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연구

번호 237
제목 [답사] 박물관 답사 제2탄! 첫번째, 박찬희 선생님과 함께 한 안중근의사기념관

아는 만큼 보인다”_강의와 함께하는 근현대 박물관 답사

 

2019511일 토요일

박찬희 선생님과 함께 한 안중근의사기념관

 

지난 2월에 진행된 박물관 답사프로그램에 많은 관심과 참여로 다시 한 번 준비하였습니다.

전 호림박물관 학예사이신 박찬희 선생님과 안중근의사기념관 앞에서 만났습니다.

   



2010년 새로 건립한 안중근의사기념관은 안내표시가 없어 많은 분께서 헤매셨습니다.

권위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기념관을 위로 높이지 않고, 아래로 내리는 방식으로 지은 이유는 남산의 자연경관을 그대로 살리기 위함입니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은 12명의 단지동맹을 상징하는 의미로 항공사진으로 보시면 기념관은 12 기둥 형태로 건물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건물외부에서 전시실의 출입구를 찾아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오면 안중근 의사의 유묵과 어록이 적혀있습니다.

출입구를 찾는 재미를 한번 느껴보시겠습니까?


    



입구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작품입니다.

뉴욕에서 활동 중인 세계적인 설치미술가 강익중 화백의 작품입니다. 손바닥만 한 캔버스에 안중근 의사의 어록이 적혀있습니다.

 




고개를 돌려보시면 자연채광을 받으면서 편안해 보이는 안중근 의사 동상이 있습니다.

그 뒤로는 태극기가 보이는데요, 하얼빈 의거 이전에 안중근 의사를 포함한 왼손 넷째 손가락 첫마디를 자른 11명의 단지동맹이 혈서로 대한독립 쓴 태극기입니다.

안중근 의사 동상이 있는 참배 홀은 건물 내부 어디서든 볼 수 있게 공간 구성을 해놓았습니다.

관람객이 전시실을 관람하고 나오시면서 다양한 각도에서 안중근의사를 보며 전시마다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길 바라는 의도라고 합니다.

 



1전시실부터 관람하였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출생과 성장에 관한 전시로 시대적인 상황인 강화도조약으로부터 굵직한 사건들을 배경으로 시작합니다.

안중근 의사는 황해도 해주에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가슴과 배에 일곱 개의 검은 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 하여 아명(兒名)을 응칠(應七)이라 하였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수백 명의 의군을 모아 의려소를 세우고 관군을 도와 동학군을 토벌하였는데, 2만 명의 대군과 대치하던 날 안중근 의사는 적의 경비가 허술함을 보고 6명의 동지들과 즉석에서 적진지에 기습 돌진하여 크게 교란하고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처럼 안중근 의사의 담대한 모습을 볼 수 있지만 행동을 신중히 하라는 의미로 안중근(安重根)으로 개명하였다고 합니다.





안중근 의사의 가문은 항일 독립운동의 명가(名家)15명이 독립운동의 공로로 서훈을 받았으며, 안중근 의사께서는 최고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이제 1층으로 올라가서 제2전시실에서 안중근 의사의 여러 활동에 대하여 보실까요? 

 




당시 황해도는 천주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안중근의 아버지가 성서의 교리를 깨우쳐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되었으며 가족들에게 적극적으로 포교함으로써 모든 가족 친지들이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습니다.

안중근의 도마는 그의 세례명인 토마스를 의미합니다.


 



안중근 의사는 만국공법과 인도주의에 따라 포로로 잡은 일본군 수 명 석방하였습니다.

그러나 풀려난 포로들에게 위치가 노출되어 일본군의 추격을 당하고 결국 패퇴하여 겨우 연해주로 귀환하였다고 자서전에 자세하게 쓰여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잘못했다. 아니다. 보다는 안중근 의사의 다양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전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2층의 제3전시실은 하얼빈 의거, 한중근의사의 법정투쟁, 옥중에서 남긴 글, 안중근의사의 순국 등 전시실이 구성되어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몰랐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로 추정되는 인물에게 총알 3발을 쏘고

혹시 다른 사람일지도 모르는 생각에 이토 일행 중의 일본인으로 보이는 3명에게 다시 3발을 쏘았습니다.

그때 사용한 총알을 보시면 십자가를 볼 수 있는데,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하지만, 단순히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보다는 총알을 맞았을 때 살상력을 높이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미조부치 검찰관으로부터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이토를 살해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안중근 의사는 15개 항목을 열거하며 심문하던 검찰관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외국인과 많은 신문기자 등이 방청객으로 빼곡히 들어찬 국제적인 관심이 쏠린 마지막 재판에서 안중근 의사는 내가 이토를 죽인 것은 한국독립전재의 한 부분이요, 또 내가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도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된 때문이다.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요,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행한 것이니, 만국공법(萬國公法)에 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고 의거의 성격을 당당하게 밝혔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선고 후 항소를 포기하고 옥중에서 자서전 안칠응역사동양 평화론을 저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끝내 앞부분만 집필하고 미완성으로 끝나버렸는데요,

공소를 포기하면 동양평화론을 집필할 시간을 주겠다던 고등법원장의 약속에도 안중근 의사의 사형집행에 대한 압박으로 1910326일 서른두 살의 나이로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셨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평화사상은 동양 평화론에 응축되어 있습니다. ··일 아시아 3국이 서로 협력하고 화합하여 동양은 물론 나아가 세계평화를 유지하는 데 온 힘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유언 같은 이 바램은 오늘날에도 뜻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봅니다.

 



안중근 의사의 시신은 우덕순 의사에게 시신 확인 후 가족들에게 시신을 인도하지 않고 일본인의 손에 의해 비밀리에 안장되었습니다.

가족에게 인도될 경우 안중근 의사의 묘소가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안중근 의사가 묻힌 곳은 베일에 가려져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효창공원에 가시면 묘비도, 비석도 없는 허묘가 있는데 이는 훗날 안중근 의사의 시신을 모시기 위함입니다.

 

 



마지막 전시물은 안중근 의사가 사형 집행 전에 쓴 최후의 유묵입니다.

안중근 의사 유묵을 건네받은 사람은 모두 일본인이였습니다. 뤼순 감옥의 간수, 사형수, 교사 등 일본인들까지 반하게 만든 안중근 의사의 인격과 정신, 그리고 사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여순감옥의 공판정을 오갈때마다 경호를 맡으면서 안중근 의사를 스승으로 받들던 일본군 간수에게 사행집형 전 마지막으로 글을 써 주었습니다.

위국헌신 군인본분 (爲國獻身 軍人本分) : 나라 위해 몸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이렇게 전시실이 끝나고 마지막 추모공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기념관에서 추모공간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안중근의사기념관의 마지막 추모공간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추모하고 나오시면 남산이 보이는 밝은 세상으로 나오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이날은 날씨가 좋아서 더욱더 그런 느낌을 주었습니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은 마지막까지도 반전이 있었는데요,

바로 안중근의사기념관이 세워진 이곳이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조선신궁을 만들어 천왕참배를 강요했던 장소였습니다.






후암동 신흥시장에서 다 함께 점심을 먹고, 후암동과 용산, 남영동을 돌아다니면서 곳곳에 숨어있는 일제강점기 시대의 역사적 이야기가 있는 곳을 만나보았습니다.


참가했던 분들께서는 나중에 지도를 찾아보시면서 다시 한 번 즐거운 역사여행을 하시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며 다음에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만나겠습니다.

더운 날씨에 6시간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첨부파일
작성일자 2019-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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