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제목 그가 고문 받던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오마이뉴스, 190306)

그가 고문 받던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탁본에 남긴 잔혹한 기억 ③] 조작사건 피해자 최양준씨의 증언
19.03.06 12:55l최종 업데이트 19.03.06 12:55l
    
기록에는 사진과 글 등이 있습니다. 이것들에 더해 사람의 기억을 탁본으로 남기고자 합니다. 간첩조작 사건에 연루돼 고문 등의 국가폭력을 경험한 분들의 기억 말입니다. 평범하기 이를 데 없었던 사람들의 고통과 삶을 질감으로 기록해 더 많은 사람들이 이를 기억할 수 있길 기대합니다.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자신의 손으로 기록하는 탁본 모임에 많은 지지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 시민단체 '지금 여기에'


"아, 글쎄 의정부에 살던 고종사촌이 예비군 훈련에 불참을 했대요. 그래서 예비군 대대에서 사람이 나왔는데 이야기 도중에 자기가 일본에 갔다온 이야기를 한 모양이에요. 그런데 어느 날 보안대 수사관들이 잡으러 왔다는 거예요. 그곳에서 얼마나 맞았는지 내가 일본에서 북한 간첩활동을 하고 있더라고 말을 한 거예요. 고종사촌이 예비군 훈련에 빠지지만 않았더라도 내가 일본에서 김해공항으로 입국해 곧바로 보안대로 끌려가지 않았을 것이고, 1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남영동 대공분실의 철문 앞에 다가가자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쏟아졌다. 37년 전인 1982년 보안대 수사관들에게 연행되었던 그날의 기억이 육중한 철문 앞에 다시 펼쳐지는 듯했다.

일본 밀항, 비극의 시작
 
 남영동대공분실 5층에 위치한 조사실 창문 방음벽
 남영동대공분실 5층에 위치한 조사실 창문 방음벽
ⓒ 지금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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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한국은 정말 살기 어려울 때였어요. 무슨 오일쇼크다 뭐다 해가지고 실업자가 동네 개들만큼이나 넘쳐날 때니까, 일자리 구하기가 너무너무 어려운 거예요. 어렵게 일자리를 구해도 급여가 너무 적으니 생활하기 너무 곤란한 거예요. 애들 공부도 시키고 해야 하는데 미래가 안 보이더라고. 그러다 알게 된 것이 일본으로 밀항하는 거예요. 밀항하면 돈을 많이 번다고 주위에서 기회만 되면 외국으로 나가려고 할 때니까. 그런데 그때 일본을 가지 말았어야 해. 가지 않았으면 간첩으로 몰리지도 않았을 거고, 인생이 이렇게 망가지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죠."

1975년 최양준은 죽음을 각오하고 밀항선 배 밑바닥에서 깡통 하나를 부여잡고 멀미와 대소변을 해결하며 밀항에 성공했다. 그후 1982년 일본 출입국관리소에 체포되어 오오무라 수용소에 수용될 때까지 불법체류자로 일본에서 이것저것 일을 하며 지냈다.

"비참하죠. 그냥 일본에 유학을 가거나 해도 일본 사람들이 차별할 때인데 밀항자 신분으로 불법체류하고 있다면 인간적인 대접은 기대하기 힘들다고 봐야 해요. 거기서 공사장을 돌아다니며 일을 했어요. 그러다가 상꼬 기업이라는 곳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거기 사람들이 아주 잘해줬어요. 그곳에서 일하면서 아주 알차게 돈을 벌었죠. 언젠가 돈을 모아 가족에게 돌아가 남부럽지 않게 화목한 가정을 꾸려보겠노라고 말이죠."

강제 송환
 
 고문받았던 조사실의 벽의 질감을 손으로 느끼며 탁본하는 최양준
 고문받았던 조사실의 벽의 질감을 손으로 느끼며 탁본하는 최양준
ⓒ 지금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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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있는 동안 가족이 너무 보고 싶어 위조 여권을 만들어서 한국을 왕래했어요. 일본 물건을 조금씩 사가지고 한국으로 입국할 때 내다 팔고 했지요. 별 문제 없었는데 1982년 5월경 일본 경찰이 저를 찾아왔더라고요. 여권이 위조된 걸 알고 찾아온 것이죠. '여권위반죄'라는 것으로 구속되면서 결국 일본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강제송환된 거예요.

