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소식

제목 정기용 선생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작성일자 2018-08-16

정기용 선생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정기용 선생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2003년이었던가요? MBC에서 '기적의 도서관' 프로젝트를 진행했지요. 쌀집아저씨 김영희 PD가 만든 <느낌표>라는 프로그램이 도서관을 짓겠다고 나섰습니다. 공공성과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안겨주어 연예프로의 새 장을 열었다는 찬사를 받은 그 프로그램에 베토벤 스타일의 바람머리에 중절모를 쓰고 바바리코드 깃을 세운 멋쟁이 건축가가 나왔었지요. 정기용이라는 이름이 귀에 설은 분들 그 장면을 떠올리시면 '아' 하고 생각이 나실 겁니다. 요즘 저하고 한겨레신문에서 '직설'을 같이 하는 서해성이 유재석, 김용만 두 MC와 한껏 바람을 잡으면 정기용 선생님이 툭툭 맞장을 치듯 새로운 개념의 어린이 도서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으셨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어찌 그리 꿈속에 읊는 시구절 같던지요.









출처:한겨레

그 무렵 저는 베트남전 진실위원회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1999년 9월 <한겨레21>에서 박정희 시대에 베트남전에 파병되었던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했던 베트남 민간인 문제를 제기했었지요. 한겨레 독자들은 그 기사를 보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면서 신문사가 먼저 캠페인 같은 것을 시작하기도 전에 돼지저금통을 보내오기 시작했습니다. 독자들이 민주화운동의 세례를 받으며 성장했기 때문이겠지요.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참전 군인들은 한겨레신문을 때려 부수며 반발하기도 했지만, 이 운동은 우리 사회에서 조용한 울림이 만들어내며 여기저기로 퍼져 나갔습니다. 이 무렵 중국 흑룡강성에서 한국인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한 분이 '발견'되었습니다. 문명금 할머니였습니다. 사람에게 '발견'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어색하지만, 1945년 일본이 패전한 뒤 낯설고 물 설은 중국 땅에 내동댕이쳐진 채 50년을 홀로 살아오시다가 한국 사람을 만나게 되었으니 '발견'이라는 말이 쓰일 법도 했습니다. 한국말도 거의 잊어버린 할머니가 한국으로 돌아오시자 정부와 여성단체에서는 정착지원금을 드렸지요. 할머니께서는 아프면 나라에서 고쳐주고 숙식은 나눔의 집에서 다 해결이 된다면서 좋은 데 쓰라며 한사코 그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나눔의 집 활동가들이 도저히 할머니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좋은 일에 쓸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니 어디다 쓸까 할머니께서 정해달라는 말씀에 내가 뭘 아냐고 버티던 할머니는 기왕이면 전쟁피해자들을 위해서 쓰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그 돈이 결국 베트남전 진실위원회에 오게 되었습니다.

문명금 할머니의 돈에 얼마 전 돌아가신 김옥주 할머니께서 남긴 돈까지 보태어 거금 7천만원을 받아 쥐고 진실위에서는 한편으로 너무나 감동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참 난감했습니다. 이 돈은 정말 함부로 쓸 수 없는 돈이지요. 할머니들의 고통스러운 삶이 남겨놓고 간 그 돈을 어찌 우리가 사업비로 함부로 써버릴 수 있겠습니까. 진실위원회에서 할머니들의 뜻을 기리는 평화역사기념관을 베트남에 지을 고민을 했습니다. 서너 군데에 평화역사기념관을 설계할 건축가를 추천해달라고 했더니 하나같이 다 '정기용'이라는 이름을 첫 손에 꼽았습니다. 아니 어떤 분들은 그 일을 할 분은 정기용 선생님밖에 없다고 못 박기도 했지요.

