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제목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특별기획 - 임정의 국로 동농 김가진 ① 대한제국 고관 중 유일하게 '민국'의 배에 오르다 (내일뉴스, 190408)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특별기획 - 임정의 국로 동농 김가진 ] 대한제국 고관 중 유일하게 '민국'의 배에 오르다

 

국내 최대 비밀결사 대동단 총재 자격으로 임시정부 망명 임정에서도 최고 어른 '국로'로 모셔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2019-04-08 12:47:56 게재

 

31운동 100, 임시정부 100년을 맞으며 자주 듣게 되는 명제가 "제국에서 민국으로"이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나는 분이 임시정부에서 최고 어른인 '국로(國老)'로 모셨던 동농 김가진 선생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는 국권을 회복하면 제국이 아닌 민국을 세우겠다며 낡은 과거와 단절을 선언하면서도,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일어나자"고 선언함으로써 역사의 계승을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매우 상징적이다.

    

김가진은 민국이라는 새로운 배에 올라탄 최고령자였고, 망해 버린 제국의 대신 중에서는 유일하게 임시정부에 합류한 분이다. 김가진은 단지 나이가 많고 벼슬이 높았기 때문에 주목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갑오개혁의 주역인 그는 개화운동의 핵심으로서는 유일하게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나라가 망할 때 그가 일본이 던져 준 남작이라는 귀족 작위를 거절하지 못한 것은 그의 생에서 큰 오점이라 할 수 있지만, 일본제국의 귀족이라는 지위를 버리고 대한민국의 평민이 되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당시에 일본의 조야나 국내의 민중이나 해외의 독립운동 진영에 큰 충격을 주었다.

  

상하이 망명시절의 김가진.

김가진이 상하이 임시정부를 찾아왔을 때 그의 나이는 74. 김가진이 오기 전까지 임시정부에서 제일 큰 어른은 국무총리 이동휘의 아버지였던 68세의 이발이었다. 이발이 31운동 직후 대한노인단을 결성할 때 회원의 가입 조건이 46세였던 것을 보면, 100년 전 74세라면 지금으로 치면 90도 훨씬 넘었을 나이였다. 그 김가진은 현역이었다. 31운동의 충격 속에 탄생한 국내 최대의 비밀 결사가 대동단이었는데, 김가진이 바로 대동단의 총재였던 것이다. 김가진의 망명은 단순히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대동단 총재 김가진이 임시정부의 안창호와 연락하여, 연통제 조직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김가진의 망명 실행은 연통제 최고의 성공 사례라 할 수 있다.

    

김가진을 주목하는 또다른 이유는 김가진 본인과 아들 내외, 손자, 증손녀로 이어지는 4대에 걸친 삶의 궤적이 민국이 헤쳐 나가야 했던 길 없는 길을 잘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의 큰 흐름은 해방 직후 통일운동으로 이어졌고, 그 흐름은 또다시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으로 계승되었다. 김가진-김의한정정화-김자동-김진현김선현으로 이어지는 가계는 개화운동-독립운동-민주화운동통일운동-노동운동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현대사의 큰 흐름을 한 집안의 역사 속에서 보여 주는 드문 경우이다.

    

납득할 수 없는 서훈 보류

    

안타까운 것은 김가진의 명을 받아 만세시위나 군자금 모집에 나선 공로로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은 분이 80여 명이 되고, 고령의 아버지와 시아버지를 모시려고 차례로 망명길에 오른 아들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가 독립유공자가 되었음에도 정작 김가진만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서훈이 여러 차례 보류되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미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독립선열들 중에 독립유공자가 되기 위해 독립운동에 나선 분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김가진의 유족들이나 그의 생애를 깊이 들여다본 연구자들이 김가진의 서훈을 바라는 현실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그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셔 와야 하기 때문이다.

