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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특별기획 | 임정의 국로 동농 김가진 ② 위정척사파에서 개화파로 … 외교관의 길을 걷다 (내일신문, 190415)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특별기획 | 임정의 국로 동농 김가진 ②] 위정척사파에서 개화파로 … 외교관의 길을 걷다

고종 특명으로 비밀외교 활동 … 일본에서는 친청, 청은 친러, 러시아는 친일로 봐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2019-04-15 11:20:09 게재

김가진이 처음부터 개화사상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개항 직후인 1881년에 지은 한시를 보면 김가진도 당시의 대다수 선비들이 그랬던 것처럼 위정척사사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김가진은 개항으로 서양세력에 의해 유교문명이 더럽혀질 것을 우려하면서 성인이 다시 태어나서 서양 비린내를 깨끗이 씻어내기를 염원하였다. 개항 초기의 김가진에게 서양과 일본은 조선을 더럽히는 금수와도 같은 존재였다.

김가진이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개화사상을 품게 되었는지는 자세하게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전 회에 소개한 이조연을 통해서였음은 분명하다. 김가진이 1882년 말에 작성하여 정계의 실세에게 올린 일종의 정책 건의안을 보면 그는 성리학적 입장에 서서 서양 문물 중 우수한 것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자고 촉구하고 있다. 김가진이 특별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한 서양문물은 ①무기와 농기기 ②함선 ③광산 ④인사제도 등이었다. 이 내용은 김가진과 일찍부터 교류했던 김홍집, 이조연 등이 일본에서 가져온 청국의 사상가 정관응(鄭觀應)의 '이언(易言)'의 내용을 크게 참작한 것이었다. '이언'은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과 함께 당시의 정계에 큰 파장을 불러온 책으로, 조선에서 원문과 한글번역본이 모두 발간되었다.

이 글에서 김가진은 12가지 항목의 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그 내용은 조선의 전통적 지식인들의 개혁방안과 동도서기론적 입장에 선 온건개화파의 주장이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급진개화파 김옥균이 강조한 도로의 개축과 울릉도 개발 등도 포함되어 있다. 위정척사파에 가까웠던 김가진의 생각이 일본 명치유신의 주역들이 그랬던 것처럼 1~2년 사이에 급격히 변한 것이다. 조선의 위정척사파에서는 이런 변신을 이룬 사람이 거의 없었다. 김가진보다 한 세대 뒤에서도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가 최익현 휘하의 소년의병이었다가 개심하여 변호사로 거듭난 것이 희귀한 사례였다. 김가진 세대에서 급변하는 시대에 개화의 길에 나선 사람은 적지 않았지만, 시대의 급류에 쓸려버리지 않고 김가진처럼 민국의 신민(新民)으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은 드물었다.
1887년 도쿄에 개설한 조선공사관. 태극기가 게양돼 있다. 주일공사관은 우리나라 최초로 근대적인 외교공관으로 김가진은 참찬관으로 부임해 곧바로 대리공사를 거쳐 정식 공사로 승진했다. 문서 사진은 민영준과 김가진을 주일 외교관으로 파견한다는 조선정부의 신임장.

개항의 일선에 서서

김가진은 위의 정책 건의안을 올린 직후인 1883년 1월 20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로 임명되었다. 이때의 '주사'라는 직함은 지금과는 달리 상당한 권한이 주어진 요직이었다. 같이 주사로 임명된 사람들은 김사철 남정철 서상우 정헌시 윤기진 등 문과에 급제한 소장 엘리트 관료들이거나, 고영철, 유길준과 같이 해외 여행과 체류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아직 문과에 급제한 것도 아니고, 해외여행 경험도 없는 김가진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로 임명된 것은 그의 탁월한 능력과 아울러 이조연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가진이 막 자신의 역량을 펼치려 할 때 계모인 달성 서씨가 세상을 떠났다. 3년상을 치르는 법도대로 한다면 만 2년을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고종은 김가진에게 뜻밖에도 기복(起復), 즉 상중이지만 관직에 나오라는 명을 내리면서 그를 감리인천항 통상사무아문 주사(監理仁川港通商事務衙門 主事)에 임명하였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일본의 화륜선이 제물포에 정박하여 사악한 금수처럼 조선을 더럽히는 것을 개탄하던 김가진이 이제 인천항의 실무 책임자가 되어 조계지를 정하고 항만을 관리하고 무역사무를 처리하는 일체의 일을 전담하게 된 것이다. 김가진은 1885년 8월까지 꼬박 2년간 인천에서 일했는데, "우리나라의 개항과 통상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자필이력서에 서술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갑신정변은 김가진이 한참 인천에서 개항사무를 담당하고 있을 때 일어났다. 김가진은 원래 갑신정변의 김옥균 등 주역들과 각별한 사이였다. 김가진이 김옥균 보다 다섯 살 위였지만, 같은 안동 김씨로 김옥균이 한 항렬 위였다. 며느리 정정화의 회고에 따르면, 김가진은 박영효와는 "흉허물 없는 우정을 나누는 사이"였다. 그런 친구들이 김가진의 최고의 벗 이조연을 죽이는 비극이 일어난 것이다. 멀리 인천에서 개화의 최일선에 있었던 덕에 김가진은 급격한 정변에 휘말리지는 않았다. 김가진이 이조연 제문에서 급진개화파를 '흉역'으로 비판한 것에 비추어 볼 때, 갑신정변 당시 김가진은 이조연처럼 근왕주의와 동도서기론에 입각하여 보수적이고 점진적 개혁노선을 밟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종의 최측근으로

