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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베트남을 기억하는 여정 / 송지혜 (한베진실상 수상작)
작성일자 2018-08-16

베트남을 기억하는 여정 / 송지혜 (한베진실상 수상작)








2005년 봄 실시한 베트남 전쟁 종전 30돌 맞이 수기공모 대회 [베트남 전쟁과 나] "미안해요 베트남, 미안해요 이라크, 사랑해요 아버지, 힘드셨조 어머니" 당선작을 싣습니다.
 

 


베트남을 기억하는 여정



 

송지혜 /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평화의 미로



많은 사람들은 평화를 원한다. 평화로운 세상, 평화로운 생각, 평화로운 관계... 그러나 평화는 말로만 반복되고 있을 뿐, 지친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우리네 일상은 평화보다는 차라리 ‘전쟁’과 더 어울린다. 입시지옥, 취직, 교통체증, 양육문제 등 어느 하나 순탄한 것 없어 그저 ‘전쟁’같은 일상과 잘 ‘싸워 남을’ 수밖에, 별 다른 도리가 없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평화를 이야기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전쟁’ 같은 일상을 회피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때의 평화는 갈등 없이 밝고 고요한 이미지로 대변되어 무릉도원이나 이상낙원이라는 현실감 없는 세계로 이해될 뿐이다.



전쟁에 대해 묵인할 때, 폭력에 대한 예민함이 없을 때, 평화는 한낱 입바른 소리에 불과하다. 그 치열하고 고통스러운 고민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평화는 평화일 수 없다. 평화는 어디서 나오는가, 그 시작은 어디일까, 그 지독하게 시리고 아픈 기억에 대한 성찰과 반성, 치유를 향한 길은 지금 어디 있을까.



‘하노이의 ☆을 따자’



베트남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대학 입학 직후였다. ‘때려치우지’ 못한 고등학교에 대한 반감과 대학이 주는 환상은 세상에 대한 나의 눈을 쉽게 현혹하였고, 나는 그대로 유혹당하기만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재미난 눈요기 거리들이 내 마음을 앗아가기도 전에 이라크 전쟁이라는 인류 거대 비극사건이 발발했다. 파병 반대의 함성과 찬란히 빛나던 희망의 촛불은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 정부의 ‘사정’에 따라 모두 꺼져버리고 말았고, 내 또래 친구들은 모두 존엄과 자유를 잃고 돈과 태극기만 가슴에 안은 채 죽음의 나락으로 보내졌다.



그 이후, 각종 언론에서는 30년 전의 베트남전쟁 경제 특수를 예로 들며 이라크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경제적 호황을 한 치의 부끄럼 없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베트남전쟁 당시의 지역적 특성과 이라크전쟁의 특성을 비교하며 전략적 요충지에 대한 설명도 곁들여졌고, 밤도 없는 이라크의 그칠 줄 모르는 번쩍임까지 24시간 ‘찬란하게’ 방송되었다.



사람을 죽이는 전장에 사람을 보내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을 결정하는데 단순 표결로 해결 짓고,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를 경제성장의 이데올로기로 덮어버리고, 툭하면 단식하고 싸우던 의원들은 파병 결정에 일심동체가 되어 환영인사를 하는 여러 상황은 내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이 그다지 재미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전쟁반대의 구호가 한국역사의 중심에서 서서히 멀어질 무렵, 두 명의 친구와 나는 새로운 프로젝트 기획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소통되지 않은 역사, 한국의 기억과 다른 저편의 기억,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던 기막힌 사연, 중독 되어버린 기억에 대한 저항, 고통과 상처와 치유와 반성... 반성, 반성, 반성...



이라크를 생각하면 꼭 베트남이 생각났다. 그리고 지난 날, 해결되지 못한 채 방치된 응어리가 자꾸 우리를 향해 울부짖고 있는 듯, 세상에 갓 눈을 뜬 내게 뭔가를 말하려 했다. 나는 그 소리를 기꺼이 들어보고 싶었고 그렇게 우리의 프로젝트는 ‘하노이의 ☆을 따자’ 라는 다소 촌스러운 이름으로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억을 중심으로 엮어나가게 되었다.



중독된 기억, 생략된 기억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베트남전쟁을 경험하지도 않은 네가 어떻게 그것을 이야기한단 말인가’ 라고 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 시대, 그 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말할 자격이 없다면 일제 식민지 시대나 5.18 민주화 운동, 4.19 혁명에 대해서도 우리는 머지않아 함구하고 잊어버려야 할 것이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고통이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구체적이고 또렷한 흔적이다. 베트남 역시 그 흔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리라.



