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연구

번호 162
제목 1968년 2월 25일, 학살의 그 날을 기억하라.

2012 3월 9 - 18:41 익명 사용자

팜 티 호아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아침. 한국에서 온 우리 일행의 마음을 아는 듯 잔뜩 흐린 날씨에 부슬비가 내리는 호이안의 아침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할머니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들을 맞아 주실까. 설레이는 마음도 없지 않지만 두려움이 앞선다. 평화박물관 회원들과 함께 떠나 온 베트남 평화기행의 다섯째날,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현장을 찾아 생존자들을 만나는 날. 베트남 중부의 꽝남성 하미마을로 향하는 버스 안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팜 티 호아 할머니는 오늘 아침 우리 일행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학살의 생존자이다. 전쟁 당시 할머니는 한국군이 저지른 학살로 자신의 가족을 모두 잃고 당신도 수류탄에 두 다리를 잃었다. 사건 당시 마을을 떠나 있어 화를 면한 할머니의 큰 아드님은 전쟁 이후 농사를 짓다 잘못 건드린 지뢰에 두 눈의 시력을 잃어버렸다.

나는 15년 전부터 일본 친구들과 함께 일본군 '위안부'생존자 할머니들, 강제연행으로 식민지 시대에 일본으로 끌려가 고생하신 할아버지들, 강제연행 희생자의 유족들을 만나왔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고통을 받은 피해자들과의 만남을 앞두고 거의 모든 일본 친구들이 걱정을 하며 불안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혹시나 일본 사람인 자신을 보고 그 분들이 화를 내시지는 않을까."

팜 티 호아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아침, 나의 마음도 일본 친구들과 같은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일행은 먼저 하미마을의 들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위령비를 찾았다. 1968년 2월 25일, 팜 티 호아 할머니가 살고 있는 하미마을에서는 135명의 무고한 마을 사람들이 한국군에게 학살을 당하였다. 이 위령비는 2001년 한국의 월남참전전우 복지회의 지원으로 건립되었다. 학살의 가해자인 한국 참전군인들의 지원으로 세워지는 위령비는 건립 당시 대내외적으로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한편 학살의 현장에 30여 년이 지나 세워지는 위령비의 건립은 자신들의 가족을 한 순간에 잃어버린 마을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이기도 했다.

 





위령비의 설계부터 건립에 이르기까지 마을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다해 위령비를 세우는데 온 힘을 쏟았다. 뙤약볕이 쏟아지는 베트남의 한여름은 잠시 서 있기도 어려울 정도로 무덥기 때문에 보통 한낮의 무더운 시간대에는 농작업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미마을 사람들은 하루라도 빨리 위령비를 세우기 위해 한여름 대낮에도 쉬지 않고 구슬땀을 흘렸다. 한국군의 학살로 하루 아침에 무고하게 죽어간 자신의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딸, 아들을 생각하며 온 힘을 다했을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얼마나 억울한 죽음인가? 얼마나 서러웠던 날들인가?



그러나 위령비의 건립이 그리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위령비의 완공을 눈앞에 두고 비문을 둘러싼 갈등이 일어났다. 학살 당시의 참상을 생생하게 묘사한 비문에 대해 위령비 건립을 지원한 참전 군인들이 제동을 걸어왔다. 하미마을의 주민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무고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의 넋들을 위로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려가며 만든 위령비가 제막을 앞두고 난관에 부딪힌 것이다. 참전 군인들은 비문의 수정을 강력하게 요구해 왔지만 그것은 마을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가해자들인 참전 군인들이 피해자인 마을 사람들에게 학살의 진실을 밝히는 비문의 수정을 요구한 것 자체는 미처 아물지 않은 상처에 또 하나의 상처를 덧내는 일이었다.