2003년 1월 그 동안 한겨레에 모인 성금으로 뚜이호아에 한-베 평화공원이 건립되는 것에 맞추어 진실위원회는 평화역사기념관 건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베트남에 가기로 했습니다. 그 동안 이 것 저 것 평화역사기념관 건립을 위한 이야기는 무성했지만 막상 추진된 것은 없었습니다. 부지도 예산도 확정된 것이 없었으니 일이 구체화될 수 없었지요.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을 시작한 게 1999년이니 2002년 말이면 한 3년 운동을 한 셈이었습니다. 솔직히 얘기해서 베트남에 기념관 짓는 것으로 손을 턴다고나 할까 발을 뺀다고나 할까 베트남과 관련된 사죄운동을 마무리하겠다는 그런 마음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일면식도 없는 처지였지만 정기용 선생님을 진실위원회의 활동가들과 무턱대고 찾아갔습니다. 당시 선생님께서는 여러 가지 프로젝트로 너무나 바쁜 처지셨기에 우리는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선생님께서 이름 걸어 주시고 젊은 후배 추천해 주시면 그 것만 해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막상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니 선생님께서는 베트남전진실위원회에서 왜 여태 안 오나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면을 통해 우리 활동을 잘 알고 계셨다면서 기념관을 지을 거면 반드시 당신을 찾아오게 되어 있는데 연락이 없어 궁금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정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같이 베트남을 가주실 수 있냐는 우리들의 무례하고도 무리한 청에 선생님께서는 흔쾌히 그러마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한 베트남 오지의 민간인 학살지역 답사의 10여 일 일정은 꿈같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서울로 돌아오기 전 날이었던가요? 호치민시 뒷골목의 포장마차라 해야 할 까 노점상이라 해야 할 까 그런 허름한 곳에서 쌀국수 한 그릇을 먹고 얼음을 띄운 베트남 맥주를 들이키며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봐 이 봐, 기념관은 베트남에다 짓지 말라구... 진실위원회가 짓겠다는 기념관은 피해자를 위한 게 아니라 가해자를 위한 시설이야. 피해자들한테는 어린이평화도서관을 짓던지 부녀자들을 위한 봉재나 컴퓨터 기술을 가르치는 교육시설을 짓던지 해야지... 거기 다 조그맣게 민간인 학살에 대한 사죄의 뜻으로 한국의 시민들이 지었습니다라고 써 붙이면 되는 거지. 왜 가해자들이 교육받고 반성해야 할 내용을 피해자들에게 들이밀려고 그래? 피해자들을 위한 시설은 조그맣게 우리 건축가들만으로도 지을 수도 있고, 기존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쓸 수도 있어. 평화운동하는 사람들은 한국에다 평화박물관을 지을 생각을 하라구..."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이고 왔다는 격일까요. 베트남전 진실위원회는 정기용 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에 새로운 과제에 눈뜨게 되었습니다. 그 날 모임이 계기가 되어 베트남전 진실위원회는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정기용 선생님은 공동대표의 한 분이 되셨고, 그 때 베트남 답사를 같이 갔던 분들은 줄줄이 이사가 되셨지요.

정기용 선생님은 평화역사박물관을 짓겠다는 우리의 종자돈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한테서 나왔다는 사실을 아시고 한 참 말이 없으셨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야 말로 살아있는 사람들 중에서 전쟁에 의해 가장 고통을 받았던 분들이 아닙니까. 그런 할머니들이 다른 전쟁 피해자들의 고통을 아파하면서 그들을 위해 전 재산을 남기셨다니...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연 정기용 선생님께서는 문명금 할머니의 그 마음이야 말로 '고통의 연대'를 가장 감동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고통의 연대!' 그렇습니다. 정기용 선생님이 명명하신 '고통의 연대'는 그 후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가 추구하는 목표가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평화감수성을 기르는 전염성 강한 힘, 그것을 정기용 선생님은 평화바이러스라 부르시며 평화박물관은 평화바이러스를 배양하는 배양기로써, 약화되거나 사라지는 전쟁과 학살의 ‘기억’들을 배양하고, 증식시키고 전파하는 기지로 작동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마디로 평화를 위한 '세균전'을 준비하라는 것이지요.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가 평화운동 내부에서 '업계 최대' 조직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커지고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건물 짓는 것은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습니다. 어찌 보면 이것도 정기용 선생님 덕분인지 - '탓'인지 - 모르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보통 사람들이 흔히 추모공간하면 떠올리는 것과는 정 반대 방향에서 말씀하셨으니까요. 큰 집을 지을 생각 말아라, 죽은 사람을 핑계로 뻔뻔스럽게도 산 사람을 위한 공간을 지을 생각을 버려라, 추모공간은 될 수 있는 대로 안 만드는 것이 좋다, 어느 한 곳에 크게 짓기 보다는 어린이 도서관의 한 코너나 백화점의 한 코너, 시민단체의 한 구석에, 학교의 긴 복도나 계단에 평화의 메시지가 걸려 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 우리는 점점 정기용 선생님께 세뇌되어 갔습니다. 평화박물관을 도대체 어디다가 지을 거냐고 사람들이 물어보면 우리는 선생님께 배운 대로 먼저 우리 마음속에 하나씩 짓자, 그러면 제 아무리 부시대통령이 폭격을 해대도 절대로 부실 수 없을 테니까라고 답하곤 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제주 4ㆍ3평화공원을 만들 때 승효상 선생님과 함께 설계안을 출품했다가 그만 고배를 드시고 만 이야기도 자주 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작품에 담고자 했었던 구상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시며 '이런 천하의 명작을 떨어뜨리다니, 한심한 것들'이라며 웃음으로 우리 회원들과 안타까움을 나누셨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평화박물관에 대한 구상을 다듬던 몇 달간은 마치 새로운 연애에 빠진 듯 달콤하고 행복한 기간이었습니다. 우리가 다루는 내용이 민간인학살 같은 살벌하고도 참담한 것이었음에도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그렇게 희망과 에너지로 충만했습니다.