언론에 비치는 것조차 믿지 못하는 마당에 본적도 없는 베트남 전쟁을 ‘기억’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기억은 계급에 따라, 민족에 따라, 개인에 따라 다르고 때로는 뒤섞여 있다. 그 중에서도 개인의 기억은 이미 많은 부분이 상실된 것 같았다. 나는 개인의 기억을 중심으로 증언되어진 어떠한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대신 조국 부흥에 이바지한 자랑스러운 맹호ㆍ청룡․백마는 어딜가나 실컷 만날 수 있었다.



나는 누구의 기준으로 기록된 기억을 믿어야 할까.

엄마는 박정희에게 무조건 감사하다고 했다. 못 먹고 못 입던 어려운 시절에 월남 파병이라는 용기 있는 결단을 통해 굶주려 있던 많은 사람들을 살려냈기 때문이란다. 진정으로 박정희 덕분에 한 끼의 식사라도 제대로 해결할 수 있었다면 나는 어머니의 굳은 생각을 결코 비방할 수 없다. ‘지금의 모든 어머니의 세대는 그렇게 가여웠다’는 것이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유일한 문장이다.

한편으로 청룡, 맹호, 백마부대가 들여온 트랜지스터라디오와 손목시계의 물결은 한국군을 더욱 빛나 보이게 만들었다. 핏빛 위에 세운 도로와 통신시설 장비는 한국의 근대화를 촉진시키는데 큰 공언을 했다며 베트남전 경제호황을 계기로 한국 기업이 ‘세계일류’가 되었다고 자랑스레 떠든다. 그렇게 우리는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 상사와 라디오, 칼라 텔레비전만 기억하고 있다. 그 누구도,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무슨 일을 하고 돌아왔는지 묻지 않았다. 그 아무도, 지금 김 상사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알려들지 않았다.

베트남에서는 우리가 ‘베트남 전쟁’이라 부르는 이 전쟁을 ‘미국전쟁’이라 부른다고 한다.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고 삶의 터전을 잃었지만, 승전국의 자랑스러움도 크단다. 실제로 미국은 세계 2차대전 총 폭격량의 2배나 되는 엄청난 양의 무기를 베트남 땅에 쏟아 부었으나 무기의 파괴력과는 무관하게 베트남이 승전국이 되었다(정말 신기한 일이다. 사람을 향한, 진실을 향한 진정성은 정말 무기를 녹이는 걸까?). 그러나 승전국의 기쁨 뒤에는 한국군에 의한 너무나 큰 만행이 저질러져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승전의 기쁨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죽도록’ 잊고 싶은 기억으로 남겨졌다.

언제나 그렇듯 기억의 주체는 승전국과 가해국이다. 승전국이 된 베트남은 과거보다 승리의 해인 1975년만 기념하고 있는 듯 했고 이는 호치민에 있는 혁명박물관의 전시물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었다. 결국, 승전의 기억은 점차 사회화되어 개인의 기억은 마치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위장되었고, 개인의 경험과 기억조차 국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소통, 피할 수 없는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담론을 풀어나가는데 처음부터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이미 ‘피해국’과 ‘가해국’의 구도가 정해진 상황에서 ‘피해자’의 눈물을 함께 나눈다는 것부터 위선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내가 가해국의 국민이 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거나 그 입장에 동의한 적도 없었음에도 국가의 틀 속에서만 베트남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도 혼란스러운 일이었다.

베트남 사람들에게 있어 나는 추호도 거스를 수 없는 한국인이었다. 내가 한국인이 아니라면 자신들을 찾아올 이유가 없을 정도로 명확한 한국인이었다. 나는 한국인이고 싶지 않았지만 한국인이어야 했다. 내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 저지를 수 있다는 것, ‘나’ 아닌 ‘한국인’인 것, 모두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들이 나의 예민함을 받아줄 여유까지는 없어보였다. 나의 고민은 그 당시 사치였다.