    

백범 김 구 선생이 귀국해서 제일 먼저 행한 일이 안중근 의사 등 해외에서 순국한 독립선열의 유해를 모셔 오는 일이었다.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 등의 유해는 다행히 모셔 올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지금껏 소재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어디 안중근 의사뿐이랴. 그런데 김가진 선생의 유해는 묘소의 위치를 아는데도 모셔 오지 못하고 있다. 김가진이 서거한 뒤 임시정부의 모든 요인들이 나서서 정성껏 장례를 치르고 상하이 만국공묘에 모셨지만, 이곳이 이제 쑨원의 부인인 쑹칭링을 기념하는 공원이 되어 정부 차원이 아니고서는 국내로 모셔 올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김가진에 뒤이어 만국공원 김가진의 묘소 주위에 같이 모셔졌던 박은식 신규식 노백린 김인전 안태국 선생의 유해는 일찍이 1993년 국내로 봉환되었는데 말이다.

    

흔히 31운동은 남녀노소 모두가 참여한 거족적 운동이라고 말한다. 김가진은 31운동에 발벗고 나선 노인층 중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에게는 분명 강제 병합 당시 일제의 작위를 받았던 오점이 있다. 하지만 독립유공자 서훈에서는 '선 독립운동, 후 친일'은 결코 서훈 대상이 될 수 없지만, '선 친일, 후 독립운동'은 적극적으로 서훈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이 연재물은 두 달 간에 걸쳐 김가진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독자들 앞에 펼쳐 보임으로써 그의 서훈 문제에 대한 독자들의 판단을 구하고자 한다. 김가진의 며느리 정정화 여사는 대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잠들어 계시지만, 김가진의 아들 김의한은 한국전쟁 중 납북되어 평양의 애국지사릉에 누워 계신다. 김가진은 아무런 표지도 없이 쓸쓸히 상하이에 묻혀 있다. 가난했던 임시정부 어른들이 정성껏 세워 드린 비석은 문화혁명 홍의병들에게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죽어서도 한 데 모이지 못하고 남한과 북한과 중국으로 뿔뿔이 헤어진 이 기막힌 이산을 어떻게 하면 끝낼 수 있을까?

 

서얼 출신의 유명인들. 왼쪽 위부터 김가진 윤치호 민영기 안경수 이범진 이위종 이윤용 윤웅렬.

 

서얼이라는 설움

    

김가진은 세도가 당당했던 안동 김씨 노론 명문가 출신이지만, 서얼이었다. 조선 시대의 서얼 차별은 같은 유교 국가인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조선만의 독특한 악습이었다. 명문가 서얼은 일반인과는 비교할 수 없이 지체가 높고, 전문직에 종사하는 중인에 비해서도 훨씬 높았지만 양반의 적자와는 비교할 수 없는 차별을 당했다. 조선 전기에는 서얼금고법이 강력히 시행되어 서얼은 문과에 응시하는 것 자체가 금지되었다. 서얼금고법은 임진왜란 이후 점차 힘을 잃어가다가 숙종 22(1696)에 적어도 법적으로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러나 서얼이 과거에 급제하는 것은 매우 어려워 선조에서 영조까지의 문과 급제자 총 6685명 중 서얼 출신은 2.5 퍼센트인 164명에 지나지 않았다. 어렵게 문과에 급제한다 해도 서얼 출신이 높은 관직에 오른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서얼의 자손은 양반의 적녀(嫡女)와 결혼해도 서얼이기 때문에 양반 내에서 서얼 자손의 숫자는 적자 자손의 숫자에 비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옛날 영조가 서얼이 나라의 절반이라 하였고, 정조가 서얼을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게 하면 재주 있는 사람의 절반을 잃는다고 한 것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었다. 유교경전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서얼차대가 강력히 실시된 것은 양반의 적손들이 관직을 독점하기 위해 서얼을 경쟁에서 처음부터 배제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한 가지 흥미 있는 점은 당색에 따라 서얼문제에 대한 태도가 달랐다는 점이다. 당쟁에서 승리하여 일당독재를 누린 노론은 관직에 접근하는 것이 용이했던 탓인지 서얼을 등용하는 것에 상대적으로 관대했던 반면, 정권에서 밀려나 하급직 벼슬을 얻는 것도 어려웠던 남인은 그 제한된 기회를 서얼과 같이 누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적서차별의 철폐나 완화에 반대하는 경향이 강했다.

