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제목 고문실의 문구멍은 거꾸로 뚫려 있구나 (오마이뉴스, 190305)

고문실의 문구멍은 거꾸로 뚫려 있구나

[탁본에 남긴 잔혹한 기억 ②] 조작사건 피해자 이사영씨의 증언
19.03.05 13:20l최종 업데이트 19.03.05 13:20l
    
기록에는 사진과 글 등이 있습니다. 이것들에 더해 사람의 기억을 '탁본'으로 남기고자 합니다.  간첩조작 사건에 연루돼 고문 등의 '국가폭력'을 경험한 분들의 기억 말입니다. 평범하기 이를 데 없었던 사람들의 고통과 삶을 질감으로 기록해 더 많은 사람들이 이를 기억할 수 있길 기대합니다.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자신의 손으로 기록하는 탁본 모임에 많은 지지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 시민단체 '지금 여기에'


탁본 모임 첫날 약속시각보다 10여 분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는 이사영 선생님을 만났다. 단정한 옷매무새에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는 외모는 늘 한결같다.

"선생님, 날씨도 추운 데 왜 이렇게 일찍 나와 계세요.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시려고요."
"막 도착한 거야. 옷 따뜻하게 입고 나와서 괜찮아. 다른 분들은 시간 맞춰 오시나?"


허허 웃으며 괜찮다고 말하는 노신사 이사영. 이사영은 1938년 11월 11일 전북 익산에서 태어났다.

1972년 2월 어느날
 
 피해자들과 함께 지난 과거를 기억하는 이사영
 피해자들과 함께 지난 과거를 기억하는 이사영
ⓒ 지금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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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이후 서울로 올라와 1965년 한양대학교 공대를 졸업하고 결혼을 했다. 그리고 두 딸을 낳은 뒤 뒤늦게 군대에 입대했다가 제대하고 어릴 때 일본으로 간 형 이좌영이 한국에 설립한 회사 신한섬유에 입사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삶이 무너진 건 1972년 2월이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평범했던 저녁시간을 보내고 있던 이사영의 집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아무런 설명도 이유도 없이 그들은 이사영에게 수갑을 채우고 옷을 덮어 씌웠다. 그렇게 끌려간 이문동 중앙정보부 고문실에서 이사영은 기약 없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을 수 십 번이나 써내렸지만, 멀쩡히 일본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형이 간첩 수괴라며 그에게 포섭되었다는 혐의로 징역 15년 형을 선고 받았다.

당시 신문 1면을 차지할 정도로 큰 사건이었던 '울릉도 거점 간첩단' 사건이었다. 중앙정보부가 울릉도 주민들과 일본에 농업연수를 다녀온 전북 지역 사람들을 엮어서 조작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세 명이 사형을 당했고, 네 명이 무기수의 삶을 살았다. 그 외 다른 피고인들 역시 15년 남짓의 형을 받아야 했다.

이 사건의 생존자였던 이사영은 수 십 년이 흐른 지난 2014년에야 무죄 확정 판결을 받을 수 있었다.

"저녁에 어두울 때 지하실로 연행됐어. 옆에는 사무실이 있었고 고문실이 컸던 게 기억나. 물고문 하는 욕조도 있었어."

이사영에게 남영동 대공분실은 또다른 이문동 중앙정보부였다. 무거운 마음으로 건물 안에 들어선 그는 위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승강기에 오르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철제 계단을 이용했다. 당시 연행된 피해자들이 수사관에게 붙들려 걸어 올라갔던 그 원통형 철제 계단이었다.

차가운 계단 
 
 5층까지 연결된 철제 계단은 가파르고 차가웠다
 5층까지 연결된 철제 계단은 가파르고 차가웠다
ⓒ 지금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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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문실이 있는 5층까지 쉼 없이 이어져있는 계단을 오르니 어느새 숨이 차올랐다. 철로 된 계단은 밟을 때마다 금속 소리를 토해냈고, 차가운 철제 손잡이를 잡은 손에 전해오는 냉기는 어디로 가는지조차 알 수 없었던 피해자의 마음을 더욱 차가운 공포심으로 몰았다.

5층에 올라 밭은 숨을 고르고 한참을 둘러보던 이사영은 문득 문에 달린 렌즈를 들여다보았다. 보통 문에 달린 조그마한 렌즈는 방의 안에서 밖을 보게 되어 있지만 고문실의 렌즈는 밖에서 안을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이곳의 쓰임이 무엇이었는지 짐작게 하는 장치였다.

