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소식

제목 베트남 전쟁과 나 / 김진희 (한베화해상 수상작)
작성일자 2018-08-16

베트남 전쟁과 나 / 김진희 (한베화해상 수상작)






2005년 봄 실시한 베트남 전쟁 종전 30돌 맞이 수기공모 대회 [베트남 전쟁과 나] "미안해요 베트남, 미안해요 이라크, 사랑해요 아버지, 힘드셨조 어머니" 당선작을 싣습니다.
 

 


베트남 전쟁과 나



 

백마부대 30전투단 52포병대대
11605310 병장 김진희





나는 1967년 10월 백마부대 일원으로 18개월 동안 베트남으로 파병되었다. 백마부대 1577부대의 정보과. 이곳이 주된 근무지였지만 때로는 전장에서 때로는 OP에서 문득 불어오던 바람 속으로 실려 오던 피비린내를, 나는 잊을 수 없다.



1967년도에는 지원병보다는 차출병이 많았던 시기였다. 파병 한지 몇 해가 지났기 때문에 귀국병들 사이에서 흘러나온 전쟁에 대한 소문과 진실이 섞이면서 뒤숭숭한 이야기가 많았다. 실제 맹호부대에 파병되었다가 귀국했던 하사관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를 정도의 공포가 느껴지기도 했었다. 전후방이 따로 없는 상황에서 정규군보다는 게릴라전에 능숙한 베트콩을 상대로 싸워야하는 유격전이기에 우리나라의 같이 전후방이 분리되어 있는 상황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지원병이 줄면서 파병되는 대부분의 병력이 차출병으로 채워졌다. 명력에 절대복종하는 군의 원칙을 가지고 파병한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안동의 한 예비사단에서 근무하였는데 스스로 파병에 지원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한 결정이었다고 생각이 들지만 철저한 군인 정신으로 무장되었던 그때의 나는 자유의 십자군 깃발 아래서 이뤄지는 파병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국가의 막대한 지원을 받아 훈련된 정예 병사인 내가 후방에서 쉽고 편하게 지내다가 전역한다는 것이 불충이라는 생각했기 때문에 많은 고민 끝에 파월에 동참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것만이 내게 있어 충성스런 군인의 길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나의 군 이력을 잠시 소개하자면 포병학교 FDC반을 1등으로 졸업해서 포병학교장표창(우등)을 받았고, 피교육생들이 스스로 생활하는 전통에 따라 반장의 직분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포병학교 학생처장의 공로 표창을 받았다. 이등병FDC으로는 보기 드문 모범 사병으로 출발이었다. 이렇게 우수한 성적을 받고 전방으로 배치 받을 것을 내심 기대했지만 결국 배치된 곳은 후방의 예비 사단이었다. 예비 사단이라서 실제 FDC와 관계되는 일은 없었고, 맡겨진 보직은 밤마다 포를 지키는 초병의 임무뿐이었다.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보름달이 뜨는 밤 달빛이 포신에 차갑게 내려앉을 때 홀로 보초를 서다보면 포병학교에서 죽어라 배웠던 것들이 다 무엇이었나 싶었다.



물론 왠 떡이냐고 거꾸로 새워도 돌아가는 국방부 시계를 벗삼아 편하게 군대 생활을 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보낼 수 없었다. 입에서 단내 나도록 배웠던 포병에 관한 내 능력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는 아니다 싶어 뭔가 돌파구를 찾아내야했다. 이렇게 시작한 고민의 끝에는 월남이 있었다. 실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월남에 지원해서 내가 알고 있던 포병술을 실전에 응용해 보겠다는 열망과 함께 대한남아로써 군의 의무를 성스럽게 마치겠다는 생각에 손끝이 찌릿해지는 전율을 느꼈다. 스스로의 결심에 대견해 하며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지원서를 냈었다.



지원서를 난 후는 모든 일정이 신속하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파월에 필요한 소정 교육을 강원도 훈련장에서 마치고 부산 제3부두에서 화려한 환송식을 마치고, 다시보자 부산항의 메아리를 오륙도에 심어 놓고 장장 8일간의 긴 항해 끝에 월남의 나트랑이라는 항구에 도착했었다. 지금은 다르겠지만 그때의 나트랑항은 변변한 접안 시설이 없어 우리를 싣고 온 배는 먼 바다에 정박시키고 수륙양용선을 이용해서 상륙해야만 했다.



나트랑의 첫인상은 아직도 생생하다. 멀미를 너무해서 지쳐버렸을 때 누군가 육지가 보인다고 외치는 소리에 이끌려 갑판으로 나와 보니, 저 멀리 수평선으로 거대한 불상같이 보이는 흰 것이 보였다. 나중에 현장에 가보니 큰 석고 불상이었다. 지금도 그 불상이 나트랑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그때 그 커다란 불상을 보면서 묘한 의문점이 생겼었다. 불교를 국교로 하는 나라에서 어떻게 그렇게 오랜 세월 전쟁을 하면서 온 국토를 화약 향으로 뒤덮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강 건너 불구경하는 느낌에서 불타는 곳으로 들어온 것 같았고, 알수 없지만 뭔가 어긋나가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게 월남과의 첫대면은 이뤄졌다.



