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연구

번호 144
제목 고향엘 들러야 저승길 간단다
2012 1월 4 - 17:01 익명 사용자



달아 높이나 올라 이역의 산하 제국을 비추올 때

식민 징용의 청춘 굶주려 노동에 뼈 녹아 잠 못들고

아리 아리랑, 고향의 부모 나 돌아오기만 기다려

달아 높이나 올라 오늘 죽어 나간 영혼들을 세라



달아 높이나 올라 삭풍에 떠는 내 밤을 비추올 때

무덤도 없이 버려진 넋들 제국의 하늘 떠도는데

아리 아리랑 두고온 새 각시 병든 몸 통곡도 못 듣고

달아 높이나 올라 내 넋이라도 고향 마당에 뿌려라



아리 아리랑 버려진 넋들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달아 훤히나 비춰 슬픈 영혼들 이름이나 찾자

고향엘 들러야 저승길 간단다

달아 높이곰 올라라

달아 높이곰 올라라





"징용자 아리랑 - 달아, 높이곰..." -정태춘









모내기 하던 식민지 조선의 들녘에서 강제노동의 땅 홋카이도로





“한심하다, 한심해...”

70여 년 전에는 자신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머나먼 이역의 땅 홋카이도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렸던 사람들. 그러나 끝내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유골이 되어 일본 땅에 남겨진 사람들. 70여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고향에도 들르지 못하고 저승길로 떠나지 못한 이름 모를 희생자들의 유골을 눈앞에 두고 90살의 이상석 할아버지는 눈물을 글썽이며 입을 굳게 다문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2010년 10월, 10대의 청년시절 강제로 끌려와 말할 수 없이 가혹한 노동에 자신의 청춘을 빼앗긴 땅, 홋카이도(北海道)의 슈마리나이(朱鞠内). 이제 아흔의 노인이 되어 67년 만에 다시 찾은 슈마리나이의 땅에서 이상석은 67년의 시간을 거슬러 강제노동의 슬픈 기억을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하나하나 되살려냈다.



1938년 봄 어느 날, 식민지 조선 경상남도 창녕군의 들녘에서는 모내기가 한창이었다. 당시 18살의 청년 이상석은 모내기를 하던 논에서 갑자기 찾아 온 순사에게 영문도 모른 채 붙잡혀갔다. 무작정 수갑을 채우려는 순사에게 청년은 가야한다면 내 발로 걸어가겠다고 저항하며 경찰서로 끌려갔다. 이미 창녕경찰서 앞마당에는 120여명의 조선 남성들이 잡혀 와 있었고, 어디선가 홋카이도(北海道)로 끌려간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들녘에서 일하던 차림으로 잡혀 온 사람들에게 작업복이 주어졌고, 그들은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보내졌다. 열차 1칸에 120여명이 짐짝처럼 밀어 넣어져 통로에서 좌석 위의 선반 구석구석까지 사람들로 가득 채워졌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돼지’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고 이상석 할아버지는 당시의 광경을 떠올렸다.

부산에서 하룻밤을 보낸 청년 이상석은 부산항에서 연락선에 태워져 자신의 운명처럼 거센 파도가 휘몰아치는 현해탄을 건너 제국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関)에 닿았다. 부산항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동안 조금이라도 일본말을 할 줄 알았던 사람들 가운데는 자신들에게 다가올 고난의 운명을 예상한 듯 도주한 사람도 있었는데 그 수가 40여명에 이르렀다.

시모노세키(下関)에서 다시 열차에 태워진 이상석은 1주일을 달려 오사카(大阪), 도쿄(東京)를 거쳐 일본 혼슈(本州)의 최북단 아오모리(青森)에 닿았고, 다시 배에 태워져 홋까이도의 하코다테(函館)를 거쳐 다시 열차로 홋까이도를 종단하여 도착한 곳은 홋까이도 우류군 호로카나이쵸 슈마리나이(北海道雨竜郡幌加内町朱鞠内)라는 곳이다. 슈마리나이는 영하 41.2도까지 내려간 기록을 가졌으며, 겨울에는 평균 2미터를 훨씬 넘는 눈이 쌓이는 혹한의 땅이다.