"여기는 내가 있었던 곳이랑 많이 다르네. 이문동에는 이런 렌즈나 방음벽 같은 게 없었어. 지하라 소리를 질러도 밖에 들리지 않았으니까."
 
 고문이 시작되면 '소화가스방출중'에 불이 켜졌다고 한다.
 고문이 시작되면 "소화가스방출중"에 불이 켜졌다고 한다.
ⓒ 지금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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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보도록 설계된 고문실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보도록 설계된 고문실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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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벽을 쓸어내리며 걷던 그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다름 아닌 김근태 의원이 고문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는 515호실이었다. 고인을 기리는 전시물이 있는 공간에서 이사영은 그를 기억하는 글을 탁본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묵묵히 화선지 가득 김근태 의원의 기록을 옮긴 그는 이렇게 말했다.

"김근태 선생이 여기서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고통을 당했잖아요. 나는 그 영화(남영동 1985)에서 전기고문 같은 거 하는 거를 보니까 세상에 인간이 어떻게 그런 짓을 했을까. 그 후유증으로 제 명을 다 살지 못하고 가셨잖아요. 그 아픔이 이해되고 마음에 새겨지고."

"글도 읽기 어렵고 쓸 수도 없는 환경에서 오직 시만 볼 수 있었다는 게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참 우리가 형언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살아온 것이 꿈만 같고 사람 목숨이 참 질기구나 싶어요."


13년 감옥 생활, 그를 붙잡아준 붓
 
 김근태 전시실에서 담아온 탁본을 든 이사영
 김근태 전시실에서 담아온 탁본을 든 이사영
ⓒ 지금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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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역 15년 형을 선고 받은 이사영은 우리가 익히 아는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미결수로 지내다가 형이 확정된 후 대전·전주 교도소에서 출소 때까지 13년을 지냈다. 그 긴 시간 동안 이사영은 꾸준히 붓을 잡았다. 붓의 한 가닥 한 가닥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글씨를 쓰면서 아픔을 잊고자 했다. 김근태 의원에게 시가 있었다면 이사영에게는 붓이 있었던 것이다.

남영동을 떠나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탁본은 다름 아닌 '어두운 역사의 현장'이라는 글귀였다. 그는 지금에서야 많은 사람이 남영동 대공분실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지만 아직도 과거의 어두운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다.
   
"지금도 광주 민주화 운동을 이북 사람들이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래서 세상에 진실이 더 널리 알려지고 더 명백하게 나타나줬으면 좋겠는데 그게 아직 조금 부족한 감이 들어서 안타까워요."

시민의 돈으로 주는 배상금, 가해자는 어디 있나

그의 말처럼 무고한 사람을 간첩으로 조작하고 그 과정에서 고문과 폭력을 가한 사람들은 여전히 피해자 개인에게도, 나아가 사회에도 반성의 양심선언을 하고 있지 않다. 역설적으로 무죄임이 밝혀져 일말의 배상금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시민의 돈이지 고문 폭력 등을 가하고 지시한 그 당시 권력자들의 것이 아니다. 피해자는 존재하지만 가해자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사회를 정의롭다 할 수 있을까?

"누가 말했듯이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고통을, 그 심정을 몰라요. 그래도 이렇게 어두운 역사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거잖아요? 사회가 좀 더 밝아지고 해서 정의로운 사회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탁본을 떠 봤어요. 뭐랄까 가슴 아프면서도 즐거웠습니다."
 
 이제 시민의 품에 들어온 어두운 역사의 현장
 이제 시민의 품에 들어온 어두운 역사의 현장
ⓒ 지금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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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해자는 존재하지만 가해자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사회를 정의롭다 할 수 있을까
 피해자는 존재하지만 가해자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사회를 정의롭다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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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탁본 모임의 목표 중 하나는 울릉도에 가는 것이다. 울릉도 간첩단 사건으로 조작되어 고초를 겪었지만 정작 울릉도에 가본 일이 없는 이사영의 소원이기도 하다. 그의 마음 속 멍울이 사라지기 위해서는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많다. 그것은 비단 탁본 모임에 함께하는 사람 뿐만 아니라 어두운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우리 공동체의 책임이기도 하다.


* 후원 문의
☞ 국가폭력의 기억을 질감으로 남기는 사람들


[탁본에 남긴 잔혹한 기억]
그녀는 왜 남영동 대공분실 머릿돌을 탁본했나 http://omn.kr/1hjit
고문실의 문구멍은 거꾸로 뚫려 있구나 http://omn.kr/1hm1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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