나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피할 수 없는 시선을 마주하고, 새롭게 눈을 뜨는 작업을 반복한 후에도 소통은 힘겨웠다. 베트남 사람들의 상처와 아픔을 긁어 부스럼을 내어놓고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게 될까봐 겁이 난 것이다. ‘소통’의 이름은 치열하고도 아픈 행위였다. 소통 후에 있을 또 다른 고통, 치유의 얼굴을 한 어둠, 다시 또 반복되고 잊혀질 혼자만의 기억... 나는 도무지 그 ‘큰’ 일을 다 해낼 자신이 없었다. 이야기를 듣는 것조차도 이렇게 힘든데, 하물며 말하는 것은 얼마나 더 고통스러운 일일까. 말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기억을 더욱 선명하게 그려낸다는 뜻이다. 또렷해진 옛 기억으로 또 한번 고통을 받는다는 뜻이다. 아픔을 간직한 이의 묵언을 비난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대목에서만큼은 ‘과거를 접고 미래로 나아가자’던 베트남 정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전쟁을 일으킨 ‘진짜’ 가해자는 민간인 학살과 관련된 어떠한 사죄의 말도 없다. 혹시나 여러 민간단체의 활동이 자칫 진짜 가해자까지 면책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민간단체의 활동 뒤에 숨어 자신들의 용서까지 함께 구하는 건 아닌지, 어떤 말도 하지 않는 한국정부에 대한 미움이 일었다. 이따금 한국이 밉지 않다고 하는 여러 증언들을 만나면 되려 내가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러나 의심이나 정부에 대한 미움에 앞서, 만나는 그 순간만큼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진심’을 닿게 할 더많은 신뢰와 애정만이 필요했을 뿐이다.

가슴 속에 있는 답

전쟁 영화를 보면 전쟁터에 있는 많은 병사들이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등장한다. 이것은 실제 전쟁 상황을 설명할 때도 대체로 그대로 적용된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상사의 명령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와 ‘먼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 죽음의 공포는 결국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 온전히 이성적일 수 없다는 논리이다. 내가 만약 그 당시의 ‘남쥬띤’이었다고 해도 그때와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는 장담을 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군은 전쟁이 만들어 낸 또 다른 형태의 피해자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우발적이지 않은 살인이나 이미 치밀하게 계획되어진 학살,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쏴버리도록 미군으로부터 허락받은 10분에 대해서도 증언되고 있으며 결코 공포에 의한 순간적인 실수라고 볼 수는 없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전쟁에 대한 정당성이 없었던 한국군은 더욱 큰 폭력으로 베트남 사람들을 제압하며 두려움을 이겨보고자 노력했으나 결과적으로 자신 역시도 큰 상처의 응어리 속에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응어리마저도 인정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용감무쌍한’ 한국군들은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에 대해 함묵하고 있다.

앞서 수행해야할 일을 지나치고 치유와 화해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은 그다지 좋은 일이 못된다. 그것을 원한다고 해서 쉽게 이룰 수 있지도 않다. 말을 내뱉는 일과 고통을 꺼내고, 기억을 공유하고, 사실을 확인하는 그 모질고 치열한 작업을 반복하고 해낸 이후에야 손을 맞잡고 사죄하고 용서하는 치유와 화해의 장을 만날 수 있다. 그간 숨겨져 있던 개인의 기억이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하고 그 기억이 참전 한국군의 반성과 만날 때 우리는 생략된 기억의 조각을 맞추고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은 참 힘들다. 나는 참전 한국군의 양심에 기대를 건다.

‘지극한’ 평화

전쟁과 닮아있는 일상은 평화를 이야기하는 나를 자꾸만 어색하게 만들었다. 정서불안 속의 평화, 고통 속의 평화, 두려움 속의 평화... 그러나 이제는 이 모든 과정이 평화라고 말한다. 고통의 감수성을 퍼뜨리고 두려움을 보다 선명하게 만드는 것, 평화는 그렇게 치열하고 아프다.

한 가지 비밀을 말하자면, 나는 요즘 상담치료를 받고 있다. 벌써 12회가 넘었다. 내가 원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나의 솔직한 마음은 어땠었는지 등 또렷하지 않은 기억을 말로 풀어내고 있노라면 어느새 선명해진 기억이 되어 내 가슴에 쿵쿵 발길질을 한다.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낸 나의 많은 과거가 나의 기억 언저리에서 곪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12차례의 상담동안 나는 울지 않은 날이 없었다. 때로는 억울함과 서러움에 사무치도록 울고, 어떤 때는 울 이유도 없는 것 같은데 1시간 내내 훌쩍거리며 운다. 그렇게 나는 나의 옛 기억을 풀어 내보이고 보듬어 주고, 옹골차게 변해가는 나와 만난다. 나는 나를 위한 평화를 맞이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의 기억도 조만간 평화를 만날거다.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