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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주워크샵2] 유배의 땅 제주,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작성일자 2018-08-17




[제주워크샵2] 유배의 땅 제주,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유배의 땅, 제주.

드라마 ‘대장금’에서 장금이와 한상궁의 유배지가 제주였고 한상궁이 죽은 곳은 제주 송악산 아래 동굴이었다. (제주 서귀포 쪽은 대장금 촬영지가 곳곳에 있다.) 육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섬, 교통 또한 불편한 바다로 둘러싸인 절해고도, 사람을 멀리 떠나보내어 벌을 주는 유형 장소, 제주!

제주로 가는 것이 너무나 쉬워진 요즘 많은 이들이 소풍처럼 제주를 다녀오며 제주의 아름다움과 풍광을 찬탄한다. 그러나 제주의 아름다움과 독특한 문화 뒤에는 이역만리로 떠난 소외된 자들과 이들을 뒷바라지한 제주여인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절정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지금 가을의 제주에서는 여전히 강정의 아픔이 계속 되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사철 우리가 즐기러 다니는 제주. 과연 이렇게 즐기기만 해도 되는 것일까? 그 동안 그저 제주의 풍광을 감상했다면 이제는 그 너머를 볼 때가 아닌지?

이에 유배와 관련된 제주의 역사를 통해 제주를 알아보려 한다.  

제주와 유배

제주도는 임금이 사는 서울에서 가장 멀 뿐 아니라 험한 바다로 가로막혀 있어 유배지로는 최적지였다. 이를 증명하듯이 조선왕조 약 500년 동안 200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제주도에 유배 되었다. 그러나 유배지로서의 제주의 시작은 우리나라가 아닌 중국에서 비롯되었다.

원나라는 삼별초를 섬멸하고 약 100년 동안 제주도를 직속령으로 삼아 지배하며, 다른 나라 왕족이나 왕권을 위협할 만한 국내(중국)에 두기 곤란한 인물 170여 명을 제주도에 유배시켰다. 이것이 유배지로서의 제주의 시작이다. 그러나 당시 고려인으로서 제주도로 유배된 경우는 그 수가 적고 기간 또한 짧아 본격적인 유배지로 등장한 것은 조선 시대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 정치적 이유로 반대파를 완전히 고립시키자는 목적으로 절해고도로의 유배가 상대적으로 증가하며 중앙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제주도는 늘 유배의 최적지로 거론되었다. 유배는 조선 500년 동안 꾸준히 이어졌는데 제주도는 유배인 수에 있어서나 유배 인물들의 비중에 있어서 단연 ‘유형(流刑)1번지’의 역할을 했다.

영조 33년 전라 감사 이창수는 “유배인이 제주목에 집중하니 연좌인들을 제주삼읍에 분배하고 싶다”고 건의하였으며, 한말 제주로 유배 온 김윤식이 쓴 속음청사에는 “제주목의 유배인들이 나날이 늘어나 마치 섬 전체에 가득 찬 것 같다”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이는 당대의 반체제적 지식인들이 집결한 유배지로써의 제주의 모습을 보여준다.

유배인과 제주문화

제주로 유배 온 사람들은 왕족과 외척, 양반 사대부, 승려, 도적 등 계층이 다양하였다. 그 중에는 사화와 당쟁의 여파로 유배 온 정치가들도 많았다. 지정학적 조건 때문에 다른 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으로 많은 고관대작이 유배되었다. 조선 15대 왕으로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 소현세자의 세 아들, 우암 송시열, 추사 김정희, 인현왕후 복위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김춘택, 면암 최익현, 개화파에서 친일파로 변신한 박영효, 김윤식 등 면면도 다양했다.

이들은 제주에서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지만 유배가 풀린 후 중앙 정계에 복귀해 출세 가도를 달리거나 제주에 정착해 입도시조가 된 이들도 있었다. 조선 시대 최악의 형벌지였지만 유배인 중에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가 많아 이들이 제주를 소재로 하여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으며 우리가 잘 아는 추사 김정희는 제주에 유배된 동안 ‘세한도’라는 불멸의 작품을 완성하였다. 또한 후학 양성, 학문 전파 등을 한 유학자였던 유배인들도 있었다. 왕의 자리를 빼앗기고 제주도로 버려진 광해군이었지만 그의 죽음에 제주도민들이 애통해한 나머지, 후일 음력 7월 7일 제주에 내리는 비는 광해군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주도민들이 흘리는 눈물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하였다.

외딴 섬 제주의 자생적 문화와 유배인들이 전파한 새로운 문화의 결합은 제주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탄생하게 했다. 옛 제주인들이 지역문화 발전에 공헌한 이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제단인 ‘오현단’의 오현 중 3명(김정, 정온, 송시열)이 유배인이라는 점은 이들이 제주문화에 미친 영향력을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유배와 제주여인의 눈물

유배인들은 온 가족을 거느리다시피 하거나 아들과 머슴, 계집종을 데려오기도 했지만 홀로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때문에 많은 유배인들이 제주에서 여인을 만나 관계를 맺고 혼인을 하고 자식을 낳기도 하였다. 모든 유배인이 유배생활 중 혼인을 하거나 혹은 첩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반역죄를 저지른 유배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여자를 얻어 살았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유배인과 제주 여인 사이의 자손들은 이후 중앙과 인맥을 형성하고 학문과 문화를 창달하고 전파하며 제주 문화의 중심에 섰다.

그러나 이후 이들의 유배가 풀리며 육지로 돌아갈 때, ‘제주섬 사람들은 제주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출륙금지령으로 인해 가족이 생이별하고, 제주여인은 첩실로 그 자녀들은 서자로 살게 되는 비극이 발생한다. 그로인한 울분을 참지 못한 제주 출신의 아들이 서울 어머니를 폭행하여 유배형까지 처해지는 사건도 있었다. 이후 유배인과 혼인 관계를 맺은 제주여인들은 “유배인을 따라가지 않겠다. 다만 자식을 의지해 살아갈 뿐이다”라고 결심하게 된다.

(*재미있는 점은 관리나 유배객이 제주 여인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으면 이름에 제주를 제주를 뜻하는 '제(濟)'나 '영(瀛)', '탐(耽)'자를 써 제주를 기억하기도 하였다.)

이상으로 유배와 관련된 제주의 이야기를 짧게 살펴보았다.

조선왕조 500년 간 제주는 정적을 유폐하고 버리는 곳이었다. 방해하는 누군가를 없애고 싶을 때 보내버리면 되는 곳. 제주 사람들이 ‘육지 것’들이라 부르는 우리들 비제주인에게는 그 500년의 잘못된 기억이 남아있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저 멀리 외딴 곳이기에 그저 경치를 즐기러 다니는 곳이라 생각하여 강정을 외면한 것일까? 짧지만 이 유배와 관련된 제주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의 제주의 아픔에 조금이라도 다가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본다.  (글_김남수, 사진_차홍선)


*출처

- 한라일보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 연재글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제주의 유배인

- [네이버 지식백과] 유배의 섬, 제주 (답사여행의 길잡이 11 - 한려수도와 제주도, 초판 1998., 14쇄 2008., 돌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