결국 학살의 참상을 표현한 위령비의 비문은 수정되지 않았지만 그 대신 비문은 연꽃 그림으로 덮어져 버렸다. 마을 사람들이 정성을 모아 세운 위령비이지만 비문을 덮은 그 연꽃 그림은 누가 보아도 정성을 들여 그려진 그림이 아니었다. 그 연꽃 그림에는 억울하게 죽어간 가족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위령비 마저 자신들의 뜻대로 세울 수고없었던 마을 사람들의 슬픔과 분노가 그대로 나타나 있다. 학살의 진실을 덮는 그림을 그려야만 했던 마을 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지금은 비록 연꽃 그림으로 가려져 있지만 학살의 진실은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다. '언젠가는 연꽃 그림을 걷어내고 학살의 진실을 세상에 밝혀 빛을 보게 하리라.' 굴욕적인 요구를 받아야만 했던 마을 사람들의 입술을 앙다문 표정이 눈에 선하다.

 





자신들이 행한 가해의 역사에 대한 통절한 반성 없이 경제력으로 진실을 덮어버리고자 했던 어설픈 화해의 몸짓이 오히려 마을 사람들에게 더 깊은 상처를 더하고 만 것이다. 참전 군인들이 내세운 그 경제력이라 하는 것도 결국은 베트남 사람들을 학살하고 벌어들인 돈으로 이룬 것이 아닌가. 오늘의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결국 무고하게 죽어간 베트남 사람들의 피의 댓가로 벌어들인 돈의 토대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안고 있는 위령비의 전면에는 135명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과 출생년도가 모두 새겨져 있다. 그 희생자 명단의 끝부분에는 1968년 학살이 일어난 바로 그 해에 태어난 갓난 아기들도 있다. 갓난 아기들은 이름조차 없다. 이 세상에 태어나 이름조차 얻기도 전에 아기들은 학살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설명을 듣고 희생자 명단에서 갓난 아기들의 존재를 확인한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어 버렸다. 어떻게 해서든 갓난 아기는 살리고자 핏덩이 자식을 자신의 가슴에 품고 한국군의 총탄에 죽어가야 했던 어머니, 할머니들이 있다. 한국 사회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싸웠다고 자랑하는 '베트콩'의 실체가 바로 이것이다. 이름조차 얻지 못하고 죽어간 갓난 아기들의 죽음 앞에서 위령비의 비문을 핑계삼아 학살의 추악한 진실을 돈으로 은폐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양심을 묻는다.



위령비 앞에서 향을 피워 한 송이 꽃을 바치고 묵념을 한다. 고즈넉히 비가 내리는 들녘의 풍경이 너무나 한가롭고 평화롭다. 한국의 여느 시골의 농촌 풍경과 다름없는 이 곳에서 자신의 고향마을을 떠나온 한국의 젊은이들이 핏덩이 갓난 아기들을, 자신의 아내, 어머니와 다름없는 여인들을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와 딸들을 살육했다는 사실이 한가로운 풍경과 대비되어 좀처럼 현실감있게 다가 오지 않는다. 아니 너무나 평화로운 시골 마을의 모습이 더욱 무겁게 가슴을 짓누른다. 위령비 양쪽에 자리잡은 희생자들의 무덤에 향을 피우고 꽃을 바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겨 있다. 위령비의 입구에 붙어 있던 간판도 떨어져 나갔다. 마을 사람들의 분노가 그대로 느껴지는 듯 하다. 어젯밤부터 우리 일행을 안내해 준 두 베트남 친구들의 얼굴을 마주하기가 힘겹다.

위령비를 뒤로 하고 폼 티 호아 할머니 댁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점점 더 무거워진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물에 젖은 시골길의 풀잎들, 푸르른 들녘도 그 날의 학살을 기억하고 있으리라. 고즈넉한 들녘을 흰 두루미 몇 마리가 한가로이 거닐고 있다.



오솔길로 접어 들어 단정하게 정리된 마당을 지나 할머니 집으로 들어섰다. 한국의 여느 시골집과 다를 바 없는 시골 농가의 풍경이다. 폼 티 호아 할머니가 반갑게 우리 일행을 맞아주신다. 일행을 안내해 준 구수정 선생을 마치 친딸처럼 끌어 안으며 반기신다. 할머니께 인사를 하고 거실에 둘러 앉았다.

