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소식

제목 퐁니에서 평화만들기 / 김재욱 (한베화해상 수상작)
작성일자 2018-08-16


퐁니에서 평화만들기 / 김재욱 (한베화해상 수상작)










2005년 봄 실시한 베트남 전쟁 종전 30돌 맞이 수기공모 대회 [베트남 전쟁과 나] "미안해요 베트남, 미안해요 이라크, 사랑해요 아버지, 힘드셨조 어머니" 당선작을 싣습니다.
 

 


“퐁니에서 평화만들기”
- 2004 한-베 평화캠프 속에서 만난‘베트남전쟁과 나’-



 

김재욱(나와우리.평화박물관 자원활동가)





들어가며



TV에서 뉴스를 보다보면 종종 아나운서는 불편한 이야기들을 쏟아놓는다. 그것은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이다. ‘모모 지역으로 날아가던 비행기가 사고로 추락했는데, 참 다행스럽게도, 한국사람의 인명피해는 없더라’고. 나고 자란 한 국가의 사람들이 안죽었으니 다행스럽다는 아나운서의 애뜻한 마음을 이해 못할 바 아니지만, 공중파 방송에서 털어놓기엔 다분히 편향적인 표현이라고 보는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일까? 이왕 말 꺼낸 것, 좀 더 생각해보면 지구인들은 참 이상하다. 비록 한국 사람은 인명피해가 없더라도 그 사고로 누군가가 죽거나 다친 것이 분명한데, 한국사람이 죽으면 ‘안’ 다행스런 일이고 쿠르드나 이라크 사람이, 혹은 일본사람이나 미국사람이 죽으면 쾌재를 부를 일인가. 사람들이 고통받고 죽어가는 문제가 국적의 다름으로 그 무게를 저울질 당할 문제였었던가.



좀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내가 살고 있는 한국이라는 나라는 온통 자국사에 매몰된 나라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형편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그간의 배타적이고 국수적인 자국사 인식이 가져온 후유증은 너무나 오랜 시간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선택적으로 기억하는 버릇을 가져왔다. 사실 자기성찰이 동반되지 않은 이러한 선택적 기억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인식은 현재 한국사회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과거를 대면하는 방식 중의 하나일 것이다. 과거를 정직하게 바라보지 않고서는 미래가 제대로 창출될 수 없다는 상식적인 문제의식은 실종된 채.



평화를 사랑했다던 백의민족은 말 그대로 언제나 선한 사람들이었을까. 그런 사람들이 과연 정말 존재할까. 수십 년 전 한국군인들이 베트남 이름모를 마을에서 저지른 일들에 대해선 누가 설명할 수 있을까.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인가. 그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혹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한국은 정말 의롭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국가인가.



아다시피 누구나 원하는 국가를 선택하여 태어날 수 없다. 베트남, 베트남전쟁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것은, 내가 선택하지도 선택할 수도 없었던 국가에의 귀속, 그것에 내가 목매달아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려워지면서였다. 국가의 이름으로 저버린, 우리, 사람들, 개인의 의미에 대해서 눈 뜨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베트남으로 떠나기 전



40년 전 베트남전쟁 때 한국군이 양민학살을 했던 지역에서 열리는 <한-베 평화캠프>에 참가하기로 결정한 얼마 뒤, <나와우리>에서 주최한 평화캠프, 이전 참가자들의 모습을 영상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Finding Forrester)>의 주제음악으로 쓰인 경쾌한 레게풍, “Over the Rainbow”가 흘러 나오며 작년 캠프팀이 베트남 중부 빈영(Binh Duong) 마을에서 했던 여러 가지 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마을의 집단묘지에서 어느 할머니의 통곡소리를 듣지 못했더라면 수십 년 전의 어두웠던 일들과는 전혀 관계없는 무더위 속에 땀흘려 일하고 있는 어느 대학생들의 농활 장면으로 보였으리라.



