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연구

번호 83
제목 한국형 과거청산의 특수성과 화해... (한홍구 토론문)
2008 9월 18 - 18:06 익명 사용자

[서경식과의 대화] 2008.09.05(목) 성공회대
 
한국형 과거청산의 특수성과 화해, 그리고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 
한홍구 (성공회대ㆍ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화해는 참 좋은 말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화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사람들은 왜 용서하지 못하고, 화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요즘 화해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면서 나타난 우려할만한 경향이 하나 있다. 그것은 화해를 거부하는 피해자의 옹졸함, 편협함에 대한 비판이다. 왜 피해자들은 화해를 거부하는 것일까? 이 토론문은, 한국사회가 밟아온 과거청산의 맥락 속에서 화해의 문제에 대한 몇 가지 단편적인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

전직 대통령을 두 명씩이나 감옥에 보내본 한국은 잘못된 과거를 많이 청산한 나라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의 과거청산은 과거와의 확실한 단절 속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다.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보낸 것도 사실은, 면죄부를 주기 위한 절차였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일본을 보고 가해자가 반성도 사죄도 하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반민족적인 친일행위에 대하여, 그 엄청난 민간인 학살에 대하여, 그리고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일상적으로 자행된 고문에 대하여 가해자가 잘못을 인정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거의 없다. 한국에서 가해자는 과거의 잘못과 국가폭력을 인정하지도 않고, 반성하지도 않고, 고백하지도 않고, 사죄하지도 않고, 용서를 구하지도 않고, 오히려 무엇이 잘못되었냐고 눈을 부라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는 가해자와 화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화해라고 하면 보통, 피해자와 가해자의 화해를 떠올린다. 그러나 이 화해는, 화해의 마지막 심급에 해당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화해를 떠올리기에 앞서 우리가 고민해봐야 할 화해는 다양한 차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직접 목격하게 된 당혹스러운 사실은 ’과거사‘라는 것이, 같은 피해자 사이에서도 엄청난 원망과 갈등을 낳는다는 점이었다. 어느 조작 간첩 사건 피해자들을 면담할 때의 일이다. 사건의 핵심 관련자를 통해서 그의 가까운 친척으로 사건의 공범으로 기소된 부부를 같이 찾아간 일이 있다. 어딘가 분위기가 어색했다. 알고 보니 그들은, 25년 전 법정에서 헤어지고 처음 만난 것이었다. 내가 처음 만난 핵심 관련자의 아버지는 월북한 공산주의자였는데, 그가 1960년 4ㆍ19 직후에 서울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위의 부부의 집에 머물며 부인과 딸을 거기서 만났다. 22년이 지난 후, 이 일이 일가 간첩단 사건으로 둔갑한 것이다. 자리보전을 하고 있던 두 부부가 그 안기부 지하실에서 있었던 일을 낮은 목소리로 고통스럽게 풀어나갔다. 채 5분도 못 되어, 나를 안내해서 간 핵심 관련자는 방바닥을 떼굴떼굴 구르기 시작했다. “아저씨, 미안해. 아줌마, 미안해. 우리 아버지가 죽일 놈이야. 왜 내려와서 왜 하필 아저씨 집에서 우리를 불렀어... 미안해... 미안해.” 반신불수의 아저씨는 허허 웃으며 천장만 바라보았다. 그때 46년 전 갓 시집 온 새댁이었던 아줌마는 불편한 몸으로 한 뼘쯤 몸을 가누지 못하며 울고 있는 조카에게 다가앉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00아, 00아, 네가 무슨 죄가 있니” 한참 조카를 바라보더니 아주머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네가 고문당하며 지르는 소리를 듣다가 내가 까무러쳤어, 네가 무슨 죄가 있니” 이게 화해였다. 나는 그저 피해자들은 다 하나가 되어 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원하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가까운 친척 사이였던 피해자들은 지척에 살면서도 그들의 삶을 갈갈이 찢어놓은 엄청난 사건의 트라우마 때문에 연락 한 번 해 볼 생각을 못하고 살았던 것이다. 이제 와서 안기부의 후신인 국정원이 사건을 재조사한다고 하니까 용기를 내서 우리와 동행한다는 명목으로 아저씨, 아주머니를 찾아온 것이다. 피해자끼리의 화해도 이렇게 쉽지 않았다.