이조연이 피살된 후 고종은 이조연에게 걸었던 기대와 총애를 그가 생전에 강력 추천했던 김가진에게 돌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가진은 2년여의 인천 근무를 끝내고 1885년 8월 내무주사에 임명되었다. 고종은 김가진을 특별 대우하여 주야로 세 번이나 불러 개화정책을 논의했다. 고종은 김가진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보총사를 설치했고, 김가진을 우정사 총판에 임명하여 전보와 우정업무를 총괄하도록 했다.

이듬해인 1886년 2월 김가진은 고종의 명으로 예비 시험을 거치지 않고 바로 전시를 보게 하는 특혜(直赴殿試)를 입어 꿈에도 그리던 문과에 급제하였다. 문과 급제 후의 첫 관직은 문과 급제자들 중에서도 극히 우수한 사람들만 임명되는 홍문관의 부수찬(弘文館 副修撰)이었다. 이 무렵 김가진은 서울의 동쪽인 마장리와 남쪽인 청파 두 곳에 서양식 종목국(種牧局)을 설치하고, 국내외에서 말 소 양 돼지 등 가축과 나무 채소 과일 등의 씨앗과 묘목 등의 품종개량에 힘쓰기도 했다.

김가진은 일본쪽에서 보기에는 친청파였고, 청나라쪽에서 보기에는 친러파였고, 러시아쪽에서 보기에는 아마도 친일파였을 것이다. 김가진 스스로는 그 어느 외세에 결탁한 것도 아닌 왕당파였다. 김가진의 관료경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외교관으로서의 활동이었다. 김가진처럼 왕의 총애를 받아 특별히 일종의 비공식 비서 역할을 하는 사람을 '별입시(別入侍)'라고 불렀는데, 내무주사 김가진은 고종의 특명을 받아 비밀외교활동에 투입되었다. 김가진은 특히 미국인 고문관으로 내무협판을 맡은 데니와 고종 사이의 연락을 담당했다.

일본측은 당시의 김가진을 원세개의 추천을 받아 요직에 오른 청국당으로 분류했다. 그렇지만 김가진은 갑신정변 이후 부쩍 강화된 청의 강압적인 내정간섭을 벗어나기 위한 반청자주노선을 추구했다. 김가진은 고종과 중전 민씨의 밀명을 받아 내무부주사 김학우, 전양묵, 죽산부사 조존두, 러시아어 통역 채현식 등 다른 별입시들과 더불어 러시아 공사관에 드나들며 러시아 공사 베베르에게 러시아가 청나라에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중단케 해 달라고 부탁했다. 만약 청이 이를 거부할 경우, 러시아가 군함을 파견하여 조선을 보호해줄 것을 요청하는 비밀문건도 전달했다.

그러나 민씨 척족의 핵심인 민영익은 이런 움직임을 청에 밀고했다. 임오군란 이후 일종의 '조선총독'처럼 군림하던 청의 원세개는 1886년 7월 17일 김가진 조존두 김학우 전양묵 등 별입시들을 멀리 귀양 보내게 했다. 김가진도 남원으로 귀양가게 되었으나, 고종은 7월 25일 이들을 모두 특별석방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들이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와 미국공사관 측에서 일정하게 개입한 덕이었다.

김가진이 공식적인 직함을 갖고 외교관 생활을 시작한 것은 1886년 10월 청국 천진주재 종사관으로 임명되면서부터이다. 한로밀약사건으로 청으로부터 처벌을 요구받은 김가진이 청에 외교관으로 파견되어 한로밀약사건을 해명하고 그에 대한 중국의 반응을 고종에게 보고해야 하는 쉽지 않은 임무를 맡았다. 김가진은 1887년 5월 신병을 이유로 종사관 직을 물러났지만, 불과 2주일 후 고종은 김가진에게 새로운 중대한 임무를 맡겼다.
일본공사관이 본국과의 교신 때 사용하던 암호문. 한글의 특성을 이용해 자모를 바꾸는 등 2가지 방식의 암호문을 사용했다.

