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연구

번호 147
제목 원폭 2세 환우 고 김형률과 아버지의 동행

2012 1월 4 - 17:33 익명 사용자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2004년 8월 어느 여름날의 일이다.

일본의 고치(高知)현과 부산의 고교생들이 역사문제를 함께 연구, 조사하는 교류모임에서 비키니 수소폭탄 실험의 피해자들을 찾아 온 길이었다. 작은 체구의 여윈 몸에도 한국의 원자폭탄 피해자들의 현실에 대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힘주어 이야기하던 그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연이은 저녁식사 자리에서도 밥을 먹는 것도 잊은 듯 자신의 이야기를 멈추지 않던 그의 빛나던 눈빛도 잊을 수가 없다. 한여름인데도 긴 팔 옷을 입고 있던 그는 가쁜 호흡을 내쉬며 멈추지 않는 기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누구보다 열심히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건강이 좋지 않아 술 한 잔도 함께 나누지 못했다.

그로부터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그는 35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한국원폭2세환우회 초대회장 김형률. 내가 그를 만난 건 그 여름날의 반나절이 전부였다. 야윈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하던 그의 뒷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미안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와의 첫 만남으로부터 4년 뒤, 나는 그의 3주기 추모제에서 사회를 맡고 있었다. 4년 전 그 여름날의 만남이 이렇게 다시 산 자와 죽은 자의 만남으로 되풀이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김형률과 어버님

김형률과 그의 아버지 김봉대 님의 삶을 기록한 독립 다큐멘터리 “아들의 이름으로”를 만든 박일헌 감독도 딱 두 번 그를 만났다. 사람 좋은 감독이 무심코 쓴 한 줄의 댓글이 계기가 되어 이 작품은 만들어지게 되었다. 2004년 6월 푸른영상의 사무실로 그가 찾아왔다. 자신의 이야기, 원폭 2세 환우들의 이야기를 찍어달라는 그의 요청을 받은 동료 감독이 누군가 함께 만나자는 제안을 게시판에 올렸고, 아무도 답변을 하지 않자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주겠다는 댓글을 무심코 달았다. 그 해 가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감독을 찾아온 그를 두 번째 만났고, 6개월쯤 뒤에 감독은 그의 부고 소식을 신문에서 읽는다.

“미안하고 또 미안하지요.” 살아 있을 동안 그의 바람을 들어주지 못한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감독을 작업으로 이끌었다.



66년 전에 일어난 원자폭탄 투하로 인해 오늘날까지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비(非)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것이 김형률에게는 가장 큰 벽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김형률이 온전히 감당했을 그 아픔과 역사의 무게를 나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부끄러움과 미안함으로 시작된 작업이었다. 그러나 김형률로 인해 만나게 된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힘과 용기를 준다. 김봉대 아버님이 아들의 뒤에 말없이 서 있었듯이 나도 그렇게 김봉대 아버님의 뒤에 서 있고 싶다.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독립다큐멘터리이다.

- 박일헌, 연출의 변-



감독이 연출의 변에서 밝힌 것과 같이 카메라는 2005년 5월 김형률의 장례식부터 2010년 10월까지 아버지 김봉대 씨의 한 걸음 뒤에서 성실하게 아버지의 발길을 따라 간다. 부산에서 , 대구, 합천, 서울로, 현해탄을 건너 후쿠오카(福岡), 히로시마(広島), 나가사키(長崎)로 김형률이 원폭2세 환우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간 길을 아버지가 따라 간다. 그 길은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원자폭탄의 피해를 당한 김형률의 어머니 이곡지 씨가 걸어온 길이기도 하다.



작품의 앞부분은 김형률의 길지 않은 삶의 궤적을 따라 간다. 1970년 부산에서 쌍둥이로 태어났으나, 쌍둥이 동생은 1년 6개월 후에 사망을 하였다. 선천성 면역글로블린 결핍증, 원인을 알 수 없는 이 질병으로 인해 그는 평생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삶을 살아간다. 아버지의 등에 업혀 응급실로 실려 가던 날들, 학교보다는 병원에 누워있던 날들이 더 길었지만 야학에서 공부를 하여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도 입학한다. 짧은 기간 동안 회사에 다닌 적도 있지만 끊임없이 그를 괴롭히는 병마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다른 원폭 2세 환우들이 그랬던 것처럼...

2001년 병원에서 자신의 병을 다룬 논문을 발견하고 히로시마에서 태어나고 자란 어머니의 피폭과 자신을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는 질병의 관계에 대해 처음으로 눈을 뜨게 된다. 이 발견이 계기가 되어 2002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원폭피해자 2세임을 세상에 알린 뒤, 3년 동안 말 그대로 초인적인 힘으로 원폭2세 환우들을 위한 활동을 벌여 나간다.