2005년에 정기용 선생님께서 대장암에 걸리셨다는 뜻밖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2004년 말에 발족한 국가정보원 과거사위원회에 차출되어 가게 되었지요. 처음에는 평화박물관 일과 과거사위 일을 병행해서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과거사 쪽 사정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과거사진상규명 작업은 노무현 정권 하에서만 가능한 것이었기에 시간이 촉박했습니다. 국정원 골방에 틀어박혀 자료 뒤지느라 선생님도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박물관 일도 마음과는 달리 소홀히 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선생님께서는 1년여의 투병 끝에 '이제 다 나았어'라며 털고 일어나셨지요. 힘든 항암치료에 머리는 빠지고, 휑하게 말라버린 얼굴에선 예전의 기막힌 풍채는 간신히 흔적만 알아볼 수 있게 되었고, 목소리는 영 잠겨버렸지만 그래도 선생님의 유쾌함과 꿈속을 거니는 듯한 상상력은 여전하셨습니다. 선생님은 회원의 날 행사에도 열정을 보이셨지요. 2008년의 서울성곽 나들이와 2009년의 서울 문화유산 기행(서촌-경복궁-북촌-창덕궁-종묘)은 아예 '정기용과 함께 하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답니다.
 


 


정기용과 함께 가는 평화박물관 봄나들이
“서울, 오래된 미래를 찾아-사직단에서 종묘까지”(2009.5.17)



2011년 여름 평화박물관의 기금마련 전시회에 선생님께서는 노무현 대통령 사저 봉하마을을 설계할 때 준비하신 스케치 몇 점을 내주셨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돌아가시기 전에 언젠가 평화박물관 식구들이 선생님을 찾아뵌 적이 있습니다. 보수언론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고향에다가 '아방궁'을 짓고 있다고 떠들어 댈 무렵이었지요. 선생님께서는 몹시 분개하시며 '아방궁' 설계 밑그림을 하나하나 펼쳐가며 우리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노 대통령이 고향에 돌아와 흙집에서 살겠다고 하기에, 진정 흙집에서 사는 것이란 농민들이 느끼는 삶의 불편함을 함께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답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거기에 이의를 달지 않았고, 그래서 봉하마을 흙집은 화장실 갈 때도 신발을 신어야 하는 등 대단히 불편하게 설계되었다는 것입니다. 흔히 선생님을 '감응의 건축가'라 말합니다. 봉하마을을 제대로 짓기 위해 선생님께서는 그곳에 살아야 할 사람, 즉 노무현 대통령 부부와 깊은 감응의 시간을 가졌다 고 합니다. 처음에는 집을 짓기 위해 건축주의 의향을 듣는 차원에서 시작된 만남은 1년이 넘게 매주 일요일 오후의 정례모임으로 자리잡았다더군요.



2010년 10월 20일의 깊어가는 가을 저녁, 정동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층에서 선생님께서는 <누구를 위한 추모공간인가>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셨습니다. 이 강연은 2009년에 이어 평화박물관이 마련한 국가폭력과 트라우마 강좌 <고통과 공감, 사유하기 II>의 네 번째 강연으로 마련된 것이지요. 6월의 평화박물관 이사회 때 선생님을 뵙고 몇 달 정신없이 지내느라 여름을 훌쩍 보내버렸습니다. 그날 강연에 가서 오래간만에 선생님도 뵙고 강연도 들으려고 했는데, 다른 어른께서 급히 보자고 하셔서 불려갔다가 일이 늦어지는 바람에 선생님을 뵙지 못했습니다. 다음 날 트라우마 강좌를 준비했던 오하린 활동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선생님께서 못 알아볼 정도로 얼굴이 수척해지셨다는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여름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선생님의 건강이 가을에 들어와 확 나빠졌다는 겁니다. 11월에 있을 개인전 준비에 몰두하시면서 고만고만 간신히 유지되던 건강이 급속히 무너져버렸다더군요. 11월 11일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 때 뵌 선생님의 모습은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바쁠 텐데 어떻게 전시회 오픈에까지 다 왔냐고 웃으시며 반갑게 내미신 손은 말라버린 나뭇가지 같았지만, 참 따뜻했습니다. 20일 전의 강의사진에 비해 훨씬 더 수척해지신 몸으로 선생님께서는 1시간 가까이 또 혼신의 힘을 다해 열정적인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평화박물관에서 한 강의와 일민미술관에서 한 강의가 선생님의 마지막 대중강연이었습니다.



2011년 3월 11일.

