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소식

제목 자정의 베트남 <그림자 토크>
작성일자 2018-08-17

자정의 베트남 <그림자 토크>









오늘의 드레스 코드는 '군복'과 '워커'입니다. 사이공 맥주를 준비해두겠습니다.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그림자토크 밤 11시 스페이스99에서 뵙겠습니다.

모두들 궁금해했다. '밤 11시에 웬 토크?' '군복과 워커를 신고 평화를 말한다?' 재미 반, 호기심 반 삼삼오오 스페이스99로 모인 사람은 대략 서른 명 정도. 제천, 부천, 인천, 구리 멀리서 오셨는데, 여러분 행사가 끝나고 이 새벽 어떻게 가시렵니까? 사회자 또한 모인 사람들이 궁금하다.

자시. 인간의 영혼이 현실로부터 이탈해 있는 시간. 상념이 많아지는 시간. 이재갑 작가 사진속에 계신 몇 천 명의 희생자가 사진속에서 나와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리라. "11시에 만나는 것, 돌아가신 분들을 생각하자는 거죠. 굳이 말하자면 제사같은 것!" 서해성 작가의 말이다.

평소 입지 않은 야상을 툭툭 털어 걸치고 온 분, 워커와 가방를 포함해 깔맞춤으로 일습을 갖춘 분, 엄마가 빨아서 다림질하고 피존까지 해 주신 예비군복(그러나 지금은 몸이 불어 맞지 않는)을 들고 온 청년. 근데 왜 군복을 입고오라 하셨어요?

기억은 위험하다. 기억은 우리 안에서 어떤 일을 하는가. 그리고 기억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군복'과 참전기념탑의 기억, 위령비와 전쟁피해자의 기억이 베트남전 종전 40년이 되는 그 날, 2015년 4월 30일 자시, 스페이스99에서 만나고 있다. 사이공 맥주를 사이에 두고.


 “이재갑 작가가 주모가 되어 맥주를 한 잔씩 드리는 편한 자리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사진에 대해서 평소에 생각하던 이야기를 하시면 되고 무엇보다도 베트남이란 어떤 곳인가에 대해서 윤영전 선생님(베트남전 참전군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좋겠습니다.”

서해성 전시기획자의 여는 말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재갑 작가는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며 자신이 사진을 찍는 대상, 앞으로 해 나갈 작업 등에 대해 이야기 했다. “제 작업은 절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제가 만난 사람들은 모두 상처받고 아프고 힘들지만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통해 저는 삶과 희망을 봅니다. 이번 전시회는 내가 지금까지 보여준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입니다. 전혀 다른 방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가장 큰 이유는 제가 이를 통해 저에게 온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장치를 만들고 나의 작업 과정을 보여주고 또 앞으로 내가 해야 할 부분을 스스로 찾을 수 있게 묵시적인 메시지를 넣는 것. 이번 작업을 통해 저에게 주어진 숙제는 또 많아졌지만 그것은 내가 앞으로 해 나가야 할 작업에 대해 길잡이가 되어줄 것입니다.“

베트남전 참전군인 윤영전 선생님은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 이라고 쓴 붓글씨를 전달하며 사이공 맥주, 바나나 이야기 등 베트남 전쟁에서 있었던 일을 생생히 전달해 색다른 이야기장을 만들어 주었다. “1964년 12월 16일에 교관 18명이 (베트남에) 왔고 최초로 600명이 2주에 걸쳐 65년 2월 12일에 도착했습니다. 최초 도착한 600명과, 3월 28일 마지막 대원 2,000명이 사이공에서 약 25km 떨어진 ‘디안’이라는 곳에 주둔지를 가지고 한국 건설지원단이라는 이름으로 일했습니다. 실제로는 비정기부대인 셈입니다. 우리는 민간인들이 사는 곳에 가지 말라는 지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국에서 매우 비쌌던 바나나와 지금 이 앞에 놓인 사이공 맥주를 먹으러 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홍구 교수는 베트남전 종전 40주년, 베트남 통일 40년을 맞아 전시회 준비부터 민간인 학살 피해자 두 분을 최초로 초청하기까지의 남다른 감회를 전했다. “우여곡절 끝에 전시가 열렸습니다. 이쪽에 걸린 사진들(증오비, 위령비)은 한국 사람들이 봐야 할 것, 저 쪽 한국에서 세운 참전 기념비는 베트남 사람이 봐야 할 것들입니다. 기억은 이렇게 다르게 전개되었습니다.”