그는 서울로 대구로 합천으로 그리고 일본으로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발로 뛰어 다니며 한 사람 한 사람과 만나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운동을 조직해 간다. 시민단체, 국가인권위원회, 정부 등의 기관을 비롯하여 의사, 영화감독, 원폭피해자 1세, 학자, 한국과 일본의 활동가,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일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은 모두 만나 연대와 지원을 요청한다.



감독의 카메라는 당시 김형률을 처음 만났던 사람들의 인터뷰를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다. 김형률을 만난 모든 사람들은 “그의 절박함에 값할 수 있을까라는 부담감”을 느끼며 감독이 이 작업을 시작하게 된 것처럼 한결같이 “미안하다” 혹은 “부끄럽다”는 마음을 가지고 결국은 “충분히 설득을 당하여“ 함께 행동하게 된다.

2002년의 기자회견 이후 한국의 원폭2세 환우의 문제를 호소하기 위해서라면 어디든지 달려가는 그의 모습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은 그를 지원하는 모임을 만들었고, 김형률과 시민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국가인권위원회에 원폭피해자들에 대한 정부 차원의 실태조사와 진상 규명을 골자로 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여 해방 이후 60년 만에 원폭 피해자 2세의 기초현황 및 건강상태에 대한 최초의 실태조사를 실현시킨다. 2004년 9월 김형률은 대구와 합천, 부산, 서울로 한 집 한 집 찾아다니며 직접 만난 20명의 환우들과 함께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발족시킨다. ‘무혈성괴사증’, ‘정신지체장애’, ‘골다공증’, ‘다운증후군’ 등의 병마에 의해 삶을 유린당하면서도 지금까지 자신들의 고통에 대해 한 번도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사람들이 비로소 세상을 향해 처음으로 자신들의 고통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2005년 4월 김형률은 ‘한국원자폭탄피해자와 원자폭탄2세환우의 진상규명 및 인권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위한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한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2005년 5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일본의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국제연대협의회’ 심포지엄에 다녀온 뒤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어 2005년 5월 29일 부산시 동구 수정4동 수정아파트 자택에서 끝내 숨을 거둔다.

2002년이 기자회견으로부터 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3년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 활동가 김형률은 참으로 많은 일들을 해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비현실적으로 느끼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로 자신의 몸으로 그 현실을 직시하라고 호소하는 일은 그의 앞에 놓여있는 역사의 장벽을 넘고자 하는 힘겨운 여정이었으리라.

그 과정에서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물론이요 심지어는 한국과 일본의 원폭피해자들도 그를 외면하고 냉담하게 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그는 당당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그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걸음도 제대로 못 걸을 정도의 연약한 몸으로 이 큰 일을 하겠는가.” 걱정을 하지만 그와 만난 뒤에는 “아주 씩씩하고 용감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한국 사회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던, 역사의 암흑 속에 묻혀 철저히 소외되었던 원폭2세 환우들에게 처음으로 빛을 비추고 그들의 아픔을 해결하기 위한 운동에 그가 비로소 생명력을 불어넣기 시작한 것이었다. 운동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면서 자기 자신은 점점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았을까. 중요한 활동의 고비마다 김형률은 병세가 악화되어 응급실로 실려 가는 일을 반복하게 된다.

김형률의 삶의 궤적을 따라 가는 감독은 50명 이상의 사람들과 인터뷰를 통해 그를 만난다. 5년 동안 6,000 시간 이상을 세세하게 담아 낸 기록을 60분의 작품에 담아내는 동안 살아있는 김형률과 만나면서 감독은 가장 괴로웠다고 술회한다.

“김형률 씨가 생의 마지막 3년 동안 만든 성과를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어요. 그것도 병들어 지친 상태에서. 그런 그가 화면 속에서 빙긋 웃으며 우리에게 자꾸 말을 거는 겁니다. 괴롭지요.”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밝은 웃음으로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는 화면 속의 김형률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나 그런 괴로움에서 자유롭지 못하리라.



영화의 후반부 카메라는 아버지의 모습을 따라 간다.

“형률이가 아버님의 분신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에서는 아버님은 형률이의 분신이기도 했다”. “지금 와서 생각을 해보면 이 운동의 반은, 반은 아버님이 하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형률 씨의 든든한 버팀목 이런 느낌보다도 한사람의 굉장히 훌륭한 활동가가 한분 이렇게 만들어진 그런 기분, 그런 활동가를 한분 뵙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김형률의 아버지 김봉대 님을 표현한 말이다.

1938년 경상남도 합천에서 태어난 아버지 김봉대 님은 군대시절 부모님의 연락을 받고 휴가를 나와 같은 합천 출신의 이곡지 님과 결혼을 하여 김형률을 낳았다.



