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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연] 북으로 간 조선인원폭피해자들 (전시초청 <히로미사, 평양> 이토 타카시 감독)
작성일자 2018-08-17




[강연] 북으로 간 조선인원폭피해자들(전시초청 <히로시마,평양> 이토 타카시 감독)







올해는 해방 70년이자 원폭 70년이 되는 해로, 1945년 8월 6일과 9일 두 발의 원자폭탄으로 약 68만 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그 속에는 7만여 명의 조선인이 있었습니다. 4만여 명이 목숨을 잃고 살아남은 3만여 명 중 2만 3천여 명이 남으로, 3천여 명이 북으로 고향을 찾아 돌아갔습니다.

1945년 8월 15일 한반도의 조선인들은 광복의 기쁨을 누렸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있던 조선인들은 다친 몸을 이끌고 원자폭탄에 희생당한 부모형제를 찾아 헤매야 했습니다.

70년이 흘렀습니다. 수많은 한국인원폭피해자들이 병고와 가난 그리고 소외 속에 세상을 떠났고, 여전히 이들의 삶은 70년 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그 참담했던 시간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현재 일본의 원폭피해자 생존률이 35%가 넘는 것에 반해 한국인 원폭피해자 생존률은 3.5%에 불과한 현실은 이들의 처지를 가장 잘 보여줍니다. 2015년 현재 한국에는 2,545명(한국인원폭피해자협회 기준)의 한국인 원폭피해자가 남아있을 뿐입니다.

‘피폭자는 어디에 있어도 피폭자’라는 판결을 끌어낸 한국인원폭피해자 곽귀훈씨의 재판 이후, 2000년대 일본에 살지 않는 외국인 피폭자들에게도 건강관리수당과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피폭자건강수첩’이 발급되었지만, 그 적용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북으로 간 조선인원폭피해자들입니다. 현재 북한의 원폭피해자는 일본정부에서 발행하는 피폭자건강수첩을 받지 못하며, 현재의 북일관계에서 그들이 건강수첩을 취득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버려지고 소외된 북한 피폭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히로시마, 평양>의 이토 타카시 감독에게 들어보았습니다.

이토 타카시 감독은 일본의 과거와 현재를 아시아 사람들의 관점에서 취재해왔습니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1) 일본의 아시아 침략과 식민지 지배로 인한 피해자 문제 2)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의 일본의 대규모 환경파괴입니다.

이토 감독은 지난 30년 동안 일본이 식민지 지배를 하거나,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군대를 파견한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700명에 가까운 많은 피해자들을 취재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히로시마, 나가사키 피폭자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듣는 데에 힘을 쏟았습니다. * 지난 6월 이토 타카시 감독이 다녀온 북한 일본군 위안소 이야기는 9월호 뉴스레터에서 계속됩니다.

1981년부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촬영을 시작한 이토 감독은 1983년이 되어, 피폭자 중에는 한국인과 조선인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사는 재일 조선인 피폭자들을 취재했고, 다른 지역에 사는 피폭자들도 취재하려 했지만, 그들 자신이 피폭자라는 사실과 재일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숨긴 채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한 사람도 만날 수 없었다고 합니다. 1985년에 일본인 피폭자들과 함께 처음으로 한국에 방문하여 원폭피해자협회 본부와 지부를 방문했는데, 장소마다 경찰관이 함께 동석하여 피폭자들의 증언을 들었습니다. 취재는 대만과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일본이 침략하고 식민지배를 했던 아시아 태평양의 여러 나라들로 범위가 넓어졌지만 북한만은 취재를 하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노력 끝에 1992년에 처음으로 방북을 했고, 1998년부터 북한의 원폭피해자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래는 지난 8월 13일 스페이스99에서 열린 <히로시마, 평양> 북으로 간 조선인원폭피해자 토크행사에서 이토 감독이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약 7만 명의 당시 조선인 원폭피해자들 중 3천여 명이 북으로 돌아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북한의 원폭피해자들로 모두 1959년부터 시작된 귀국사업으로 건너간 사람들입니다.

1992년에 히로시마의 조선인 피폭자가 북한정부에 촉구한 것을 계기로 북한에서 처음으로 피폭자 조사를 실시했고, 1995년경에 ‘조선피폭자협회’가 결성되었습니다. 2007년에 발표된 북한 피폭자 조사를 통해 1911명의 피폭자가 확인되었습니다. 그 중 1529명이 이미 사망했고 생존자는 382명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의료나 식량이 충분하지 못한 북한에서는 피해자들의 수명이 짧고, 2007년부터 8년이 지난 2015년 현재에는, 생존한 피폭자의 수는 더욱 줄었을 것입니다.

일본정부는 유독 북한의 원폭피해자만을 피폭 범주에서 제외시키고 있습니다. 일본정부는 ‘피폭자건강수첩’을 통해 피폭자들에게 의료지원과 생계 수당 등을 지급하는데, 이 복지정책에서 해외에 사는 피폭자들은 배제되어 왔습니다. 그러다가 한국과 남미에 사는 피폭자들의 끈질긴 투쟁의 결과로 재외피폭자들에게도 지원의 길이 열려 일본과 국교 성립이 안되어 있는 대만을 포함하여 다른 나라에 있는 피폭자들도 원호조치를 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여기에서도 북한의 피폭자는 제외되었습니다.

일본정부는 한국 피폭자들에게 한 것처럼, 피폭자를 일본으로 초대하여 검사 및 치료 혹은 북한 의사들에게 피폭자 치료 교육할 것을 검토한 적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 2001년에 일본정부조사단이 평양으로 파견되었고, 피폭자 실태조사 후에 지원을 검토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현재 북일 관계 악화에 따라 완전히 중단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즉, 북한의 원폭피해자들은 일본정부에 의한 보상은커녕 인도적인 지원조차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히로시마 · 평양>에 등장하는 리계선 씨는, 1945년 당시 세 살로 히로시마 근처에 살았습니다. 그는 조선 귀국 수당을 준다는 소문에 어머니와 함께 히로시마현청을 찾아가는 과정에 피폭 당했습니다. 이후 민족의식이 남달랐던 부모의 권유와 경제적인 문제로 일본 대학에 진학할 수 없어 가족 중 혼자서만 북한으로 귀국한 뒤 평생 원인을 알 수 없는 온갖 병에 시달리다가 2004년에야 일본에 사는 어머니한테서 자신이 피폭자라는 사실을 전해 들었습니다.

2015년 6월에 오랜만에 리계선 씨를 다시 만나 이전과는 조금 다른 입장을 들었습니다. 피폭자 수첩을 받기를 간절히 바랐었던 리계선 씨는 이번에 만났을 때는 “우리가 죽기를 기다리는 것 같은 일본정부에게 더 이상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영화의 출연자 중 한 명인 박문숙씨는 매월 한 두 번은 심장발작을 일으켜 병원에 실려가는데, 그도 “오랫동안 일본사람들에게 보상을 촉구했지만, 일본정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먼저 요구할 마음은 없습니다”라고 밝혔습니다.

북한의 원폭피해자는 ‘수첩’ 취득이나 의료지원에 대해 일본에 기대를 걸었던 적이 있지만, 무엇 하나 실현된 것이 없어, 한 때 기대를 걸었던 피폭자들은 결과적으로 일본정부에게 농락당한 셈이 되었습니다.

2015년 올해 원폭기념일에 대한 일본 언론의 보도는 일본 사람들의 원폭 피해만을 다룰 뿐, 한국인과 조선인 피폭자에 대한 언급은 없었습니다. 일본정부와 국민들의 기억에서 일본이 행한 가해의 사실은 점점 지워져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