인혁당 사건이라는 게 있었다. 공안당국에 따르면, 간첩이 내려와 인혁당을 조직했다고 했다. 국정원 과거사위에서 이 사건을 조사해보니, 아닌 게 아니라 간첩이 연루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간첩은 남파 간첩이 아니고, 남쪽의 정보기관이 보내는 북파 공작원이었다. 그런데도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이 사형을 당했다.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고, 18시간 만이었다. 남편이 끌려간 뒤 한 번도 면회를 하지 못했던 가족들은, 형이 확정되었으니 이제 면회가 되겠지 하며 다음날 서대문 교도소로 갔다가, 청천벽력 같은 사형소식을 들었다. 형이 확정되고 18시간 만의 일이었다. 사건을 조사하러 대구에 내려갔을 때, 사형당한 분의 아들을 한 사람 만났다. 나하고 동갑이었다. 통성명을 하고 악수를 하는데, 동갑이라는 말에 숨이 콱 막혔다. 사건이 나던 해에 중3, 아버지가 처형당하던 해에 고1이었다. 나는 그날 하굣길에 무슨 일인지는 몰랐지만 경찰이 깔려있던 서대문 형무소 앞을 지나간 적이 있다. 그가 잘 자라 성인이 돼 준 게 고마웠다. 그래도 그는 그때 철이 들 나이, 중3이었다. 세상이 어수선하면, 사람은 빨리 철이 드는 법이다. 그래도 4살이란 너무 어린 나이였다. 사형당한 또 다른 이의 막내가 그때 4살이었다. 아버지 얼굴도 제대로 기억 못할 나이에 그는 빨갱이 새끼, 간첩 자식이 되어버렸다. 인혁당 관련자들이 비명에 가고 얼마 안 되어 월남이 ‘패망’했다. 우리 사회는 그 무렵, 자고 깨면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공산당! 무찌르자, 북괴군! 이룩하자, 유신과업!”을 목이 터져라 외쳤다. 4살짜리 꼬마는 간첩의 새끼로 그 시절을 살아내야 했다. 같이 놀던 동네 형아들은 4살짜리를 새끼줄로 나무에다 묶어놓고 간첩 새끼라고 총살시키는 놀이를 했다. 동네 형아들이라고 해봤자 7~8살이었다. 그때 그 아이들이 4살짜리 간첩 새끼를 나무에 붙들어 매고 사형시킨 놀이를 했다고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때는 그런 세상이었으니까. 그러나 30여 년이 지난 지금, 인혁당 사건이 조작이었음이 밝혀지고 처형당한 이들이 억울하게 가족들과 생이별 당한 사실을 우리 사회가 알게 되었다면 그 시절 빨갱이를 잡아냈다고, 다행이라고 여겼던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그 형아들은 4살짜리였던 꼬마에게 찾아가 말없이 손이라도 잡아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사실 우리들은 그 골목에 살지 않았을 뿐이지, 그 동네 형아들과 얼마나 달랐던 걸까? 과거청산 작업에서 우리가 맞닥뜨리게 되는 화해에는 이런 화해도 있는 것이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화해, 또는 피해자끼리의 화해만이 아니라 이런 화해도 있는 것이다. 이것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피해자와 구경꾼이었던 우리들과의 화해, 그 험한 세월을 같이 살아 온 우리는 화해의 구경꾼이 아니라 당사자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배제했던 그들. 그들은 우리와의 화해를 진정코 바라고 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화해에 앞서, 우리는 부당한 국가폭력의 피해자가 우리사회의 정당한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피해자가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국가폭력에 의해 치명적인 피해를 당한 사람들에게 원상회복이란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최소한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것은 동시대인들의 인간된 도리이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화해는, 그 다음 일이다.

