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간첩 자식 '낙인'으로 짓이겨진 세월…고통 '대물림'

기사입력 2019.07.04. 오전 5:01

[분단이 만들어낸 시대의 아픔 '납북어부' ②]

'간첩 자식'으로 떠안은 피해…경제활동과 학업 '제동'

고문당해 만신창이 된 아버지를 바라보는 마음 '비통함'

피해자 가족 "하루빨리 명예회복과 피해보상 이뤄지길"

[강원영동CBS 유선희 기자]

남북 분단은 선량한 시민들을 무고한 피해자로 만들었다. 체제 선전·유지를 위해 누구든 '간첩'으로 둔갑시킬 수 있었던 시대였다. 바다에서 조업하던 어부들은 그 직접적인 피해자였다. 강원영동CBS는 간첩 조작사건으로 지금까지도 후유증과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피해자들과 가족들의 실상을 들여다보고, 한단계 도약하고 있는 남북관계 시대에 우리가 풀어가야 할 과제는 무엇인지 짚어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개보다도 못한 인간 취급"…아물지 않는 '그날'의 기억

② 간첩 자식 '낙인'으로 짓이겨진 세월… 고통 '대물림'

(계속)

지난 2005년 납북자가족모임에 의해 입수돼 국내 언론에 공개된 사진으로, 서해안에서 납북됐다가 돌아오지 못한 어부 37명이 1974년 묘향산에서 단체로 사진을 촬영한 모습이다. (사진=속초문화원 제공)

납북어부 피해자들의 고통은 당사자에서 그치지 않고 가족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함께 떠안아야 했다는 데서 또 다른 문제가 시작됐다.

◇ '간첩 자식'으로 떠안은 피해…경제활동과 학업 '제동'

김창권(70. 강원 속초)씨의 아버지 故 김봉호(당시 51살)씨가 탄 멸치잡이 배는 지난 1971년 6월 북한에 납치됐다. 여느 납북어부들처럼 김씨 아버지도 1년 만에 무사히 남한으로 돌아왔지만, 이내 간첩혐의로 내몰려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다.

간첩 자식이라는 '낙인'은 그렇게 짓이겨 새겨졌다. 김씨는 아버지가 북한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보안대에 두 번이나 끌려가야 했고, 원하는 일자리도 번번이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쉽게 말해서 '빨갱이'잖아요. 그 당시만 해도 반공법이 컸으니까.. 신원조회를 하면 아버지가 북한에 다녀왔다는 사실이 다 나오는 거예요. 직장 다닐 생각은 하지도 못하는 거죠. 한 번은 전남 순천에서 기차 판매원을 하던 외삼촌이 판매원 업무를 소개해줬거든요. 일하기로 다 이야기가 됐는데 신원조회에 걸려 못 들어갔어요."

김창권(70)씨가 아버지 영정사진을 보고 있고, 그 옆에 김씨의 어머니도 사진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사진=유선희 기자/자료사진)

김씨는 아버지 사건 이후 바다는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지만, 직장을 잡지 못하자 결국 생계를 위해 다시 배에 올라야 했다.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망가진 데다 주변 시선 탓에 조업에 나설 수 없게 된 아버지를 대신해 7남매 중 맏이인 김씨와 그의 어머니가 가족 생계를 책임졌다.

살림은 늘 쪼들렸고 그저 먹고사는 데 급급한 남루한 세월이었다.

김씨의 아버지와 함께 배에 승선했던 故 강재봉(당시 52살)씨의 아들 강준기(70. 강원 속초)씨 생활도 김씨와 크게 다르지 않다.

"먹고 살려면 아무거라도 해야죠. 저는 그냥 노가다 뛰었어요. 제재 안 받는 막노동. 밑으로 여동생 2명이 있었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학교도 잘 못 다녔어요. 그 당시만 해도 '사친회비(학교 운영 위해 학부모들이 일정하게 내는 돈)'를 안 내면 집으로 돌려보냈거든요. 근데 집에 오면 뭐합니까? 돈이 없는데.. 결국 학교도 못 가는 거죠."

◇ 고문당해 만신창이 된 아버지를 바라보는 마음 '비통'

강준기(70)씨가 집 앞에서 동네를 바라보고 있다. (사진=유선희 기자/자료사진)

경제활동은 물론 학업도 힘든 '고통의 굴레' 속에서 가족들은 무엇보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아버지를 보는 일이 가장 비통했다고 토로했다.

강준기씨는 "하루는 아버지를 면회하러 갔는데, 첫날에 멀쩡하던 아버지 얼굴이 둘째 날에는 상처가 나 있었다"며 "누가 봐도 때려서 난 상처로 보여 따져 물으니 아버지는 말이 없고, 경찰들은 아니라고 발뺌하고... 그때 그 심정은 한 마디로 찢어졌다"고 울먹였다.

"우리 아버지는 정말 좋으신 분이셨거든요. 그런데 고문에 그만 귀가 먹고 벙어리가 되셨어요. 마지막에 돌아가실 때 분명 어떤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것 같은데 말을 못 하니까... 말도 못 하고 그냥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무슨 한이 있는지 다른 분들은 눈 감고 죽는데 우리 아버지는 눈을 뜨더라니까요? 정말 그때만 생각하면 이가 갈려요."

그저 아버지를 조용히 보내드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강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마침내 참았던 굵은 눈물을 떨궜다.

김창권(70)씨가 진실규명 재심 지원활동 자료를 꼼꼼하게 읽고 있다. (사진=유선희 기자/자료사진)

한편 김창권씨가 기억하는 노년의 아버지는 술로 진통을 견디던 뒷모습이다. 누구보다 건강했던 아버지가 모진 고문 이후 술에 의존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낯선 장면이었다.

"언젠가 여름에 아버지가 낮잠을 주무시는데 끙끙 앓아요. 아버지는 진통 못 느끼려고 그냥 술을 드시는 거예요. 약을 먹으려고 해도 돈이 없으니까 술이 진통제.. 그러니 저는 그냥 조금 잡수시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죠. 그걸 보는 자식들 마음, 그 서러움은 정말 말로 표현 못 해요."

◇ 피해자 가족 "하루빨리 명예회복과 피해보상 이뤄지길"

납북자 현황. (사진=통일부 자료 발췌)

48년이 흐른 지금, 故 김봉호씨와 故 강재봉씨에게 씌워진 '간첩혐의 덫'은 아직 그대로다. 당시 상황을 증언해줄 수 있는 당사자가 작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무죄를 입증하는 일은 더 어려워졌다.

통일부에 따르면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 이후 발생한 납북자는 모두 3835명으로 이 중 3319명이 귀환했다. 또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결과에 따르면 납북자 중 1327명이 반공법과 수산업법으로 처벌됐다. 이 가운데 900명이 실형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후 진실규명으로 재심을 신청해 무죄를 선고받은 사건은 고작 40건에 그쳤다. 이마저도 24건은 국가기관 도움 없이 자체적으로 재심을 신청해 얻어낸 결과다.

현재 김창권씨 등은 개별적으로 증거를 취합하며 재심 신청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하루빨리 진실이 규명돼야 아버지의 명예가 회복되고 가족들이 겪은 피해도 조금이나마 보상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은 '고통의 대물림'을 끊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특히 납북어부 피해자 가족 중에는 고령인 분들도 많아 가족들은 하루빨리 국가가 나서서 과거사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yu@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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