너무나 온화하고 자상한 얼굴을 하신 할머니의 삶의 역사 뒤에 감춰진 깊은 슬픔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먹먹해 온다. '빨리 죽어야 하는데 너무 오래 살고 있다. 우리들이 마지막 손님이 될 지 모른다.'는 할머니의 말씀에 가슴이 아파 온다.

온 몸이 쑤셔 파스를 늘 붙이고 지내신다는 할머니. 최근에는 몸이 좋지 않아 누워서 지내는 시간이 많다 하신다. 동행한 베트남 친구와 안내를 맡은 구수정 선생이 할머니의 양 손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며 할머니의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1968년 2월 25일, 학살의 그 날 부터 2012년 오늘에 이르기까지 44년 동안 그 날 희생된 자식들, 가족들을 생각하며 살아오신 할머니의 말씀을 들으니 눈물이 앞을 가려 고개를 들 수 없다.

44년 전의 그 날, 하미마을의 평범한 시골 아낙이었던 폼 티 호아는 하루 아침에 자신의 아이들과 가족들을 모두 잃었다. 그리고 자신의 두 다리 마저...

평상심을 잃지 않으려 애쓰시며 힘겹게 말씀을 이어가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한없는 슬픔이 밀려온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수 십번도 더 듣고 통역을 해 왔을 구수정 선생님도 애써 눈물을 참고 있다. 당시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떠나 있어 다행히도 학살을 피했다는 큰 아드님이 살아있는 할머니의 유일한 가족이다.

할머니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큰 아드님도 전쟁이 남긴 지뢰에 눈을 다쳐 점점 시력이 약해져 왔고 최근에는 완전히 실명을 하여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너무나 큰 상심에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꺼리신다고 한다. 여느 때 같으면 한국에서 찾아 온 우리 일행을 가장 먼저 반겨주었을 큰 아드님이 오늘도 보이지 않는다. 어렵게 청하여 큰 아드님을 모셨다.

조금 있으면 위령제 날이 다가 오는데 그 날에 맞추어 오면 더 좋았을텐데 하며 아쉬워 하신다. 내년이면 45주년을 맞이하는 하미마을 위령제에 그 동안 한국에서 책임이 있는 사람은 그 어느 누구도 참석한 적이 없다며 굳은 얼굴로 말씀하신다.



“으어-, 으어-, 으어-.”

아드님이 한국 사회의 책임을 묻는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폼 티 호아 할머니가 깊은 울음을 토해 낸다. 눈 먼 아드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동안 가슴 속 깊이 맺힌 한(恨)과 설움을 울부짖음에 가까운 소리로 한꺼번에 토해낸다. 자신의 눈 앞에서 한국군의 학살로 죽어 간 자식들을 부르기라도 하는 듯...

“으어-, 으어-, 으어-.”

지난 세월의 깊은 슬픔과 한맺힌 세월의 고통이 그대로 녹아있는 할머니의 울음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한꺼번에 무너져 버린다.

두 시간 남짓 할머니와의 만남을 끝내고 이별을 고할 시간이 왔다. 그러나 할머니께서 살아계시는 동안 다시 꼭 오겠다는 약속을 자신있게 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이렇게 두 시간 동안 할머니와 만나고 돌아가지만, 할머니는 1968년 2월 25일 학살의 그 날 이후 44년 동안 단 하루도 그 날의 학살을 잊지 못하셨으리라.

할머니에게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아니 돌아가시는 그 날까지 할머니에게 전쟁은 끝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누가 할머니에게 이런 고통을 안겼는가?

사람들과 포옹하는 것을 좋아하신다는 할머니. 우리 일행은 한 사람, 한 사람 할머니늘 끌어안으며 작별인사를 고했다. 가늠할 수 없는 고통과 깊은 슬픔, 그리고 죄송한 마음에 모두가 할머니와 한동안을 떨어질 줄을 모른다.