일본 경찰들이 제가 한국에 위조된 여권으로 자주 왕래한 것을 두고 혹시 마약운반 한 것이 아니냐고 해요. 그래서 그런 것 없다고 한참을 해명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일본 경찰들이 이상한 소리를 해요. 일본에 있을 때 저에게 잘해 주었던 '최종수'라는 교포가 스파이 혐의가 있다는 거예요. 찜찜함은 있었지만 별 혐의점이 없어서 저는 그대로 한국 송환이 결정되었지요."


1982년 11월 17일 강제 송환된 최양준은 김해공항에 도착했다. 그를 처음 맞은 것은 가족이 아니라 생면부지의 남자들이었다.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웬 검은 옷을 입은 기관원들 같은 사람들이 최양준이냐고 묻더니 다짜고짜 데리고 가요. 더 조사할 것이 있다고... 지프를 타고 가는데 어느 건물입구에 도착하니 간판이 노르스름한 바탕에 검은 글씨로 '삼일공사'라고 써 있어요. 그 건물에 들어가서 지하로 나를 데리고 가는데 방이 그렇게 크지 않은데 바닥에는 빨간 카펫이 깔려 있고 책상이 두 개 놓여 있더라고요. 군용 침대, 각목, 일반 의자와 나무로 만든 큰 의자 1개, 시커먼 색으로 칠한 긴 판자로 만든 탁자가 하나 있었어요. 그리고 그 탁자에 어울리지 않는 군용 전화기와 철봉 같은 것이 있었고요."

지옥이 있다면 바로 여기
 
 남영동 대공분실 조사실 방음벽을 탁본하는 최양준
 남영동 대공분실 조사실 방음벽을 탁본하는 최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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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준은 그곳에서 지옥을 경험했다. 지금 최양준이 마주하고 있는 5층의 509호가 그랬다. 그곳은 인간을 파괴하는 곳이었다. 그는 더 이상 인간으로서가 아닌 포식자에 잡힌 짐승이었다.

"수사관이 그래요. '야 이 새끼야. 카펫이 왜 빨간 줄 알아? 너 같은 놈들이 들어오면 사실대로 말을 하지 않아서 두들겨 패서 흘린 피로 물든 거야. 전부 핏자국이야. 알아? 너 이렇게 안 되려면 사실대로 이야기 해라' 이렇게 협박을 해요.

그 때부터 군복으로 갈아입히고는 잠 안 재우고, 몽둥이로 때리고, 옷 다 벗겨놓고 성기와 엄지 손가락에 전기 고문하고, 철봉에 거꾸로 매달아 물 고문하고. 그 검은 탁자가 고문 탁자더라고요. 거기 묶어 놓고 전화기 돌려서 전기 고문하고.

이불을 꿰매는 대바늘로 손톱을 쑤시는 고문을 당하다가 너무 괴로워서 몸부림을 쳤는데 수사관이 구둣발로 몸부림 치지 말라고 손을 밟아 왼손 검지가 부러졌어요. 지금도 이렇게 휘어져 있다니까."


천천히 5층의 방과 복도를 거닐던 그는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수십 년이 지난 서울이 아닌 부산의 기억이었지만 여전히 생생했다. 지금도 저 문을 박차고 나오는 수사관들과 자신의 비명이 들리는 듯했다.

고문은 죽음의 고통보다 더 무서웠다. 정말 무서운 건 고문을 받고 있을 때의 고통이 아니라 고문 이후에 찾아오는 또다른 낯선 질문이다. 그 질문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면 또 다른 고문과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간첩 안 했다고 하니까 오전 내내 전기고문이 이어졌어. 그래도 안 한 걸 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냐. 나를 고문하던 수사관이 점심시간이 돼서 나가면서 그러더라고. '너를 오늘 죽여버리지 않으면 내가 사람 새끼가 아니다. 너 오늘 죽을 줄 알아' 하고는 나가는 거야."