군에서 모든 수속을 마치고 배속 받은 부대는 XX전투단 XX포병대대로 월남의 캄란이라는 행정구역상 특별시였다. 선배들이 어느 정도 부대 진지를 정비를 했기 때문에 곧바로 정보과에 배속될 수 있었다. 사무실 한쪽 구석에 작은 책상 하나가 바로 정보과였다. 이름뿐이었다. 주로 하는 일은 작전과의 잔심부름하면서 밤에는 야간 청음초보초를 서는 일이다. 한국을 떠나올 때의 환상이나 죽음의 공포를 초월한 군인정신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밤낮 가리지 않고 벌어지는 요란사격과 위협사격의 포화 속에서 묻혀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즈음 큰 사건 하나가 벌어졌다. 68년 5월 중순쯤으로 기억하고 하는데, XX전투단 소속 모중대에 새벽 1시를 기해 베트콩의 박격포 공격을 받은 것이다. 당시 상황실에는 나 혼자 뿐. 즉시 대박격포 사격을 지시해야 하는 상황. 상황 장교가 잠시 자릴 비우고 없었다. 상황장교가 자리를 비우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사병이 상황장교 없이 단독으로 작전을 내리는 것도 말도 안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너무 급박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예하부대에 대박격포 사격을 지시 내리고 사령부에 보고를 올릴때쯤 다행히 상황 장교가 들어와서 업무 인계를 하면서 한숨을 돌리는 듯했다. 하지만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는가. 결국 그 일 때문에 정보과장은 문책을 당하면서 조기 귀국을 하고 말았다.



새옹지마라 했던가. 우여곡절 끝에 새로운 정보과장이 오면서 작전과의 더부살이를 벗어나 정보과는 조금씩 자리를 잡게 되었다. 몇 달 후 최적의 전투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전투단 내에 종합 상황실이 설치되었다. 포병과 보병은 물론 미공군과 해군, 월남군까지 유기적으로 협조하는 체제가 만들어졌다. 바로 이 종합상황실에서 정보과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 것이다. 참고로 그때 우리가 책임지고 있던 전술 지역은 나트랑에서 1번국도를 따라 판랑 지역의 각 보병대대를 지원하고 있었다.



이렇게 자리가 잡혀가면서 지리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전황은 유리할 것도 불리할 것도 없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나의 18개월 전선 생활에서 이상스런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었지만 이 월남전에서 승리를 확실할 수도 없을뿐더러 하루빨리 연합군을 철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연합국은 세계에서 유명한 강력한 군대들의 집합체였지만 월남 국민들에게 받는 대접은 그 명성에 미치진 못했다. 그것은 연합군을 주도하고 있는 미군에 대한 광범위한 국민적인 반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였다. 월남의 지도층을 제외한 나머지 국민들은 미군들이 벌이는 지금의 전쟁이 미군의 이기주적 패권주의에서 시작된 것이라 서슴없이 이야기했었다. 월남 예비군의 보수는 전쟁을 하고 있는 대한민국 현역병의 보수보다 많이 받았지만 그들은 결코 미국을 위해서 일하지도 싸우진 않았고, 결국 그들의 보수는 다시 베트콩의 군자금으로 사용되는 실정이었다. 사정이 이 정도라면 전쟁은 이미 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알았던 당시엔 내게 선택권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의무만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4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것이 슬그머니 부끄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모르고 했다고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자유의 십자군이라는 환상과 군인의 긍지를 가지고 참전했던 나는, 그저 용병일 뿐이었다. 월남 국민들에게 죄스러울 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참전 연합국의 일원으로 부끄러운 부분이 있다. 국가의 통수권자가 개발 독재의 실현하는 한 방법으로 군을 이용한 것에 동참했다는 부분이고,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이 화폐가치의 차이를 인정하더라도 10만원이 안되는 보수로 생명을 담보로 먼 타국까지 와서 자유의 십자군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아래 피를 흘리고 싸웠다는 것이다. 피를 흘리다 못해 결국 산화해간 전우들은 죽어서도 국군묘지가 아닌 다른 곳에 묻어 있는 지금까지 그 참담함은 이어져 오고 있다.



내가 한국에서 가졌던 모든 생각과 의도가 얼마나 실현되었는지, 자유의 십자군으로 참전 성과가 얼마나 세계사에 의미를 가졌는지는 모르겠다. 아니 알고 싶지 않다. 그런 거창한 평가보다도 한명 한명이 무엇보다 소중했던 내 전우들의 희생에 대한 평가가 중요하다. 그런 평가를 바로 세우는 것이 남겨진 우리들의 몫이라고 본다. 분명 70년대의 눈부신 발전의 토대가 된 것이 우리 전우들의 피였음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종전 후 30년을 훌쩍 뛰어넘고 40년이 되어가지만 수없이 쓰러져간 우리 전우들에 대한 국가적인 처우는 무엇인가 말이다. 수많은 국민들이 전상의 아픔으로 피멍이 들었고 특히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전우와 그 가족.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우리는 알아야 하고, 그 한은 풀어주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냉전 시대가 가져 온 이념 전쟁을 뒤로하고 통일된 월남은 지금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으며, 머지않아 아시아의 부국으로 새롭게 태어나리라고 나는 믿는다.



역사는 거칠게 흘러가는 물이다. 흐르는 물을 거스를 수 없어서 우리는 나라에 몸을 맡기고 내 한 몸 피를 남김없이 바치면서 여기까지 왔다. 넓어서 모든 것을 포용하는 바다로. 하지만 한달에 한번은 꼬박 2시간 넘게 차를 갈아타며 보훈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내가 과연 평화를 위해 싸웠다는 자랑스러운 명예를 가슴에 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