 친구들과 교실 뒤 게시판에 주일마다 월남에서 온 새로운 소식들과 사진, 신문 스크랩 등을 붙이면서 자랑스러운 우리군의 모습을 익히며 흐뭇해하던 옛 기억들이 떠오른다. 이런 정보교환만을 했던 것은 아니고, 우리 국군들이 받으면 좋아할 위문품이란 것을 보내기도 했다. 물론 격려의 편지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런 일반적인 정황 말고도 필자 개인적으로는 나의 둘째 누이의 남자친구가 비둘기 부대원으로 월남 어느 곳에 가 있던 기억이 난다. 그 분이 천막 앞에서 전우들과 뽐내듯 자세를 취하며 사진을 찍어 보내왔던 기억도 난다. 당시만 해도 그 분이 누이의 친구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 분의 무한한 안녕과 무사함을 빌었던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이와 같은 좋은 기억들은 70년대 중반 어느 날 갑자기 돌변하기 시작했다.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머리 속에 생생하다. 월남의 수도인 사이공을 쳐 들어오는 월맹군과 베트콩의 위압을 피해 도망가는 많은 미군의 헬기, 미 대사관 앞에서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월남 사람들, 울고 뿌리치는 혼란 속에서 미군들이 도망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의 전쟁이 이긴 전쟁이 아니라 패배한 전쟁이란 것을 알기 시작했으며,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로 미군을 생각했었지만, 이 기준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필자의 머리 속에 미군은 늑대 같은 발톱을 가진 '공산 괴뢰 인민군'을 물리치고, 한국 사람들을 공산지배의 위협으로부터 구해낸 은인과도 같은 존재였으며, 세계에서 군사력이 가장 세어 패배를 모르는 '무패의 군'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미군이 우리를 지켜주었기 때문에,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빠진 월남을 미군과 함께 도와주기 위해 파병된 우리군의 역할은 너무도 당연했던 것이다.



월남에 관한 이런 처음과 끝의 모습 중간 중간 다른 영상도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텔레비전에 가끔 나오던 히피 같은 미국의 젊은이들의 데모며, 그들이 들고 있던 팻말에는 '고 홈'('고향으로 돌아가라!'), '피스'('평화!')와 같은 반전 구호가 있었음을 필자는 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옳은 전쟁'이라 생각했던 의식 속에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자라고 있었다. 이렇듯 나의 뇌리에는 서서히 다른 의식들이 같이 싹트고 있었다.