반청자주외교의 일선에 서서

1887년 5월 고종은 도승지 민영준을 주차 일본 판리대신(駐箚日本辦理大臣)으로, 김가진을 참찬관으로 임명했다. 그런데 민영준은 일본에 가 고종의 국서만 봉정하고 한 달 만에 귀국해 버렸기 때문에 주일공사관의 개설에서부터 공관 운영의 모든 사무를 실질적으로 책임진 것은 김가진이었다. 고종은 조선에 주둔하며 온갖 행패를 부리는 청의 원세개가 자신의 폐위까지 추진하자, 조선의 독립에 대해 다른 나라들로부터 지지와 승인을 얻으려 하면서 일본의 공사관을 개설하려 한 것이다.

한 가지 흥미 있는 점은 민영준 김가진 일행이 일본으로 부임하기 전에 원세개가 주일본청국공사 서승조(徐承祖)에게 보낸 서한에서 민영준이 무능하고 그 자리에 오래 있을 수 없으며, 그가 "만약 그 직을 수행하고 돌아오면 김가진이 대신 맡을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측했다는 사실이다. 조선은 지난 500여 년 화이관에 입각한 위계적 조공체제에 안주해 왔다. 이제 조선은 19세기 말 '만국공법'의 새로운 국제질서 속에서 청의 속방이 아닌 독립자주국으로서의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김가진이 선 자리는 바로 그 최전선이었다. 약소국의 외교관으로서 김가진은 "모든 움직임은 예로써 하여 임금의 명령을 욕되이 하지 않는다"와 "모든 행동은 신의로써 하여 나라의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원칙하에 도쿄에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1887년 8월 5일 조선공사관에는 태극기가 처음으로 게양되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근대적인 외교공관이 해외에 문을 연 것이다. 김가진은 참찬관으로 부임했지만 곧 대리공사를 거쳐 정식 공사(주차일본국판사대신)로 승진했다.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김가진은 일본을 통한 신문물의 수입과 반청자주독립의 실현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일본의 "정치 법률 군제 사회 농상공업 등의 좋은 법규(美規)는 모두 마음에 담아두었다가 귀국 후 따라 행한 것이 많았다"고 스스로 회고했다. 김가진은 홍콩에 망명해 있는 민영익과 연락하여 원세개의 본국송환을 추진했으며, 주일청국공사 여서창(黎庶昌)에게도 원세개의 소환을 요구하는 문서를 전달했다. 김가진은 또 인천과 황해도 철도(鐵島) 사이의 기선 운항을 추진하여 청의 조선에 대한 이권침탈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청은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강조하면서, 조선이 독자적인 외교활동을 펴는 것을 여러 가지로 방해하려 했다. 원세개는 고종이 박정양을 미국의 공사로 파견하려 하자 조선의 외교 사절은 ① 주재국에 도착하면 먼저 청국공사를 찾아와 그의 안내로 주재국 외무성에 간다 ② 조선 공사는 회의나 연회에서 청국공사의 밑에 자리를 잡는다 ③ 조선 공사는 중대사건이 있을 때 반드시 청국공사와 미리 협의한다는 내용의 '영약3단'이라는 굴욕적인 조건을 강요했다. 김가진은 이의 철폐를 위해 노력했다. 김가진은 청국공사 왕봉조(汪鳳藻)가 공개석상에서 "동양에서 독립국은 청국과 일본뿐"이라고 연설했을 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연단으로 나가 "한국은 독립국이다. 오랜 역사와 사직을 갖고 있는 독립국이다. 누가 황당무계하게 우리나라를 욕되게 하고 다른 나라에 예속되었다고 말하는가"라고 부르짖어 도쿄 외교가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김가진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선이 독립국임을 강조했다. 1890년 10월 경 일본 외무대신 아오키 슈조(靑木周藏)와 나눈 대화에서 아오키가 조선을 반(半)독립국이라고 폄하하자 "조선은 요임금 때부터 국가와 임금이 있던 유서 깊은 나라"라며 "중국과의 싸움에서 패한 적은 있어도 이제까지 한 번도 지배를 받은 적은 없다"면서 "조선의 국왕은 일언일령(一言一令)을 자주(自主)하고 있다"며 조선이 독립국임을 천명했다.