한여름 무더위, 땀에 절어 있던 작년 그들의 모습이 화면 속에서 사라지면서 나는 이 평화캠프라는 이름의 무게에 서서히 당황하기 시작했다. 더욱 고민스러웠던 것은 고통의 기억을 공유하지 못한 이방인이 과연 오랜 고통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위로와 화해를 나누고 연대할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은 할까, 고통을 다시 재생산하는 게 아닐까에 대한 고민들이었다. 덧붙여 떠나는 자의 마음상태는 어찌해야할 것인가. 고통받지 않은 이가 슬픔을 가장해야 하는가, 주책 맞게 고통의 현장에서 난 경험한 적 없으니 즐겁고 평화롭다는 표정을 지어야 하는가, 어떤 정신상태로 임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이러한 생각의 저 너머에는 ‘나는 죄없음’ 혹은, ‘나완 근원적으로 상관없는 먼 옛날 잔인한 이들이 저지른 일’이라고 항변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나와 같은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문자로 된 것을 읽는 것보다 직접 보여주는 종류의 시각적인 것이 더욱 효과가 크다.



출국하기 전에, 함께 비행기를 타게 된다고 들었던 한 베트남 소녀를 공항에서 만나게 되었다. 올해 열여덟 살이라는 눈이 큰 그 소녀는 분홍색 옷을 예쁘게 차려 입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뾰족구두를 멋을 내어 신고 있었지만 어딘가 불편하게 서 있었다. 특이하게 생긴 그녀의 뾰족구두를 바라보다 보니, 아닌게 아니라 구두굽이 기울어져 거의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나는 괜히 맘이 불편해져 그녀를 쳐다 볼 때마다 뭔가 다른 편한 신발로 갈아 신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위태롭게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나중에 알게 된 그네의 처지처럼-호치민시에 도착해서 알게 되었지만 그 소녀의 가족들이 그녀를 마중 나오지 않았다!- 불안해 보였다.



함께 떠나는 평화캠프팀 사람들 누군가가 해준 이야기에 의하면,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미화 400달러에 팔아 넘겼고 한국으로 시집와 살다가 고생 고생 끝에 결국 이혼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주위의 도움을 받아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베트남 처녀들과 관련된 가슴 아픈 사연은 종종 들리곤 하여 전혀 모르는 일이 아니었지만, 내 눈으로 만난 그녀를 그저 남의 일이니 태연히 받아들이는 내 모습이 참을 수 없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게 무엇이 있겠어’라고 되뇌는 내가. 그녀의 눈을 쳐다보면 쳐다볼수록 마음이 슬퍼져서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부끄럽고 미안해서.



호치민시에서 중부지방으로



호치민시 외곽에 있는 공항은 그다지 크지 않은 규모였다. 막 공항을 나서자 후끈한 더운 기운이 느껴졌지만, 그다지 불쾌하지 않았던 것은 평화캠프의 시작이자 ‘다른 나라에 와 있다’라는 흥분에서였는지도 모른다. 서울에서 가져온 짐들을 서둘러 챙기고 숙소로 향하는 동안. 그 말 많던 호치민시의 오토바이 물결을 직접 보게 되니 이국에 와 있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서울의 도시풍경에 익숙한 사람이 보기엔 위험천만 어지러운 통행이었지만 신호등 하나 없이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모습 속에서 내가 살아온 문화와 다르다는 그것이 또 하나의 배움이 되었다. 자신에게 익숙함에서 오는 편안함과 그로 잉태될 수 있는 편견이 얼마나 가소로운 생각일 수 있는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베트남에서의 첫 날 밤을 보내게 되었다.



다음날, 평화캠프팀 일행은 호치민시에 있는 전쟁유적박물관을 관람하게 되었다. 전쟁유적박물관은 그다지 크지 않은 규모였지만 베트남전쟁의 구체적인 실상에 대해서는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전시하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퍼부었던 폭탄의 3배에 해당하는 화력을 퍼부어 베트남 땅을 유린했던 미친 시간들의 참상, 그리고 사람들의 고통이 전시공간 마다 배어져 나왔다. 그리고 우리의 아픈 과거, 한국군의 모습도.



캠프팀에 함께 합류하게 된 하재홍씨(한겨레21 전문위원)의 설명에 따르면 미군은 고엽제가 무엇인지 동맹군인 한국군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군은 하늘에서 비행기로 쏟아 내린 고엽제를 모기약인 줄 알았고, 덕분에 참전군인들은 오늘까지도 고통 받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보낸 한국군 참전부대의 사진들을 보면서 이 어리석고 안타까운 그 날의 결정이 그다지 멀지 않은 어제의 일이며 바로 나와 내 옆의 일들이었음을 분명히 상기 지켜주었다.