    

조선후기 서얼문제를 연구한 한 학자는 "모순투성이었던 노론계 척식정권이 쉽사리 무너지지 않고 반세기 이상이나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전인구의 반을 차지하는 서류들의 지지를 열렬히 받아왔다는 사실과 결코 무관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까지 주장했다. 

김가진은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을 만큼 재주가 출중했지만, 신분의 제약 때문에 서글픈 청년기를 보내야 했다. 아버지인 판서 김응균이 특별한 배려를 한 탓인지 김가진은 열여덟 살이 되도록 자신이 서자인지 모르고 자랐다고 한다. 법적으로는 서얼이 과거를 볼 수 있게 되었다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서얼 출신들에 대해 상당한 편견을 갖고 있었던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김가진이 사촌 처남 홍종헌이 영변부사로 갈 때 무관의 말직 중의 말직인 비장 자리를 얻지 못해 하루 종일 눈물을 흘렸다고 비꼬았다.

    

김가진이 서자인 처지를 가장 비관했던 날은 서자 아들을 많이 배려해 주던 아버지가 아마도 집안의 압력 때문인지 어느날 7촌 조카 김화진을 양자로 입적했을 때였을 것이다. 김응균에게는 똑똑한 친아들 영진과 가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사를 물려줄 적자를 양자로 들인 것이다. 서자는 나라에서 벼슬을 할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집안의 제사를 물려받을 수는 없었다. 노론이 공적 영역에서 서얼허통에 관대했다고 하지만, 사적 영역인 집안문제에서는 적자는 없고 서자만 있을 경우에 집안 조카 중에서 양자를 물색하여 제사와 재산을 상속케 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장벽을 뚫고

    

규장각 검서청 현판. 김가진은 32세에 규장각 검서관으로 첫 관직을 시작했다.

김가진이 처음 벼슬길에 나선 것은 개항 직후인 187732세의 나이에 규장각 검서관이 되면서부터였다. 정조 때 신설된 규장각의 검서관은 대대로 서얼들이 임명되었다. 최초의 검서관들은 4검서관이라 불린 유명한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이덕무(李德懋) 서이수(徐理修)였다. 김가진이 벗 이조연(李祖淵)도 이때 규장각에서 같이 근무했다. 처음 관직에 나가는 것이 어려웠지만 일단 관직에 나가자 김가진은 5년 만에 당하관으로서는 최고위 품계인 정3품 통훈대부에 이를 정도로 매우 빨리 승진했다. 아마도 그의 승진 비결은 뛰어난 학문과 글 솜씨 이외에도 일어와 중국어를 공부해 둔 것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김가진은 고종의 신임을 받아 별입시(別入侍)가 되어 고종을 측근에서 보필했고, 1886년 문과에 급제한 뒤 외교 일선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비단 김가진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서얼과 중인 출신들 역시 제각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황현은 "이조연부터 시작하여 그 후 이범진(李範晋) 김가진, 민치헌(閔致憲) 민상호(閔商鎬) 민영기(閔泳綺) 등과 이윤용(李允用) 윤웅렬(尹雄烈) 안경수 김영준(金永準) 등이 갑오경장 이후 교대로 대관이 되었으며 고위 관료의 다섯 중 셋은 서얼, 특히 노론의 서얼 출신"이라고 탄식했다. 