‘할머니, 건강하셔요.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그저 마음 속으로 간절하게 빌 뿐이다. 아직도 아물지 못한 전쟁의 상처를 온몸으로 안고 할머니는 지난 세월을 견뎌오셨다. 그리고 또 오늘을 살아가신다.

1968년 2월 25일(음력 1월 24일), 하미마을의 학살을 기억하자는 마음 속의 다짐을 할 수밖에... 2013년 하미마을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제는 45주기를 맞는다.

한 사람 한 사람 할머니를 꼭 껴안으며 이별을 고하는 동안 나는 흐르는 눈물과 슬픔을 감당할 수 없어 집 밖으로 나섰다. 집 앞 오솔길에 나서니 어미 품을 갓 벗어난 듯한 누런 송아지 한 마리가 순한 얼굴로 커다란 눈을 껌뻑이며 풀을 뜯고 있다.



할머니와의 만남을 뒤로 하고 퐁니 위령비, 빈호아사의 한국군 증오비를 찾았다. 퐁니마을에서는 1968년 1월 14일, 한국군이 마을 주민 61명을 학살했다. 마을 입구에는 한국과 베트남의 젊은이들이 힘을 모아 세운 희생자들의 위령비가 서 있다.

1966년 12월 한국군에 의해 430명의 마을 주민이 학살을 당한 꽝아이성 빈호아 마을.“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라고 새겨진 한국군 증오비가 서 있는 마을에는 학살의 슬픔을 가슴에 새겨온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자장가가 있다.

 





“... 아가야, 이 말을 기억하거라. 적들이 우리를 폭탄 구덩이에 몰아넣고 다 쏘아 죽였단다. 아가야 너는 커서도 꼭 이 말을 기억하거라...”

빈호아의 증오비에도 이름 조차 얻지 못하고 죽어간 갓난 아이들이 위령비의 끝자리를 채우고 있다.

 


향을 피워 꽃을 바치고 두손을 모아 머리 숙여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돌아서니 마침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자전거 행렬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에게 손을 흔드니 해 맑은 웃음으로 낯선 이방인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어 준다. 어쩌면 저 아이들도 이 마을에 전해지는 슬픈 자장가를 들으며 자랐을 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얼굴을 바로 쳐다보기가 힘들다. 마음 속으로 아이들에게 몇 번이고 되뇌인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과의 만남에 무거워진 몸과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가 서 있는 길 맞은 편 집앞에서 할머니 한 분이 길가에 나와 자기 집 쪽으로 오라며 손짓을 하신다. 무슨 일인가 다가가니 활짝 웃으시며 자신의 집에 들러 손을 씻고 물이라도 마시고 가라며 수돗가로 안내해 주신다. 마당으로 들어서니 거나하게 취하신 마을 아저씨들이 술판을 벌이고 계신다.

“신짜오(안녕하세요).”

마음 좋은 얼굴로 인사를 건네는 그 분들의 형제, 자매, 어머니,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도 어쩌면 한국군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집 바로 맞은 편 언덕에 서 있는 증오비를 매일 마주하며 살아가는 마을 주민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온몸으로 견디며 살아오셨을 그 분들의 넉넉한 친절과 웃음이 오히려 더 깊은 슬픔으로 다가온다.



학살의 희생자들과의 만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하루 동안 단 세 곳의 위령비만을 찾았을 뿐임에도 나의 몸과 마음은 너무 지쳐있었다. 단 하루 동안의 만남으로 억울하게 죽어간 그 많은 분들의 넋을 어찌 달랠 수 있을까. 다만 그 분들께 마음 속으로 인사를 드릴 뿐이다.

“오늘 저희들과 만나주셔서 고맙습니다. 깜언... 깜언...(고맙습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저녁 빈호아 마을에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 차창 밖으로 한국 기업의 로고가 큼지막하게 새겨진 콘테이너를 실은 트럭이 어둠을 헤치며 도로를 질주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오늘 베트남과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 결코 덮을 수도 없고 지워지지도 않을 학살의 기억이 학살의 상처가 지금 한국 사회의 역사인식을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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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자 2018-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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