 

1. 행사 시작이 11시인 이유

한 참가자가 물었다. “왜 하필 11시인가요? 제가 오면서 생각하기로는... ‘오늘 하루도 무사히 넘기고 있구나’ 하며 지내는 시간의 경계를 11시로 잡은 것인지, 혹은 ‘우리가 함께 하루의 경계를 넘어보자’는 의미였을지”

서해성 작가가 답했다.

“옛날부터 어른들은 자시에 귀신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자시를 향해가는 11시는 인간의 영혼이 현실로부터 가장 이탈해 있는 시간입니다. 이 행사에 참석하신 분들이 어떤 마음을 가졌든, 돌아가신 분들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바로 11시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제사인거죠. 그런 뜻에서 열한시에 만나보자고 했습니다. 전시장에서 함께 하루를 넘겨보자는 의미이기도 하고, 또 말씀하신 것처럼, 저 당시에 있었을 사람들이 12시 즈음에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냈구나’ 하는 그 기준의 시간이 될 것이기도 하고요.”

2. 죽음을 기억하는 방식에 대하여

이재갑 작가는 7년간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과 만나고 추모비, 증오비, 위령비를 찍으면서 한국과 베트남이 죽음을 기억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 인상 깊었다고 전한다. “한국과 베트남은 같은 전쟁을 겪더라도 추모하는 방식이나 죽음을 기억하는 방식이 현저히 다릅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숨을 쉴 수 있도록 완전히 덮지 않고 숨구멍을 만들어놓습니다. 늘 내 주변에 살아있다고 생각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일 나갈 때 절하고 들어올 때에 절하고. 그런 측면에서 베트남 사람들이 남조선군대(한국군)을 가장 증오하는 부분이 학살 후 시신을 찾아가지 못하게 지키고 서 있다가 다음날에 그 현장을 불도저로 밀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죽음은 적어도 시신이라도 찾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또 그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윤영전 선생님이 ‘베트콩’이야기를 더했다. “17도 선에서 남북한이 전쟁을 하는 와중에 베트콩 소탕작전이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이 친구들이 가서 민간인들을 보고 베트콩의 첩자라고 하며 살상을 해버렸습니다. 전투와 전투로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민간인을 베트콩 첩자라는 이름아래, 그리고 또 ‘베트콩 첩자에게 정보를 줘서 우리 아군을 죽였다’는 이유로 민간인을 끔찍하게 살상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의 동지가 죽었으니 나는 억울하다 하는 거죠. 어쨌든 월남전이 다른 전쟁들과도 달랐던 것은, 베트콩과 민병대, 월맹 정기군과 월남 정기군의 싸움이 각기 다르니까 누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규정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한홍구 교수는 이에 이렇게 답한다. “ ‘옷을 입지 않아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민간인들을 모두 다 죽였다)’라는 이야기를 우리 독립군, 의병들에 대입해 생각해봅시다. 의병들이 군복을 입고 항일 투쟁했나요? 나중에 독립군의 극히 일부, 100명 중의 한 두 명만이 군복을 입었을 것입니다. 베트남의 입장에서는 미국도 한국도 모두 베트남의 침략자일 뿐인데 모든 사람들이 그들에게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그 상황에서, 피아 구분이 되지 않은 것이 민간인 학살의 이유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저 학살을 합리화하는 것일 뿐입니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민간인이 우리를 죽였다고 주장하며 군대의 이름으로 자율권을 행사했다는 말도 모순입니다.”

3. 역사 속 우리

사진은 각자의 기억 속에 다른 인상을 갖는다.

“앉아서 이야기를 들으며 수많은 증오비와 위령비, 그리고 상처 입은 할머니, 아주머니 사진을 보니 우리 할머니가 떠올랐습니다. 저희 할머니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본에서 살다가 29세 때, 할아버지가 일본에서 총을 맞아 돌아가셔서 한국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 때부터 혼자 일 하면서 자식들을 키웠는데 그 선한 얼굴이 저기 걸린 할머니의 표정이네요. “저는 청계천 철거민 출신입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아버지와 형제들이 서울 청계천에 와서 살았습니다. 제 세대도 역사의 피해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입니다.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해 글을 읽으면서 불편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국가적인 사죄를 하더라도 그 당시에 참여했던 군인들도 가서 단체로 사과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이렇게 비뚤어진 역사 속에 있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마음이 착잡합니다.”