김형률이 세상을 뜨고 난 뒤에 나는 아버지를 처음 만났다. 김형률 추모제 일을 돕게 된 인연으로 알게 된 아버지는 거의 정기적으로 전화를 주신다. 김형률이 세상을 떠난 뒤에야 비로소 17대 국회에서 발의된 ‘한국인 원자폭탄피해자 진상규명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안(이하 특별법)’이 심의 한 번 제대로 되지 못한 채 폐기 되어 버린 뒤에 다시 18대 국회에서 발의가 되었지만 좀처럼 성립될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 시간이 계속 되었다. 매번 아버지의 성함이 전화에 뜰 때마다 죄송한 마음뿐이다. 아버지는 시민단체의 활동가들뿐만 아니라 기자들에게도 기사를 부탁하는 전화를 자주 하신다. 한 번 인연을 맺으면 정확하게 기자의 이름을 기억하는 아버지의 부탁을 들을 때마다 전화기 저 편의 기자들도 매번 그렇게 자주 기사를 쓸 수 없다는 현실을 차마 이야기하지는 못하리라.



영화 속의 아버지는 서울, 대구, 히로시마, 부산, 도쿄, 제주를 오가며 ‘한국원폭2세환우회’의 고문으로 한 명의 활동가로서 지치지 않고 활동을 벌여간다. 8월 뙤약볕 쏟아지는 히로시마로, 원폭피해자 특별전이 열리는 서울의 전시회장으로, 평화학회가 열리는 제주도로, 평화행진 속 부산의 거리로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 아들 김형률을 애기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빠짐없이 달려간다.

“한국원폭2세환우회 고문을 맡고 있습니다. 고 김형률 아버지 됩니다. 형률이가 늘 말하듯이 한미일 정부는 원폭피해 2세에 대한 ‘선지원 후규명’으로 생존권 생명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형률이의 삶은 살아있는 2세 환우들에 대한 고통 속에서, 형률이는 이 세상을 떠났지만 이제 나는 이 땅의 모든 2세환우의 아버지입니다. 나는 형률이의 뜻을 이어받아 원폭 2세환우들의 가족들과 연대해서 특별법 제정운동 등 원폭피해자 2세 환우문제 해결을 위해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아들의 뜻을 이어받아 끝까지 싸우겠다는 다짐을 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할까. 방광암 2기 판정을 받아 두 번의 수술과 항암치료를 거치며 지칠 법도 하건만 아버지는 쉬지 않고 움직인다. 마치 자신의 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버지의 발언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김형률이 살아서 이야기를 하는 듯 느껴질 때도 있다. 비록 김형률은 아버지가 낳았지만 아버지가 김형률의 분신이라는 이야기가 실감나게 다가오는 대목이다. 아들이 있었을 바로 그 자리에 아버지가 늘 있다. 자식을 앞세운 부모의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35년 짧은 인생을 살다 간 아들이 태어날 때부터 숨을 거둘 때까지 곁에서 병수발을 해 온 아버지에게 눈길을 주고 싶었고 김형률과 아버지를 위로하고 싶었다는 감독은 그저 묵묵히 아버지의 뒤를 따라 다닌다. 밋밋하리만치 그저 아버지의 뒤를 따르고 있는 카메라가 마치 저 세상에 있는 아들의 시선으로 느껴져 마음이 시리다.

전반부의 김형률의 활동을 담은 영상에서 내게 가장 인상 깊게 남겨진 장면은 아들과 함께 다니는 아버지가 언제나 매고 있는 작은 가방이다. 일흔에 가까운 노인의 것이라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가방이 늘 아버지의 등에 걸려있다. 세상을 떠난 막내아들이 못다 이룬 뜻을 이루기 위해 활동가로 다시 태어난 아버지 등 뒤의 가방. 당신이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 할 아들의 뜻이 담겨있는 듯이 느껴진다. 아들이 살아있을 때는 숨이 넘어갈 듯 괴로워하는 아들을 그 등에 업고 얼마나 많이 병원으로 달려갔을까... 이제 아버지의 등에 아들의 가방은 없지만 아들이 남기고 간 뜻이 오롯이 남겨져 있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은 김형률의 어머니 이곡지 님이다.

자신이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피폭을 당했기에 아들 김형률을 먼저 앞세운 어머니의 그 심정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로 언제나 어머니의 두세 걸음 멀찍이 앞에서 혼자 걸어가는 아버지의 뒤에는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어머니가 있다. 낙천적인 성격의 어머니는 아마 억지로라도 웃음을 짓지 않고서는 그 힘든 시간들을 견뎌낼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 아들을 빼앗아 간 땅 히로시마를 찾은 밤, 한 잔 술을 걸치신 어머니는 아들을 생각하며 구슬프게 노래를 부른다.