김가진은 서얼의 역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조선 500년 역사에서 서얼의 신분으로 1품에 오른 사람은 딱 3명으로, 조선 전기에는 간신으로 유명한 유자광(柳子光) 중기에는 선조 대의 허준(許浚) 그리고 후기에는 고종 대의 김가진 세 명뿐이다. 김가진과 안경수 등 갑오개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서얼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서얼문제를 포함한 모든 신분적 차별을 법적으로 철폐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법적, 제도적 차별을 없앤 것일 뿐이었고, 실질적인 차별이 사라지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31운동 당시에 조선의 수많은 정승, 판서, 대신들 중에 망명길에 나서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은 오직 김가진 한 사람뿐이었다. 양반의 나라 조선에서 대신으로 압록강을 건넌 이는 '서얼' 김가진뿐이었던 것이다. 서얼로 태어난 김가진의 생은 그 자체가 신분 차별의 악습에 대하여 고군분투의 연속이었다. 김가진 안경수 이윤용 등 서얼 출신들이 갑오개혁의 주역이 되었다는 것은 조선 후기의 자생적 근대화를 추동한 신분 타파 세력이 개화운동의 주역으로 등장했음을 보여 준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완용의 서형인 이윤용은 손꼽히는 친일파가 되었고, 안경수는 중도에 역모에 휘말려 처형되었다. 신분 타파 운동에서 개화운동을 거쳐 독립운동에 이른 이는 오직 김가진뿐이다.

 

김가진이 쓴 이조연 제문.

    

벗 이조연

    

젊은 시절 김가진에게는 서로 자나 깨나 잠시도 잊지 못하는 벗 이조연이 있었다. 스무 살 무렵부터 절친한 사이가 된 이조연은 김가진보다 세 살 위로, 명문 연안 이씨 가문의 서자였다. 이조연은 격동의 시기에 김홍집을 따라 일본에, 어윤중을 따라 청국에 다녀오는 등 일찍이 두각을 나타냈다. 김가진에게 가장 적극적으로 청나라 정관응이 저술한 서양 문물 소개서인 <이언> 같은 책과 외국 문물을 전해 준 것은 이조연이었다. 

1882년 문과에 급제한 이조연은 중전 민씨의 최측근이 되어 과거 급제 1년 만에 예조참판이 되고, 1884년에는 군대를 전후좌우 4영 체제로 개편할 때 좌영사가 되어 군권을 행사하는 등 초고속으로 권력의 핵심에 진입했다. 그러나 이조연은 1884124일 갑신정변 당시 사대당으로 지목되어 김옥균 일파에 의해 전영사 한규직, 후영사 윤태준 등과 함께 살해당했다.

    

갑신정변에 깊이 간여한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는 김옥균이 서문을 쓴 자신의 서울 체류 회고록 <한성지잔몽(漢城之殘夢)>에서 이조연과 한규직을 사대당(또는 청국당)이 아니라 러시아당으로 분류했으며, 원래 일본공사관에 자주 출입했었던 것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홍영식 등이 아니라 이조연과 한규직이었다고 쓰고 있다.

    

이조연은 청과도 깊은 관련을 맺었지만, 일본에 두 차례나 수신사의 종사관으로 다녀온 바 있는 손꼽히는 일본통이었고, 일본 측 입장에서 볼 때 러시아당으로 분류될 만큼 러시아와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쉽게 친청당, 친일당, 친로당으로 분류할 수 없는 인물로, 고종의 측근으로서 필요에 따라 외세와 가깝게 교섭한 근왕파 개화관료라 할 수 있다. 

이조연의 죽음은 김가진에게는 크나큰 충격이었다. 그런데 김가진이 남긴 이조연의 제문은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준다.

    

김가진은 "하늘이 우리 공(이조연)을 내셨으니 그 바탕이 자공(子貢, 공자의 제자)과 같았다. 일찍이 환재 박규수를 섬겨 친히 의발을 전수받으니 벼슬에 나가기 전부터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고 썼다. 박규수의 정통을 계승한 사람이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 급진개화파가 아니라 '사대당'으로 지목된 이조연이라면 이는 갑신정변에 대한 종래의 이해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 보아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홍구 교수는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민주자료관장 서울대 국사학과 및 동 대학원

워싱턴대학교 사학과 Ph.D. 국정원 과거사위 위원()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상임이사()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책임편집인() 성공회대 민주자료관장

저서 : 대한민국사 1~4, 유신, 사법부 외 다수


 

기사링크: http://www.naeil.com/news_view/?id_art=309419

첨부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