모내기하던 고향 창녕의 들녘에서 어느 날 갑자기 끌려와 고향의 가족들, 정든 친구들에게 인사도 한 마디 못하고 떠나온 길.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하염없이 달리는 열차에 몸을 실어야만 했던 강제연행의 길에서 낯설기만한 일본 땅의 풍경을 바라보며 식민지 조선의 청년 이상석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서...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홋카이도로 끌려 온 다음 날부터 4년 반 동안 이상석은 당시 동양 최대의 댐으로 일컬어지던 슈마리나이의 우류댐(雨竜ダム) 공사 현장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홋까이도(北海道) 슈마리나이(朱鞠内)의 우류댐(雨竜ダム)





새벽 4시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공사현장으로 끌려가 밤 9시까지 강제연행된 사람들은 곡괭이 자루로 맞아가며 암반을 깨는 일을 했다. 공사 초기에는 허리까지 물이 차오르는 곳에서 곡괭이와 해머로 암반을 깨는 일을 했는데, 비교적 젊은 나이였고 힘쓰는 일에도 능숙했던 이상석은 그래도 나은 편이었지만,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너무 힘이 들어 중노동에 지쳐 쓰러지기라도 하면 '보가시라(棒頭)'라고 불리는 관리자들의 몽둥이에 맞아서 쓰러지는 일도 많았다. 공사 초기에 수십 명의 사람이 죽어나갔다. 날이 추워지면 동상에 걸려 발이 썩어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중노동도 중노동이지만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배고픔이었다. 네 명이 함께 도시락을 나누어 먹어야 했는데, 힘든 노동에 비해 주어진 양도 턱없이 적었지만, 옥수수, 콩, 감자, 수수, 메밀 등 잡곡이 뒤섞인 밥은 목으로 넘기기도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는 무엇이라도 먹을 수밖에 없었다.



9시까지의 강제노동이 끝나면 ‘타코베야(タコ部屋)’ -‘문어방’이라는 뜻으로 문어를 잡기 위해 놓은 어항에 문어가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타코베야에 잡혀 가면 살아서 나올 수 없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 라 불리는 집단 합숙소로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왔다.

중노동에 지친 노동자들이 땀을 씻는 목욕통에는 간부, 중간관리자, 노동자의 순서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물이 너무 더러웠고 씻을 수 있는 시간도 너무 짧았기 때문에 목욕이라 할 수도 없었다. 수십 명이 함께 수용된 타코베야에는 늘 감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문을 잠가 놓았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는 것은 꿈도 못 꾸었으며, 자유롭게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다. 자신이 끌려 온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잠을 잘 때에는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빽빽하게 누워야 했고, 노동자들이 서로 이야기하면 도주를 할까봐 이를 막는다는 이유로 머리를 서로 엇갈린 방향으로 둔 채 잠을 자야만 했다.



강제노동 현장에서 도망을 가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노동자들이 입고 있던 옷이 너무 보잘 것 없었기 때문에 금방 눈에 띄어 잡혀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한번은 함께 일하던 사람이 도망을 갔다가 잡혀 온 일이 있었는데, 겨울에 옷을 모두 벗겨 알몸인 채로 다른 노동자들 앞에서 구타를 당했다. 두드려 맞아 기절한 사람에게 찬물을 끼얹어 정신을 차리게 하고, 다시 구타를 당하는 사람을 보면서 도망갈 생각은 엄두도 못 냈다고 이상석 할아버지는 당시를 회상했다. 오로지 머릿속에는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너무 많이 맞아 밥도 먹지 못하고 이틀 동안 방치된 사람도 강제노동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다시 공사 현장으로 끌려간 사람이 일을 할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물이나 죽, 미음을 겨우 겨우 먹을 수 있을 따름이었다. 시름시름 앓던 동료는 사흘이 지난 뒤에 없어졌다. 고향으로 돌아갔는지 죽었는지 알 수도 없는 이름 모를 동료를 떠올리며 이상석 할아버지는 “한심하다, 한심해...”를 몇 번이고 되뇌었다.