이에 윤영전 선생님은 역사적 인식과 그 이후 사과가 얼마나 어려운 지 덧붙인다. 역사의 모든 결과를 부둥켜안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단순한 살아냄 뿐만이 아니라 제대로 된 역사인식, 그리고 그에 대한 대처일 것이다. 내가 속한 시공간, 그리고 그것이 어디에 어떻게 작동하고 위치하고 있는지, 그것이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위해서는 올바른 역사인식이 필요하고 우리에게 남겨진 어떠한 책무 등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10년 동안 33만 명이 베트남에 다녀왔습니다. 거기에서 돌아가신 분이 제가 파악하기로 5860명입니다. 한 해도 되지 않아 영문도 없이 지하 땅굴전이니 무슨 전이니 하며 무리한 작전으로 3500명이 몽땅 죽었습니다. 당시에는 한국도 어떻게 보면 미국의 용병으로 온 것이라는 생각이 컸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은 참전했다는 자체를 어떤 위세로 생각합니다. 그들 말로 ‘베트콩’ 하나 잡아서 훈장 단 사람들은 그것을 아주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죽어간 동지들을 떠올리며, 자신들이 억울하게 당했다고 생각해요. 거의 모두가 자기가 베트콩을 몇 명 죽였다 어떻게 죽였다 말하면서 자랑스러워하지 우리나라 전쟁도 아닌 곳에 가서 그런 일을 한 것에 대해서 뉘우치는 사람이 아주 적습니다. 역사인식이 너무나도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인 인식과 사과는 참 어렵습니다.” 윤영전 선생님은 이렇게 덧붙인다.

4. “기억”의 성장

‘기억’. ‘기억’은 어떤 형태를 띠고 있을까. 또 우리에게 ‘전쟁의 기억’은 무엇일까.

“미국에서는 한국전쟁이 ‘forgotten war(잊혀진 전쟁)’입니다. 한국에서는 베트남전쟁이 그렇습니다. 베트남 전쟁이 우리나라에 알려지기 시작한 건 한국 고엽제 피해자들에 의해서입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고엽제 피해자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이 알려지면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문제도 밝혀진 겁니다. 베트남에 다녀온 사람 32~33만 명 정도에서 민간인 학살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사람은 약 5000명 정도가 될 것입니다. 대다수의 베트남 참전군인들과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학살 문제를 몰랐다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왜냐면 제가 국민학생 시절이었던 그 당시에도 한국에서 그 이야기를 ‘무용담’으로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전쟁이 무서운 이유는 전쟁이 아주 짧더라도 그것이 온 삶을 지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참전군인들은 이번 평화박물관 행사 때문에 10여년 만에 처음으로 그렇게 대규모로 모였습니다. 그 분들은 젊었을 적의 기억을 가지고 자랑스러워하면서, '나는 그랬어!', '베트남전으로 한국이 경제발전 했어!' 라고 말하며 칭찬받고 싶은데 그들에 의해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 문제가 계속해서 불거지고 또 그 증인들이 한국에 최초로 초청되니 위기를 느끼는 겁니다. 베트남 전쟁은 역사적으로 침략전쟁입니다. 그 전쟁을 주도했던 미국에서조차도 베트남전을 잘못된 전쟁으로 평가하는데 단 한 곳, 한국에서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참전군인들도 국가가 불러서 베트남에 가긴 갔지만 자기들이 왜 갔는지에 대해서 스스로도 정리를 못합니다."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베트남 전쟁에 대한 기억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국가적으로 전쟁에 대한 성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억이 성숙하지 않는 한, 우리는 역사적인 책무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 서해성 작가의 지적이다.

“이 분들은 전쟁의 기억에서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모든 부분에서는 틀림없는 어른인데, 자기 자신은 전쟁을 치르고 온 그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 무용담의 주인공인 것입니다. 한국군이 죽인 베트남 사람 숫자는 다녀온 분들의 이야기 속에서만 이미 천만 명이 넘습니다. 어젯밤에 설치한 지뢰에 몇 명이 죽었다든지, 내가 몇 천 명을 죽였다든지, 그런 방식으로 말입니다. 용감하고 대단했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 경제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는 것은 국가가 만들어 낸 이데올로기입니다. 그것으로 자기 자신을 재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가 계속 주입하는 그 기득권의 기억을 내재화 하면서, 나의 기억을 버리고 내가 했던 일을 잊으며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죄의식을 지우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그 부분에 대한 기억은 성장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전쟁의 기억을 성숙시키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문제입니다.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도 그렇습니다. 베트남 전쟁은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질만한 과거가 되었는데도(시간적으로) 이 분들의 기억은 여전히 68년 그 날에 멈춰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성숙한 기억, 기억에 대한 성찰은 이제 다시 시작되었다. 사진전<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은 서울에 이어 의정부, 대구, 부산 등지에서 순회전을 가질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