“우리 형률이 우애 이런 노래 하나. 아 엄마 그런 노래 부르지 마라 이래 칸다. 소용없는 일이지만~ 그 시절 그 추억이 또 다시 온다 해도 사랑만은 않겠어요.” 불그레 달아 오른 얼굴로 아들을 이야기하며 한풀이라도 하듯 노래를 부르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신산한 세월을 견뎌 온 어머니의 마음이 애잔하게 전해 온다. 지그시 눈을 감고 웃으며 노래하는 어머니의 눈망울에는 먼저 간 아들의 모습이 비추었으리라.

매일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두운 산길을 걸어 집 근처 약수터에 오른다. 아버님은 약수를 뜨고 어머님은 작은 제상을 차린다. 아들을 가슴에 묻은 부모의 기도는 내일 새벽에도 계속된다.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김형률이 이 세상에 남긴 말이자 전진성이 꼼꼼하게 애정을 담아 써 낸 그의 평전의 제목이기도 하다. 원폭피해자 운동에 새 길을 연 그가 떠난 뒤에 운동이 멈춰 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의 빈자리는 컸다. 그러나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그의 외침에 공감한 한국과 일본 시민들의 노력과 아버지의 분투로 이제 그의 빈자리가 조금씩 채워져 가고 있다. 2010년 3월 1일에는 원폭 2세 환우들의 위한 쉼터 ’합천 평화의 집‘이 문을 열었다. 환하게 웃으시는 아버지의 웃음 뒤로 아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일흔 셋의 아버지에게는 아직 할 일이 있다. 그것은 합천에 하루속히 평화공원을 만들고, 자그마한 평화자료관이 지어지면 김형률이 살아있던 때의 모습 그대로의 방에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는 자료들을 이 자료관으로 옮기는 일이다. 아들의 유골도 합천으로 하루속히 옮기고 추모비를 세우는 것도 아버지의 몫으로 남아있다.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그 일을 해야 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걱정이라는 아버지에게는 노후를 즐길 여유도 없다. 아버지의 걱정이 보다 절실하고 가슴 아프게 와 닿는 까닭은 작품에 등장하는 세 분이 이미 이 세상을 떠났기에 그 분들의 명복을 빈다는 감독의 마지막 인사 때문인지도 모른다. ‘형률이가 힘든 몸으로 애썼다’며 위로해 주시던 원폭 1세 황말남 님은 지체장애를 가진 두 아들만을 남겨두고 뇌종양을 앓다 세상을 떠났다. 누구보다 든든한 김형률의 지원자인 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 심진태 님의 어머니 원폭 1세 안재한 님, 그리고 일본에서 김형률과 그의 아버지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온갖 도움을 아끼지 않은 후쿠도메 노리아키(福留範昭)님도 유명을 달리 했다.



이제 삶은 계속 되어야 한다는 김형률의 호소에 응답하는 일은 산 사람들의 몫이 되었다. 김형률은 영화 속에서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을 걸고 있다.

“원폭피해자 문제가 가장 심각한 게 고통에 대한 대물림. 대물림되는 고통에 대해서 이제는 사회적으로 사회 구성원들이 모두 다 원폭피해자가 겪는 고통에 대한 부분들은 같이 떠안아야 되지 않을까. 그리고 치유책들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공감대를 넓히고, 사회적으로 문제제기를 해나가야 되지 않을까.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 고통이라는 게 원폭피해자 개인이 떠안기에는 굉장히 무겁고,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굉장히 힘든 고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원폭피해자 존재 자체가 그래서 이제는 치유해 나가는 과정들을 사회가 이제는 떠안아 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회는 해방이 되고 65년이 지나는 동안 외면하고 방치해 온 원폭피해자들의 고통을 떠안을 준비를 하고 있는가. 원폭피해자들의 고통을 외면해 온 국가의 직무유기가 헌법위반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꿈쩍도 하지 않는 정부, 이웃나라에서 전대미문의 재앙으로 새롭게 피폭자가 양산되고 있는 현실을 즐기는 듯 ‘악마의 불’ 원전을 수출하려는 야만의 정부가 있다. 김형률이 그토록 제정을 원하던 특별법은 18대 국회에서도 제대로 심의조차 되지 않은 채 폐기될 운명에 놓여 있다.

저 세상 사람이 된 김형률과 아버지의 싸움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감독의 카메라도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묵묵히 아버지의 뒤를 따를 것이다. 이제 김형률의 물음에 응답하고 아버지와 함께 그 길을 함께 걷는 일이 우리들 산 사람들의 몫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아들의 이름으로 In the Name of the Son

박일헌 Park il-hon

한국 Korea | 2011 | 다큐 | 60분 | DV | color | 4:3





김영환(평화박물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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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자 2018-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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