한겨울에는 3~4미터나 눈이 쌓이는 날도 많아 노동자들은 기차역의 눈을 치우는 작업에도 동원되었다. 한번은 슈마리나이역에서 눈을 치우는데 열차 앞부분에 찢겨진 비옷이 너덜너덜하게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같은 작업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입고 있던 비옷이었다. 200여 미터쯤 선로를 거슬러 올라가니 열차에 치인 사람들의 살점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노동자들에게 식사를 가져다주던 20대와 50대의 동료가 열차에 치여 죽은 것이다. 비참하게 찢겨 흩어져 있는 희생자들의 유해를 주워 모으며 살아있는 동료들은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산에 올라 사람 키보다 높이 쌓인 눈을 파내고 밤새 화장을 한 뒤에 남겨진 유골을 절에 맡겼다. 그 유골들이 고향으로 보내졌는지 어떤지는 알 길이 없다.

 







발굴된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눈이 너무 많이 내리는 한겨울에는 댐 공사를 할 수 없었지만 강제연행된 노동자들은 쉴 수도 없었다. 노동자들은 홋카이도 전역에 걸쳐 있는 탄광으로 보내져 그 곳에서 석탄을 캐는 일에 동원되었다. 이상석도 홋카이도의 비바이(美唄)탄광으로 보내졌다. 거미줄처럼 얽혀 파내려간 갱도에서 사고가 나는 일도 많았다. 한번은 갱도에서 사고가 나서 물이 차올랐는데 사람들이 갇혀있는데도 불구하고 더 큰 피해를 막는다는 이유로 회사에서 갱도를 폐쇄해 버렸다. 70여명의 사람들은 갇힌 갱도 속에서 그냥 산 채로 묻혀버렸다. 지금은 콘크리트로 굳게 막힌 비바이탄광의 갱도 입구 앞에서 이상석은 죽어간 동료들을 위해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한 푼의 돈도 받지 못하고





4년 반의 강제노동 끝에 이상석은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를 얻었다. 당연히 그동안 일한 만큼 모은 돈을 가져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한 푼의 돈도 받지 못했다. 매달 관리자들이 급여를 알려주기는 했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때 한꺼번에 준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 현금으로 주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하루 일당은 2엔 50전이었는데 ‘와라지(草鞋)’-짚신-는 사흘을 신으면 낡아 떨어져 새 신으로 바꿔야 했다. 그런데 짚신이 5엔, 담배가 5엔이었기 때문에 일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돈을 모을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고향에 돈을 모아가자 마음먹은 이상석은 한 달의 반은 잠을 자지 않고 밤을 새워 일을 했다. 옷을 살 수 있는 쿠폰도 받았는데 1년에 30점을 쓸 수 있었다. 웃옷이 15점, 바지가 10점, 양말과 장갑이 2점이었기 때문에 옷 한 벌로 1년을 지내야만 했다. 양말이 낡아 신을 수 없으면 발을 천으로 감싸고 일을 해야만 했다.

고향으로 갈 기회를 얻은 이상석은 일단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동안 모아둔 돈은 고향에 갔다가 돌아오면 준다는 약속을 받았다. 회사 사람이 홋카이도에서 부산까지는 데려다 주었지만, 부산에서 고향인 창녕까지는 자신의 힘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부산항에 내려진 이상석에게는 한 푼의 돈도 없었다. 사정사정 부햰여 부산에서 밀양까지는 차를 얻어타고 갈 수 있었지만 밀양에서 창녕까지는 걸어가야만 했다. 고향까지 70리 길 부걸어가는 길이 너무나 힘들고 배가 고파 밭에서 몰래 참외를 캐어 먹으며 허기를 달랜 끝에 꿈에도 그리던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한 달만 고향에 있다가 다시 홋카이도로 돌아가서 돈을 받아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상석의 아버지는 4년 반의 강제노동 끝에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돌아온 아들을 다시는 일본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희생자의 위패가 전하는 강제연행·강제노동의 역사

: 소라치 민중사 강좌(空知民衆史講座)의 유골 발굴과 유골 반환 운동



 







35년 동안 슈마리나이(朱鞠内)의 강제노동, 강제연행 희생자들의 역사를 밝히는 일에 힘써온 도노히라 요시히코(殿平善彦) 소라치 민중사 강좌(空知民衆史)대표





이상석 할아버지가 강제노동의 땅을 다시 찾기까지는 35년 동안 이 지역에서 있었던 강제연행, 강제노동의 역사를 밝히기 위해 노력해 온 일본의 시민단체와 이 운동에 뜻을 같이 해 온 재일조선인, 아이누, 그리고 한국 시민들의 노력이 있었다.