또 월남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미국과 월맹사이에 파리에서 회담이 진행되고 있었다. 미국의 특사인 헨리 키신저와 월맹의 대표인 레독토가 악수를 나누며 회담장으로 들어가던 모습도 TV를 통해 지켜 보아왔다. 그리고 가끔 '부활절 공세'라니 00 작전이라며 죽은 베트콩의 시신과 노획한 무기를 보여주던 모습, 피난가던 사람들의 황당하고 두려워하던 모습, '북폭'이라며 월맹을 폭격하기 위해 뜨는 B-52의 모습 등 전쟁의 일반적인 모습들이 연일 텔레비전에 나왔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필자가 대학에 들어가 읽기 시작한 이영희 선생의 '베트남'에 관한 '펜타곤 페이퍼'(미 국방성 비밀문서)는 필자의 당시까지의 인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계기가 되었다. 필자가 접한 소식은 미국의 함정이 통킹만에서 월맹의 함포사격으로 침몰했는데, 이것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작전에 의해 일어나 미군이 불란서가 시작한 제국주의 식민전쟁을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접한 뒤에, 필자가 미국을 보는 시각은 전혀 달라졌다. 당시 필자는 미국의 대표적인 주간지인 <타임즈>를 매주 읽고 있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한국의 중앙정보부의 개입으로 매주 한국기사일 것으로 추측된 부분이 가위로 오려져 배달됐던 것이다. 필자의 호기심은 배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시청 옆 미국문화원에 가서 잘리지 않은 부분을 읽기 위해 열심히 다니던 기억이 난다. 그밖에 미국의 양대 신문인 <뉴욕타임즈>와 <워싱톤 포스트>를 동시에 읽으면서 미국 쪽에서 한국의 박정희 군사지배를 어떻게 쳐다보고 있었는지를 확인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런 독서를 통해 필자가 얻은 사실은 미국 쪽의 언론이 한국의 언론보다 더 자유롭게 우리의 정치상황을 더 정확하게, 비판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출판물을 더 유심히 읽어내지 않으면 안됐던 것이다. 어쩌면 불행 중 다행 이라고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미국의 지식인들은, 관료들은 우리의 지식인과 관료보다 더 큰 시각에서 세계를 관찰하고 있었다. 이런 시야는 필자에게 지금도 유효하다. 세계의 10대가는 경제규모를 갖고 있는 한국의 언론은 아직도 G-7국의 유수 통신사의 기사를 번역해서 세계의 사건을 파악하지 독자적인 통신망을 통해 자기 식으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서도 우리의 상대적인 저발전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1979년에 일어난 '박정희 시해사건'과 이은 전두환의 '제2의 군사쿠데타'와 1980년에 일어난 5월 '광주민주항쟁'등을 다루는 한국의 언론은 그야말로 지배집단의 의도만을 그대로 옮겨놓는 앵무새에 다름없었다. 전두환 일당이 만든 <국가보위 위원회> 등의 민주세력에 대한 탄압을 지켜보며, 필자는 더 이상 한국에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필자는 암흑시대를 피해, 더 넓은 세계를 접하기 위해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다. 무릇 이 유럽에서는 다른 시계가 돌아가고 있었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한국에서는 금기시 되어 있는 이념문제가 이곳에서 자유로이 서로를 인정하면서 사회의 문제를, 정치를, 경제를, 지식 등을 자기가 속한 이념 속에서 해석하고, 분석하고, 대안을 내 놓는 모습을 지켜보며, 우리가 가야할 방향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또 독일대학에서는 미국의 정책에 대해 우리보다 훨씬 비판적인 시각에서 분석하고, 해석하면서 토론을 벌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당연히 월남전쟁도 그 분석대상이 되었다. 이곳의 대표적인 주간지인 <슈피겔>의 분석에 따르면, 미군이 월남전에 사용한 <고엽제>의 환경에 미친 영향은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미군의 의도는 숲의 나뭇잎을 제거함으로써, 월맹군과 베트콩의 피신처를 없앰과 동시에 미 공군의 폭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었지만, 숲, 농토, 강, 인간들에 대한 건강의 피해와 자연의 피해, 환경의 피해는 수세대에 유전까지 함으로써 일반사람들의 이해와 인식을 넘어서는 피해였다. 후에 <서독방송사(WDR)>에 따르면, 월남전 종결이후 산모들의 해산때 '기형아'의 출생률이 보통때보다 수배에 달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기형아의 출생이 미군의 '비인간적인 폭탄'에 의해 발생했음에도 지금까지 미국이 이 피해자들을 위해 어떤 식으로 보상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필자가 후에 한국 언론을 통해 접한 소식은 한국군으로 월남에 파병되었다가 미군의 폭격에 따른 <고엽제>의 피해를 본 참전용사도 적지 않았다는 소식과 그들이 아직도 당시에 받은 피해로 신체상의 고생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가 미 국방성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집단적으로 제기해야 한다고 본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미군의 폭격에 따라 과거 한국군 참전용사들이 피해를 보았다는 것을 의학적으로, 통계적으로 파악하고,'비인간적인 무기'를 사용하는 미군의 '비윤리성'을 고발해야 할 것이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미군의 잔혹성과 젊은 미군병사들의 심리적인 갈등에 관해 많은 영화들이 그후 만들어졌다. 그 영화를 이곳에서 보면서, 전쟁의 잔혹함을 말할 것도 없고, 그 무의미한 전쟁에 의해 죽음을 당한 가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전쟁의 허위성과 가식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고, 동료와 친구들의 죽음을 직접 겪으면서 받은 심리적인 충격 때문에 거의 미친 지경에 이른 많은 젊은이들을 보면서 왜 이런 전쟁이 있어야 하는지, 왜 젊은이들이 죽임을 당하고, 급기야 미친 지경에 까지 이르는지에 대해 회의적으로 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우리는 전쟁의 문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심각하게 관찰하고, 토론하고, 분석할 필요가 있다.



필자가 독일대학에서 겪은 일을 하나 소개한다. 어느 날 월맹 보건부 장관이 우리 대학을 방문한다는 광고를 보았다. 그래서 친구들과 저녁에 열리는 세미나에 참석했다. 우리대학에 있던 '월맹-독일 우호위원회'의 주선으로 열리는 세미나였다. 당시에 왔던 보건부장관은 중년의 여성이었다. 필자는 그녀의 발제와 토론이 끝난 뒤, 그녀에게 다가가 나를 소개하고, 한국인으로서 한국군이 월남과 월맹에서 저지른 잔혹행위와 적대행위에 대해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정중하게 사과한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녀의 답변은 인상적이었다. '당신이 무슨 책임이 있는가? 당신의 형, 삼촌이 벌인 일인데, 당신이 왜 사과를 하는가, 우리는 지금 앞을 보며 전쟁의 피해를 본 우리 사회를 재건하고 있다. 당신 같은 분들이 더 훌륭하게 커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데 당신의 노력을 아끼지 말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녀의 말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어쩌면 필자가 지금도 평화를 위해, 우리사회의 통일을 위해, 우리사회가 더 민주화 되도록 하는데 작은 힘을 보태는 것은 그녀의 말을 가슴 깊이 새겨, 우리 후대들에게 더 이상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며, 한반도에서 타민족을 해치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의식을 가슴깊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2005.4.2. 독일 괴깅엔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