탈출
 
 남영동 대공분실의 담벼락 위에 올려진 철조망. 최양준이 최초 조사받았던 부산보안대의 모습과 흡사하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담벼락 위에 올려진 철조망. 최양준이 최초 조사받았던 부산보안대의 모습과 흡사하다.
ⓒ 지금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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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고문을 받다가는 죽을 것 같아서 보안대 1층 화장실에 갔다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화장실 창문으로 빠져 나갔어. 나가서 보니 담장이 있는데 높이가 3미터쯤 되는 철망이 쳐진 담벼락이 있는 거야. 근데 살겠다고 마음 먹으니까 그 담장을 넘게 되더라니까. 철조망에 살갗이 다 뜯겨나가도 아픈 줄 몰랐어. 담장을 넘어 딱 뛰어 내리니까 밖에 쇠꼬챙이 같은 게 바닥에 박혀 있었는데 그게 발바닥을 뚫고... 아이고 난리도 아니었어. 그래도 살겠다고 도망을 쳤지."

그렇게 힘겹게 성공한 탈출이었지만 그는 곧 다시 보안대로 잡혀 들어갔다. 그러고는 서울 서빙고 보안대로 이송되었다. 이송될 때 부산보안대 수사관이 해주던 말이 아직도 귀에 남는다.
 
 4층 박종철기념관 내의 80년대 광주민주화 운동 사진 앞에서 회고하는 최양준
 4층 박종철기념관 내의 80년대 광주민주화 운동 사진 앞에서 회고하는 최양준
ⓒ 지금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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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아버지한테 빡빡 우기면 어찌 되냐, 뺨이나 한 대 더 맞기밖에 하겠냐. 근데 아버지한테 잘못했다고 하면 어떻게 되냐, 그래 용서해 주시지 않냐. 네가 법정에서 부인을 하면 우리가 조사를 잘못했다고 문책을 받는데 그러면 넌 여기로 다시 와서 우리한테 또 고문 당하는 거야. 근데 판사님께 가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면 판사님도 사람인데 너 용서하지 않겠냐. 너 이 정도는 사소한 일이니 기껏해야 집행유예 정도야. 너 정도는 3일이나 일주일 정도 있으면 집행유예 받고 석방될 것이니 석방되면 연락해라. 부산에 내려오면 소주나 한잔 하게."

수사관은 그렇게 말하며 떠나는 최양준에게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그러나 그는 수사관의 말대로 3일이 아닌 10년의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얼마 전에 부산 보안대 자리하고 서빙고 보안대 자리를 찾아갔더니 모두 없어졌더라고. 건물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서니 등골이 오싹하데. 그 건물에 아파트가 들어서 내가 고문 받은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어. 건물이나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그 사람들 여전히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 거 아냐. 적어도 그 사람들이 인간을 비참하게 고문한 것 정도는 사과해야 이게 정상적인 사회 아닌가? 내가 죽더라도 꼭 사과는 받아야지. 그러려면 여기에 우리가 고통 받았던 역사가 있었다 하고 남겨놔야 될 거 아니겠어? 그래서 내가 탁본을 하려고 하는 거야."
 
최양준은
   
 탁본 모임에 참석한 다른 고문피해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최양준
 탁본 모임에 참석한 다른 고문피해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최양준
ⓒ 지금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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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준은 1975년경 도일하여 노무자로 일을 하다가 불법체류자로 전락하여 생활하다 1982년 5월 25일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여권관리법 위반'으로 징역 3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오무라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같은 해 11월 17일 한국으로 강제 송환됐다.

김해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부산보안대 기관원들에게 연행되었으며, 현장감독인 재일조선인총연합회 오사카 본부 조직부장 최종수(북한의 대남공작지도원)에게 포섭되어 북한의 지령과 공작금을 받고 간첩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1983년 10월 11일 국가보안법 위반(간첩 등), 반공법 위반으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확정받아 10년간 복역하던 중 1992년 5월 25일 석가탄신일에 가석방되었다.


* 후원문의
☞ 국가폭력의 기억을 질감으로 남기는 사람들


[탁본에 남긴 잔혹한 기억]
그녀는 왜 남영동 대공분실 머릿돌을 탁본했나 http://omn.kr/1hjit
고문실의 문구멍은 거꾸로 뚫려 있구나 http://omn.kr/1hm1v
그가 고문 받던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http://omn.kr/1hm1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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