강제연행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한겨울의 옛 고겐지(光顕寺), 현재는 강제노동자료관(조릿대묘표전시관,笹の墓標展示館)으로 쓰이고 있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고겐지(光顕寺)’에서 수십 개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도 여러 개가 있었다.

 






옛 고겐지(光顕寺)에서 발견된 강제노동 희생자들의 묘표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平善彦) ‘소라치 민중사 강좌(空知民衆史講座)’의 대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화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시대 많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강제연행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을 지고 팔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함께 일을 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를 띄우자’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의 도움으로 한국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시대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의 아들 채홍철(蔡鴻哲, 현재 강제연행·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화장인허가증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옛 고겐지(光顕寺)에서 발견된 조선인 강제노동 희생자의 묘표
: 황병만(1943년 9월 18일 사망)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까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 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연행된 채로 소식이 없던 가족의 소식을 안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 민중사 강좌의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강제노동을 당했던 비바이(美唄)탄광의 갱도 앞에서 당시를 증언하는 이상석 할아버지. 콘크리트로 막힌 뒷부분이 당시의 탄광 입구.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5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 민중사 강좌의 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우연한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 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연행되어 강제노동으로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한일대학생공동워크숍’(이후 2001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고,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이 워크숍을 계기로 소라치 민중사 강좌의 운동에 젊은이들도 가세하게 되었다. 이후 한국과 일본을 넘나들며 두 나라의 시민들의 협력으로 소라치 민중사 강좌의 유족조사 및 유골반환 운동은 계속되고 있다.







같이 고향으로 돌아가면 좋았을걸...





“아마 내가 못 받은 돈이 10~20만원은 될끼다. 생각하면 억울하다.”

이상석 할아버지는 자신이 받지 못한 임금을 당시 작업반장이었던 평양 출신의 아라이(新井 또는 荒井, 박씨)라는 조선 사람이 가져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댐을 건설한 회사는 일본 유수의 대기업 미츠이 계열의 오지제지(王子製紙)이며, 이 회사는 지금도 홋카이도 토마코마이(苫小牧) 일대에 거대한 공업단지를 운영하고 있다.

“찾을 수 있다면 찾고 싶지.”

67년 만에 홋카이도를 찾은 이상석 할아버지는 소라치 민중사 강좌의 주선으로 오지제지 회사를 찾아가긴 했으나, 강제노동에 대한 인정도 사죄도 보상에 대한 그 어떤 해답도 들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찾아 슈마리나이로 초대해 준 소라치 민중사 강좌의 도노히라 대표를 비롯한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이상석 할아버지는 엉엉 소리내어 눈물을 흘리며 “아리가또 고자이마쓰(고맙습니다)”를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빼앗긴 자신의 청춘을 되찾기 위한 이상석 할아버지와 소라치 민중사 강좌의 운동은 이제부터가 시작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동료였던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을 대면하는 이상석 할아버지





“나는 오래 살아서 호강하고 여기도 다시 왔지만, 같이 고생한 사람들 유골을 보니 마음이 아프지... 같이 고향으로 돌아가면 좋았을걸...”

고향에 들르지 못하여 저승길로 떠나지 못한 채 홋카이도의 땅에 유골로 남아있는 희생자들. 이제는 아흔의 노인이 되어버린 청년 이상석의 회한이 담긴 위로에 억울하게 죽어간 그 분들이 조금이라도 위안을 받았다면 하고 바랄뿐이다.



아직도 홋카이도를 비롯한 일본 전역에는 고향의 가족들을 그리며 고향 땅의 산과 강을 그리며 구천을 떠돌고 있을 수많은 식민지 조선의 젊은 영혼이 징용자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고향엘 들러야 저승길 간단다. 달아 높이곰 올라라”







김영환(평화박물관 활동가)

『역사교육』, 전국역사교사모임, 2011 봄 92호, 171~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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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자 2018-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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