머리가 아직 어깨 위에 붙어있어 다행

김가진의 유품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으로 김가진이 주일공사로 근무하던 시절 본국 정부와의 교신을 위해 사용한 암호문이 있다. 주일한국공사관과 본국 정부는 한글의 특성을 이용한 두 종류의 암호문을 써서 서로 교신하였다. 그 하나는 '일전횡간(一轉橫看)'이라 하여 자음과 모음의 위치를 바꾸는 것(예, 교셥→녀숍)이고, 다른 하나는 '재전환자모법의횡간(再轉換字母法依橫看)'이라 하여 자음과 모음의 위치와 순서를 동시에 바꾸는 것(예, 교셥→펴욥)이었다.

고종과 중전 민씨가 주일공사 김가진에게 부여한 주요한 임무의 하나는 갑신역적, 즉 김옥균과 박영효 등의 동향을 감시해서 보고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김가진은 민씨 척족세력의 부패와 무능으로 인해 조선이 개화와 부국강병을 이뤄야 할 골든타임을 놓쳐버리고 있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김가진은 주일공사가 되어 이들을 감시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지만, 민씨 일파의 무능과 탐욕은 갈라졌던 김가진과 김옥균, 박영효를 다시 손잡게 만들었다. 김가진은 김옥균, 박영효 등이 이홍장, 흥선대원군과 내통하여 민씨 척족정권을 타도하려는 계획을 추진할 때 이에 가담한 것이다.

민씨 척족의 일원으로 김가진이 주일공사가 된 것을 질투했던 김사철은 중전 민씨에게 김가진을 "시세에 편승해서 민씨에게 화를 입힐 것이니 빨리 그를 퇴임시키지 않으면 후환이 미칠 것"이라고 중상했다. 김사철은 마침내 1891년 3월 김가진을 몰아내고 주일공사가 되었다. 김가진이 영국인 새비지-랜도어(Arnold H. Savage-Landor)를 만난 것은 주일공사에서 해임되어 본국으로 돌아온 직후였던 것 같다. 새비지-랜도어는 1895년 Corea or Cho-se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이라는 견문기(신복룡 외 역,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1999, 집문당)을 남겼다. 조금 길지만 새비지-랜도어가 남긴 매우 흥미 있는 기록을 살펴보자.
새비지 렌도어가 그린 김가진 초상(1891년). 새비지 랜도어는 조선을 돌아본 후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이라는 견문기를 썼다.


나는 운 좋게 김가진이라는 조선의 거물 정치인과 잘 알고 지냈는데, 실내에서 항상 말총 두건을 쓰고 있는 그의 모습을 그려 주기도 했다. 그는 박학다식하고 재기가 출중했으며 내가 만난 수많은 훌륭한 외교관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외교관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를 쩔쩔매게 할 수는 없었다. 질문에 대답하면서 그보다 더 예리하고 철저하게 준비하여 대응하는 사람을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그는 한때 조선의 사절로 일본 막부(幕府)에 파견되었는데, 매우 짧은 시간에 일본어를 완벽하게 숙달했다. 그는 중국어에도 아주 능통했다. 나는 그가 쉽게 영어 단어를 암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그는 공부를 시작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아 아주 짧은 시간에 실제로 며칠 내에 영어를 이해하고 읽었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는 의사소통도 했다.

김가진은 다재다능할 뿐만 아니라 대단한 용기와 독립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왕의 측근의 대부분의 간사하고 모함을 일삼는 관리들은 종종 그가 왕과 마찰을 일으키도록 유도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머리가 어깨 위에 붙어 있다는 사실이 매우 경이로운 일이라고 익살맞게 얘기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했고 다른 사람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는 열렬한 개혁가였고 서구 문명을 극찬했다. 그의 가장 큰 희망은 얘기로만 숱하게 들어 왔던 영국과 미국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같은 대화를 나눈 바로 다음날 아침, 그는 사소한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 때문에 왕명으로 가장 먼 지방으로 귀양을 갔다.

위에 김가진이 먼 지방으로 귀양을 갔다는 것은 주일공사에서 안동부사로 좌천된 것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뛰어난 외교관' 김가진이 격동의 시기에 '머리가 어깨에 아직 붙어 있는 것'을 경이롭게 여길 정도의 칼날 위의 삶을 산 것은 분명했다.

*중국인명은 국립국어원의 외래어표기법에 따라 1911년 신해혁명 이전은 한국식 독음으로 이후는 중국어 발음으로 적습니다.
 
한홍구 교수는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민주자료관장 △서울대 국사학과 및 동 대학원 △워싱턴대학교 사학과 Ph.D. △국정원 과거사위 위원(전)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상임이사(전)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책임편집인(현) △저서 : '대한민국사 1~4' '유신' '사법부'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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