공과(功過)를 분명히 해야할 일이다. 공적은 공적대로 과오는 과오대로, 분명하게 대면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공이 조금 있다고 그것으로 모든 걸 무마하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갔을 때, 오늘 우리는 또 다시 무의미하고 명분 없는 고통과 폭력의 전쟁에 참예하여 잘못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사연 없는 일들이 어디 있겠느냐만 세상은 참으로 구구절절하고 안타까운 일들이 너무도 많다. 이런 사연들의 생산에 막대한 기여를 하고 있는 그 핵심에 전쟁이 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하는 일, 전쟁. 유사 이래 인간은, 인간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정신적 성숙에 있어서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평화캠프가 진행될 퐁니(Phong Nhi)마을로 이동하기 위해 해안을 따라 우리는 이동을 시작했고 중부의 고도(古都) 호이안(Hoi An)에서 일박을 한 뒤 퐁니마을로 들어가게 되었다.



원체 국토가 긴 나라인지라 버스로 25시간을 달려왔어도 전체 길이의 중간에도 약간 못 미치는 지점에 도달했을 뿐이다. 수도인 하노이(Hanoi)까지는 지금 온 시간의 배를 더 가야만 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목적지가 북부지방이 아님을 안도하게 해준다. 말이 25시간이지, 베트남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긴 나라인지 실감하게 해 준 시간이었다. 그나마 우리는 외국인이라 에어컨이 나오는-웃기지만 추위에 괴로워하기도 했다- 좋은 버스로 이동한 것이지 베트남 사람들이 이동하는 버스는 에어컨이 없는 버스란다. 세상에, 이 더위에.



가는 중에 버스의 에어컨이 고장이 나서 잠시 머문 어떤 마을에서 나는 처음으로 베트남 여느 시골마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도매금으로 다 싸잡아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 잘 알지만서도 감히 판단하건대, 요즘 서울의 아이들은 도시문명의 세례 덕분인지 영악하기 그지 없다. 내가 아는 어떤 8살짜리 아이는 어머니가 회사를 그만두면 바이올린 강습비를 못내게 되니까, 퇴직하려는 어머니를 극구(?) 만류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이곳의 아이들은 다행인지 불행인진 몰라도 아직 순수하다.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



아이들과는 외국어를 몰라도 소통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로 인해 서로 닫혀 있는 어른들과도 소통할 수 있게 된다. 아주 간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이들과 같이 열린 마음을 가진 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 가를 나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다시 버스는 호이안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남북을 가로지르는 유일한 국도인 베트남의 1번 국도는 상.하행선이 각각 1차선뿐이 없다. 그 좁은 길에 자전거와 오토바이, 그리고 버스와 트럭이 함께 다닌다. 그 와중에 사람들과 동물들이 자주 도로를 횡단하곤 한다. 덕분에 위험한 교통사고도 많이 일어난다. 그런저런 사정과 그 속을 아찔하게 운전하는 버스기사님 덕분에 나는 밤에도 종종 깨어 전방을 불안하게 응시하곤 했다.



이제는 길가를 지나가는 물소들이 차를 가로막는다. 소는 전혀 놀라지 않고, 차는 속력을 낮추고 멈추어야 했다. 버스기사는 별로 화를 내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처럼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베트남땅에서 프랑스와 미국의 문명이 멈추어야 했던 것처럼, 버스라는 문명은 조용히 멈추어야 했다. 소떼들이 지나갈 때까지.



퐁니에서 평화만들기



호이안에서 하루를 머문 캠프팀은 다음 날 아침, 드디어 퐁니마을로 향했다. 30분 정도 이동했을까, 드디어 버스는 디엔반현 디엔안싸 퐁니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인민위원회 건물에 나부끼는, 별이 그려진 빨간 깃발들은 이곳이 정녕 사회주의 국가임을 증명하는 듯 했다. 웬지 가 본 적도 없는 북한에 온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인민위원회 당사에서 간단히 한-베 평화캠프팀 환영행사를 가진 뒤, 위원회에서 마련한 점심식사를 나누게 되었다. 마을 청년단원들의 기분 좋은 환대 속에 식사를 마친 뒤 각자 머무를 마을의 민박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나중에 다른 한국 참가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알게 되었지만 내가 머문 민박집은 아이들이 많아 좀 더 잘 민박집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있던 민박집에는 할머니(Lang, 75세), 어머니(Le Thi Van, 41세), 큰아들(Ngo Le Khanh, 19세), 둘째인 호아(Ngo Ngan Ha, 18세), 막내아들, 지앙(Ngo Hoang Giang, 10세), 그리고 세 살배기 아기, 이렇게 일곱 식구가 살고 있었고, 이 집의 아버지는 일하러 하노이에 가 계셨다.



