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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주워크샵1] 제주의들판에서 전쟁의 기억을 더듬다
작성일자 2018-08-17




[제주워크샵1] 제주의 들판에서 전쟁의 기억을 더듬다







제주 섬 남동쪽 끝머리, 해안선에서 툭 불거져 나와 얕게 솟아있는 송악산은 동서로 해안선이 이어지고 남으로는 마라도가 한눈에 보여 풍광이 수려하기로 소문난 곳이다. 송악산의 뒤편, 그러니까 산의 북쪽에는 넓은 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데, 마늘이나 양파, 감자 따위가 빼곡히 심어진 밭 군데군데에 낮은 봉분들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섬사람들의 밥상을 채울 먹거리가 자라나는 이곳은 일제 강점기에는 전투기가 뜨고 내리는 비행장이었다. 낯설게 느껴지는 봉분들은, 콘크리트로 지어진 비행기 격납고를 위장을 위해 흙으로 덮어둔 바람에 작은 풀들이 들어앉아 그런 모양을 하게 된 것이다.

일제는 1920년대부터 제주 전역에 군사시설을 지었는데, 이곳 알뜨르 비행장은 정뜨르 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과 더불어 일제가 건설한 대표적 항공군사시설이다. 이곳은 중일전쟁 시에는 상하이, 베이징, 난징 공습을 위한 전초기지였고 후에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태평양 전쟁 시에는 그 규모가 4배나 확장되어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를 길러내는 훈련장소로까지 쓰였다. 현재 19기의 격납고만이 원형 보존되어 있으나 당시에는 200여 기의 격납고가 있었다고 한다. 격납고는 피탄에 의한 연쇄폭발을 막기 위해 널리 퍼뜨려져 있으며 또한 아주 견고하게 지어져 있다. 과거 황량한 전쟁의 기억들은, 지평선이 그려질 만큼 넓은 농지 사이사이 아직까지 듬성하게 앉아 있는 검회색 콘크리트 구조물로 남아, 그렇게 널브러져 있다.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

일제에 의해 섬이 망가진 흔적이 남은 곳은 여기뿐이 아니다. 제주 섬 어디서도 예사로 찾을 수 있는 오름마다, 흉측하게 입을 벌린 땅굴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낮에도 암흑으로 빗장 쳐진 갱도의 입구. 캄캄한 어둠 때문에 발을 들여놓기가 두려워지는 이 굴들은 일본군의 대포와 진지가 자리 잡았던 곳이다. 이것은 으레 생각하듯 화산활동으로 인한 자연의 신비가 작용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모질게 내리쳐 감기는 채찍을 온몸으로 받아가며 제주 사람들이 한 삽씩 떠내어 파 내려간 자국이다. 특히나 가마오름의 지하요새는 총연장이 2km에 달하고 계단식으로 뚫린 3층 구조에 회의실, 숙소, 의무실 등의 공간까지 갖추어 놓았다고 하니, 굴착에 동원된 제주 민중들이 감내해야 할 노동의 세기가 얼마나 되었을지 헤아리기가 아득할 정도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제는 패색이 짙어지자 미군에 맞서 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해 국내외의 7군데 지역을 설정해 그곳을 거점으로 필사(必死)의 전투를 치르고자 하였다. 제주는 그 7군데 중 한 곳이었다. 이에 따라 온 섬은 요새화되었고 제주에는 7만 5천의 병력이 주둔하게 되었다. 일제는 죽음을 불사르며 발악하려 했으나 그 죽음은 압제자들만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곳곳에 땅굴을 파고 산등성이나 오름 정상에 토치카를 짓기 위해 사람들이 동원됐다. 산비탈의 밭뙈기에서 거둔 한 줌의 식량, 온갖 잠수병에 시달리면서 종일 물질하여 건져 올린 다만 몇 바구니의 해산물까지 이미 앗아간 일제는 끝내 그들의 몸뚱어리까지 자신들에게 바칠 것을 요구했다. 탐욕에 사로잡혀 무모하게 벌인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일제는 정말이지 모든 것을 수탈했다. 일본 열도 사수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던 제주는 전쟁이라는 엔진을 돌리기 위한 연료로 불살라졌다. 땅도, 바다도, 사람도.

상처는 시간이 흐르면 아문다. 그리고 더 많은 시간이 흐르면 그 흉터마저도 희미해진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어쨌건 삶도 계속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새살이 돋아도 그때의 아픈 기억은 살갗 밑에 고스란히 남는다. 누구도 불에 데거나, 날에 베인 기억을 쉽게 잊지는 못할 것이다. 신경세포체 하나하나가 그 기억을 새겨 담고 있는 까닭이다. 우거진 초록의 풀과 나무, 청명한 바다, 게다가 더해진 관광객들의 즐거운 재잘거림으로 미처 알아채지 못할 뿐, 제주의 돌, 제주의 바람, 제주의 마을에는 모두 그러한 신경세포가 남아 있다. 제주의 아름다움은, 그래서 때로 슬프다.

(글: 최성준 / 사진: 최성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