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연구

번호 139
제목 희망의 인문학을 마치고

2011 10월 30 - 15:29 익명 사용자

“올해는 ‘희망의 인문학’ 강의 할 거죠?” 평화박물관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김영환 씨가 작년에 이어, 아니 재작년부터 물어왔었다. “아니요, 내년에는 꼭 할게요. 아직 마음에 준비가 안돼서. 그리고 강의안 준비도 하려면 시간을 내야 하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고...” 온갖 핑계로 도망다니다 결국 붙들리고 만 셈이다.

‘어떤 분들이 강의를 들으시려나’ 일단 수강자들의 대부분은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으실테고, 무엇보다 인생의 경험으로 보면 나는 아직 채 알도 깨고 나오지 않은 미숙아라는 생각이 스스로 주눅들게 만들었다.

잠깐, 내가 평화박물관에서 하고 있는 일을 소개하겠다. 나는 3년째 국가폭력에 의한 트라우마힐링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주로 집단상담에 의한 심리치료, 미술치료, 강좌, 인터뷰를 통한 구술집 제작 등을 진행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만난 분들은 원폭피해자 2세, 매향리 미군사격장 주민, 조작간첩 사건에 의한 고문피해자, 518 피해자 등 대부분이 나보다 인생을 훨씬 오래 사시고, 극한의 상황을 견디다 살아남으신 분들이다. 그분들께는 심리치료를 위해 왔다고 해놓곤 난 항상 배우고, 감동하고, 작아져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래서 이번 강의도 내 작은 지식이 그 분들의 큰 지혜 앞에 우스꽝스러워지지나 않으려나 덜컥 겁부터 먹었던 거였다. “그래, 해보자.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정보를 그분들이 주실 따뜻한 에너지로 맞바꾼다면 나로서는 감사할 따름인거지”

내 수업은 역사 부분이다. 고통의 역사, 트라우마. 정신과적 용어 ‘PTSD’의 또 다른 말 트라우마의 심리학적 계보와 일상에서의 정신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수강생들의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로 나누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수업을 하는 내내 앞에 앉아 계신 여성분이 울고 계시는 거다. 강의를 하면서 계속 신경이 쓰이는데 모른 척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왜 우시냐고 말하기도 그래서 안절부절 정신없이 강의를 얼른 마치고 다가가 “괜찮으세요?” 하고 물었다. “선생님, 우울증 약 오래 먹어도 괜찮나요? 벌써 1년 넘게 먹고 있는데요.” “너무 오래 먹는 건 좋지 않죠. 혹 심리상담은 받아보셨나요?” “여러 번 받았고, 상담을 받는 동안에는 좀 좋아지긴 하는데, 상담비도 비싸고 해서 계속 받을 수도 없구요. 혹시 선생님께 미술치료를 받을 수 있을까요?” 심각한 우울증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 조금 망설여졌지만, 그럼 찾아오시라고 날짜와 연락처를 전해 드렸다. 그리고 약속한 날 기다리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선생님 죄송해요. 용기가 안 나네요. 제 마음이 바뀌면 그때 전화드려도 되나요?” 안쓰러웠다. 남편과 사별한 이후 내내 이래 왔다는데...

트라우마 수업에서는 단지 지식 전달이 아닌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느끼고 표현할 시간들도 함께 가졌다. 그래서인지 트라우마 수업을 하는 센터마다 이런 분들이 꼭 한 분 이상씩은 있는 거다. 그런 만남을 갖고 나면 나도 먹먹해지고 그 이상 도와드릴 수 없는 미안함을 남기고 자리를 떠야했다.

한 번은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그림으로 그리기로 했다. 눈에 띄는 그림이 보였다. 남자 분이었는데, 연필의 강한 터치로 한 남성을 아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누군가요?” 아주 열심히 심혈을 기울여 그리고 계셨다. “제가 두만강 건널 때 함께 나온 남자예요. 저도 그때 처음 봤어요.” 억양이 북한 말이다. ‘아, 탈북자시구나’ “두만강을 건너면서 그 남자는 아내와 어머니를 잃었어요. 두 사람이 강물에 휩쓸려가는 바람에... 중국에 도착했을 때 이 사람의 울부짖음을 잊을 수가 없어요. 분명 남한으로 오긴 왔을 텐데. 만나보고 싶어서 찾아봤지만 그 이후 못 만났어요. 한번은 꼭 보고 싶어요.” 그림 속 남자의 눈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분노와 절망의 뒤엉킴. 그냥 잘 그린 그림으로 지나치기에는 뭔가 압도하는 강한 영적 힘을 느끼게 했다.

돌이켜 보면 놀랍다,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고 난 자리에 파란 새싹이 돋기를 희망하는 이 분들이. 존경스럽다, 상처의 자리를 스스로 치유하기 위해 자신의 붕대로 곱게 휘감고 기다릴 줄 아는 이 분들의 힘이.



활동가 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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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자 2018-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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