할머니는 베트남 전통풍습으로 젊을 때 물들였던 검게 물들인 이빨을 수줍은 듯 감추시며 엷은 미소로 평화캠프 베트남측 참가자 타오(Thao, 호치민 국립대 학생), 응옥(Ngoc, 하노이 국립대 학생)과 나를 반겨 주셨고, 어머니와 그 가족들은 한국에서 온 나를 마치 친족처럼 대해주셨다. 나중 일이지만 내가 머문 지 이틀 째 되는 날, 할머니는 아기를 돌보다 침대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셨다. 그래서 큰 병원이 있는 다낭(Da Nang)으로 가시게 되어 마을에서 나올 때 인사도 못하고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인사를 못드리고 나와 죄송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했다. 덕분에 나는 남은 기간 동안 무슨 이 집의 가장이라도 된 양, 밤에 집 문단속을 하고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은 아이들을 기다리기도 했다(어머니와 큰 아들은 병원에 가야했다).



마을에 도착하여 짐을 정리한 뒤부터 바로 우리는 퐁니마을 위령비가 세워져 가는 야유나무 밑으로 가서, 위령비 주위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아름드리 야유나무의 둘레에는 불에 탄 흔적만이 무슨 일이 존재했던 것을 이야기하는 듯 했으나, 정작 수십 년 전 일은 아는 듯 모르는 듯 조용히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참으로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퐁니마을에서의 첫날, 마을은 자신들의 평화로, 도시에 찌든 우리를 오히려 안아주었다.



다음 날은 평화캠프팀 일행은 하미마을 위령탑을 참배하였다. 이 마을의 위령탑은 한국의 청룡부대 출신 파월장병복지회에서 자금을 지원하여 세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위령탑을 건립하기 위해 자금을 댄 파월장병복지회의 의도는 수십 년 전 청룡부대원들이 이 곳에서 영아에서 노인까지 가리지 않고 학살한 것을 반성하고 사죄하는 의미에서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의도는 막연히 이곳에서 죽은 사람들을-청룡부대 전사자․마을사람들을 일괄하여 그냥 죽은 사람- 단순히 추도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파월장병복지회 측은 하미마을 사람들이 당시 학살현장 그 날의 아픔과 이후의 바램들을 구체적으로 적어 넣은 위령탑 뒷면의 비문을 삭제할 것을 요구했고, 그들의 압력에 못이겨 급기야 위령탑 뒷면은 생뚱맞은 연꽃무늬로 비문을 덮게 되었다.



자신들만의 기억 속에 갇혀있는 그들은, 환율차이에 힘 입은 잘난 몇 푼 돈으로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두 번이나 찢은 것이다. 그러나 하미마을 사람들은 파월장병복지회의 요구대로 비문을 삭제하지 않았다. 다만 연꽃 무늬로 덮었을 뿐이다. 언젠가 그 비문이 제대로 드러나는 날, 진정한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질 것이다. 이 일을 한국인의 손으로 먼저 시작할 수 있길 기원한다.



퐁니마을로 돌아온 평화캠프팀은 인민위원회 당사 뒤편에 있는 퐁니마을 유치원 건물을 새로 페인트칠 하는 일에 착수했다. 아직 시골 구석에는 물자사정이 원활치 않은 지라 페인트도 유성이 아닌 수성이었고 그나마도 부족해서 뒷면은 칠하지도 못했다. 수성페인트 덕분에, 페인트에 묻은 옷은 수월히 세탁할 수 있었지만, 비가 많은 이 곳에 수성페인트로 건물을 도색한다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건물을 칠하는 동안 내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만, 마을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일의 완성도와 관련된 문제는 아닐 것이라고 자위해 본다. 어차피 잠시 왔다가는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으랴. 무엇을 돕는다는 작위적인 마음보다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 사람들과 평화롭게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더욱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덤으로 이들의 삶의 양식 속에서, 내가 잊고, 아니 모르고 있었을 삶에 있어서의 관용과 여유에 대해서 차라리 배우게 된다.