그날은 강원도 인제에서 평화활동가대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대회는 전날 개막이 되었지만, 저는 수업이 있어서 하루 늦게 참여하게 되었지요. 세 시간을 달려 인제에 도착하여 제가 맡은 프로그램을 시작하려 할 때 두 가지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습니다. 먼저 접한 소식은 일본에 큰 지진이 났다는 것이고, 그 전화에 이어 바로 김영준 선생님께서 정기용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전하는 거였습니다. 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각 단체의 동료 활동가들에게 우리 대표이신 정기용 선생께서 지금 막 돌아가셨다는 슬픈 소식을 전하고 함께 묵념을 드렸습니다. 프로그램을 마친 후 주진우 사무처장과 서둘러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이었습니다. 댁도 명륜동, 사무실도 대학로나 삼청동, 강의를 하셨던 성균관대도 바로 코앞이니, 평생을 그 일대를 벗어나지 못하셨나 봅니다. 그러고 보니 평화박물관과 함께 한 기행도 서울성곽 답사와 서울문화유산 기행이었네요.







정기용과 함께 가는 평화박물관 봄나들이
“서울, 오래된 미래를 찾아-사직단에서 종묘까지”(2009.5.17)

 늦게까지 빈소에 있다가 집에 돌아와 선생님께서 평화박물관에서 하신 강의를 다시 들었습니다. 동영상 파일이 있는 줄 알았는데 제 컴퓨터에는 음성파일 밖에는 없더군요. 너무 작은 목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작아서 더 집중하게 되고, 작아서 더 울림이 컸습니다. 평소에 비해 말씀이 좀 격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기운이 부족하니 욕을 해야 힘이 나기 때문에 자꾸 욕을 하게 된다고 농담을 하셨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사저를 건축하고 한홍구 같은 사람하고 노니깐 '나는 빨갱이 건축가'라는 농담도 하셨더군요. 선생님은 이 땅을 짐승들이 사는 땅이라고 개탄하셨습니다. 주택정책이라는 이름하에 그곳에 살 국민들, 가난한 서민들을 생각하지 않고 건설업자 뒷바라지나 해온 행태를 지적하시며 선생님은 ‘이건 나라가 아니다’라고 질타하셨습니다. 선생님께 평화박물관은 이 나라 국민들이 평정심을 회복하고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 준비를 해야 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문제도 이 땅에 있고 해답도 이 땅에 있다"면서 이 땅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시대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사람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열심히 느끼고 파악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이런 일관된 태도가 선생님께 '감응의 건축가'라는 별명을 부여하게 되었나 봅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은 "해법은 현장에 있다"며 "책상머리가 아니라 현장“에서 공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숨 걸고 현장에서 배워라" 이것이 그날 선생님의 가르침의 핵심이었고, 안타깝게도 평화박물관에 남기신 유언이 되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은 봉하마을, 순천, 서귀포, 진해, 정읍, 김해 등지의 기적의 도서관, 전라북도 무주의 여러 공공시설 등 수많은 집과 건물을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선생님께서 사실 집은 지어본 적이 없습니다. “바빠서 내 집 지을 시간이 없다”던 선생님은 끝까지 명륜동의 다세대 셋집에 사셨던 거지요. 우리 평화박물관도 당연히 선생님께서 설계해주셔야 하는데 땅을 못 잡았으니 설계 부탁을 드리지도 못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저를 볼 때면 언제나 안타까워 하셨던 게 민주열사 추모 묘역을 만들지 못하신 일입니다. 평화박물관의 이사장이자 상임대표이신 이해동 목사님이 총 책임자셨고, 평화박물관의 공동대표였던 선생님께서 설계책임자로 손발을 맞춰 수유리에 터도 잡고 예산도 확보했는데, 묘역을 조성하지 못했다니 참 안타까운 일이지요. 이런 일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발 벗고 나서게 마련이지만, 발 벗고 나선 사람들이 모두 선생님처럼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헌신하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선생님의 장지가 모란공원으로 정해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참 묘했습니다. 1970년 가을날 전태일을 그 곳에 묻은 이후 모란공원은 수많은 민주열사들이 묻힌 곳이지요. 선생님께서 염원하셨던 민주열사 추모 묘역이 만들어진다면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계신 분들이 다 그곳으로 옮겨가셨을 텐데요. 선생님께서 모란공원에 묻히신 게 그분들을 좋은 곳으로 옮겨드리지 못한 미안함에 그분들과 함께 하고자 하신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통의 연대에 대한 선생님의 가르침, 잊지 않겠습니다.

기념시설은 산 자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죽은 자를 위한 공간이 되어야 하고, 산 자가 자신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진지하게 성찰하는 곳이어야 한다는 선생님의 가르침, 명심하겠습니다.

목숨 걸고 현장에서 배우라는 가르침,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선생님께서 남기신 가르침을 잊지 않고, 그 가르침에 부끄럽지 않은 그런 박물관을 꼭 짓도록 하겠습니다.



한홍구(평화박물관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