나는 과거청산 작업에 깊이 참여했던 경험 속에서 조금이지만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에 대해서 생각해 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화해를 원한다. 화해란 참 좋은 것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화해를 원한다는 사실은 꼭 탓할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누구는 화해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일까? 가해자가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무엇이 잘못되었느냐고 윽박지른다면, 피해자와 가해자의 화해를 위한 전제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들에게 화해를 강요한다는 것은, 참으로 커다란 폭력이 아닐 수 없다.

1999년 9월, 한국사회는 베트남에서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라는 당혹스러운 사실과 대면하게 되었다. 한국의 일부 시민단체들은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사죄를 목표로 베트남 진실위원회를 결성했고, 나도 이 단체의 말석에 참여했다. 진실위원회의 초창기에 우리는 베트남과의 화해를 우리의 목표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화해’라는 말은 가해국가인 한국 사람들이 먼저 꺼낼 수 있는 말은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해야 할 몫은 왜 그런 비극적인 일이 발생했는지에 대한 진상규명과 그에 대한 사과, 그리고 합당한 배상이었다. 화해는 우리의 몫이 아니었다. 우리의 몫은 용서를 구하는 사죄일 뿐이었다. 물론 우리는, 베트남 사람들과의 화해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화해는 피해자인 베트남 사람들의 몫이었다. 우리의 사과가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우리를 용서하고 화해의 손을 내민다면, 우리는 고맙게 그 손을 잡으면 된다. 우리가 사과를 해도 그들의 마음이 풀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거 한국군이 저질렀던 비극의 무게를 다시 한 번 곱씹으면서 우리의 부족함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화해와 처벌을 대립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처벌과 대립되는 개념은 불처벌(impunity)이거나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복이지, 화해가 아니다. 처벌과 화해는 오히려 상호보완적인 개념이다. 피해자와 구경꾼이었던 시민들의 화해를 위해서는 처벌 - 회복의 정의 - 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보복을 바라지 않는다. 보복은 끊임없는 보복의 악순환을 부를 뿐이다. 우리가 피해자에게 보복을 하지 말라고 말릴 때, 그 정당성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 그저 참으라고? 아니다. 너는 보복하지 마라, 우리가, 사회가 그를 처벌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우리는 보복만은 안 된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사적인 보복과 공적인 처벌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회복의 정의로서의 처벌은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국가폭력의 피해자와 화해하는 전제조건을 이룬다.

한국사회는 과거청산에서 처벌을 너무 쉽게 포기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는 했다, “우리는 누구를 처벌하자는 게 아니야. 우리는 다만 진실을 밝히고자 할 뿐이야”라고. 그러나 이 말은 우리 스스로를 ‘불처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처절한 자기기만일 뿐이었다. 처벌이 포기된 곳에서는 진실규명도 이뤄질 수 없었다.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국가폭력의 하수인들은 묻혀진 진실을 스스로 털어놓지 않는다. 고문의 당사자로 지목되어 자신이 처벌받아야 할 상황에서 “그들은 나는 아무 죄도 없어요,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라며 국가폭력의 구조와 지휘체계에 대해 털어놓는다. 처벌이 포기된 곳에는 ‘부인’만이 넘쳐날 뿐이다.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을 행사하면서, 화해를 하지 못하는 속 좁은 피해자들을 점잖게 꾸짖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점잖은 사람들 보다 몇 백 배 진정한 화해를 원하는 사람들은 바로 피해자들이다. 진정한 화해는 그들에게 그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들을 수십 년 동안 짓눌러 온 고통에 대한 치료약이다. 그들은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화해를 원한다. 간절히 원한다. 다만, 화해를 구걸하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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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자 2018-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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