다음 날에는 한결 여유로운 템포로 퐁니마을 위령비 건립을 위한 마무리 작업을 진행해 나갈 수 있었다. 오랫만에 만져보는 삽자루를 손에 쥐고, 모래를 퍼 나르고 발로 다지고 하는 중에 검은 비구름이 몰려오더니 우리의 더위를 식혀주었다. 비를 피해 위령비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노래를 부른다. 아니 절로 나오는 모양이다. 우리네 시골에서도 농사일 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전통이 있던 것을 잘 알지만, 막상 오늘날 우리 일터에서 콧노래 부르며 일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던가. 자본의 아들과 딸들인 우리에게 노동의 가치는 금전의 가치와 비례한다. 좋은 직장은 보람된 직장이 아니라 돈 많이 주는 직장이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하루하루 일터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리의 끝나지 않을 소망인 것이다. 그러나 사실 ‘땀흘려 일하다’라는 것이 어쩌면 괴로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화폐의 양으로 그 가치가 환급되는 우리의 ‘땀’이 진정한 제 자리를 찾아간다면 우리의 일터들 역시 이처럼 즐거울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수십 년 전 깊은 고통의 한 가운데에, 잊혀진 그 기억을 올바로 대면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 얽힌 것들을 풀어 내고 평화를 열어가기 위해 모였다. 지금 이 곳에 함께 있지 않더라도 한국과 베트남에서 많은 이들의 염원이 야유나무 밑에 모였을 것이다. 신기하게도, 비가 그칠 무렵 위령비 맞은 편 하늘에 무지개가 떠올랐다. 무지개는 평화로운 공존을 상징하듯 우리 눈 앞에 펼쳐졌다.



다시 시작



지난 역사를 공정하게 가름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기억과 경험에 따른 주관성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개인적이든 국가적 차원의 일이든 간에 자신의 틀 속에 갇혀, 동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총체적 상황을 배제한 채 바라본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편향된 자국사에 길들여진 한국이 그렇고, 오늘 중국과 일본정부의 역사관 역시 그러하다.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때문에 연일 언론과 학계가 들끓고 있다(양 사안의 적절성을 여기서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다). 배타적이고 국수적인 점에 있어 둘째라면 서러울 한국 역시 별로 할 말이 많을 것 같지 않다. 덕분에 한국 땅에서 오래 오래 교육을 받아온 나와 우리들의 모습도 어느덧 비겁하고 추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2004 평화캠프팀이 인천공항으로 돌아온 다음 날(8월 3일), 서울공항에서는 자이툰 부대원들을 태운 비행기가 조용히 이라크로 향했다. ‘진실을 말하지 않고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경구가 참으로 무색하지 않을 수 없다. 국회에서 누군가는 ‘대한민국은 그래도 전진해야 한다’고 일갈했지만, 그다지 전진한 것 같지 않다. 전쟁은 모두의 아픔, 저 ‘옆’의 일이 언제까지나 ‘타인’의 일 일 수 없다. 정녕 저 멀리 저 ‘옆’의 일로 보고자 한다면, 우리 인간들은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진실을 제대로 대면하려는 노력, 그리고 마음 깊은 곳 겸허한 마음으로부터의 고통의 연대야 말로 이제부터 나와 우리 각자가 벌여야 할 ‘시작’일 것이다.



덧붙여서



* 처음 인천공항에서 만나 함께 출발했던 베트남 소녀를, 떠나기 전 호치민시에서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네의 부친이 그녀를 데리러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편안한 샌들을 신고 나타나 우리에게 환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다시 신은 편안한 샌들처럼 그녀의 앞길이 평안하고 행복하길 기원한다.



** 끝으로, 해야만 하는 당위들에서 잠시 해방될 수 있을 어느 날,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퐁니마을에 다시 가고 싶다. 사람들이 보고 싶어서. 나는 그냥 그런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