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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연] 서경식의 전쟁과 예술 <전쟁과 모성애의 표상-케테 콜비츠를 읽다>
작성일자 2018-08-17


[강연] 서경식의 전쟁과 예술 <전쟁과 모성애의 표상-케테 콜비츠를 읽다>








2015년 4월 10일 금요일에 노무현재단 교육실에서 서경식의 전쟁과 미술 <전쟁과 모성애의 표상-케테 콜비츠를 읽다> 강연이 진행되었다.

서경식 교수는 재일 조선인 저술가이자 작가로, 교토 시에서 태어났다. 와세다 대학에 재학 중이던 1971년에 한국에서 공부하던 두 형이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는데, 그 일로 체포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그들을 구호하는 활동을 전개했으며, 이와 더불어 민주화 운동의 경험은 그의 다방면에 걸친 작가 활동의 근원이 되었다. 주요저작으로 「나의 서양미술 순례」「어린이의 눈물」(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 수상) 「디아스포라 기행」「난민과 국민 사이」「프리모레비로의 여행」(마르코폴로상 수상)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고뇌의 원근법」「언어의 감옥에서」「청춘의 사신」「나의 조선미술 순례」등이 있다. 이번 강연에서는 전쟁과 모성애의 표본으로서 케테 콜비츠를 넘어 그의 작품에 있는 뛰어난 예술성과 수려한 판화기법, 작품이 국가주의와 남성중심주의에 악용될 소지,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본 케테 콜비츠 등의 비판적인 설명이 덧붙여져 풍부한 시간이 되었다.





서경식의 전쟁과 미술 <전쟁과 모성애의 표상-케테 콜비츠를 읽다>

 

1. 나와 콜비츠

내가 케테 콜비츠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60년대 말이던 고교 시절 루쉰(魯迅)의 『깊은 밤에 쓰다』(이 글에 대해서는 후술한다)에서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2년째 되던 1976년에 교토국립근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독일 리얼리즘 1919-1933>에서 케테 콜비츠의 작품을 실제로 처음 볼 수 있었다. 당시 독일은 여전히 분열된 상태여서 이 전람회는 동독의 소장품을 접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그때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추모>(도판1)에서 강렬한 감명을 받았다.

 

아름다움이나 위안보다는 직접적인 고통을 느꼈다. 인간이 지닌 ‘비탄’이라는 감정을 이렇게 훌륭하게 형상화한 예술가는 없지 않을까. 콜비츠가 그려낸 세계는 먼 과거나 외국의 일이 아니라 내가 내던져진 현실 그대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작품을 실제로 접했던 당시의 한국은 유신독재가 한창이었고 나의 두 형은 정치범으로 옥중에 있었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 여덟 명이 사형에 처해진 것이 1975년의 일이다. 우리는 바로 이곳에서 콜비츠가 그린 듯한 정치 탄압에 의한 희생자들의 죽음을 목격해야만 했다. 아니, 만족스러운 장례조차 치를 수 없었다. 나도 저렇게 형들을 보내야 할까. 이런 생각을 금할 길이 없었다. 당시 나와 가족은, 그리고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틀림없이 저렇게 ‘모욕당하고 상처 받은 많은 사람들’의 일원이었다. 지금은 과연 어떨까?

1980년대에 접어들어 내 어머니와 아버지는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형들의 출옥은 그때부터 1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후에 이루어졌다. 비슷한 무렵 독일이 통일되었다. 통일된 독일에서는 콜비츠의 대규모 회고전이 전국을 순회했다. 전쟁과 나치즘에 저항한 시대정신의 상징이 새로운 통일국가의 국민 전체에게 공유되어가는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그전까지는 발 딛기 힘들었던 구동독의 드레스덴에서 그 회고전을 볼 수 있었다. 이미 케테 콜비츠의 많은 작품을 본 적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내가 가장 강한 충격을 받은 그림이 <죽은 아이를 안은 어머니>(도판2)이다.

 

전쟁과 기아, 질병 때문에 죽어가는 아이와, 비탄에 잠긴 어머니. 이는 콜비츠가 다루었던 수많은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이지만 콜비츠에게 직접 그 사건이 닥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 작품은 1903년에 제작되었다. 죽은 자기 아이에게 매달리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어찌할 바 모르는 슬픔과 아이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모친이라는 이미지를 훌쩍 뛰어넘어, 마치 아이를 잡아먹으려는 아귀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비탄이란 대부분 저러한 것이리라. 이 그림은 자식의 출옥을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원통하게 죽을 수 밖에 없었던 내 어머니의 초상이었다. 지금도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이러한 슬픔을 강요당한 어머니들이 얼마나 존재하고 있을까.

콜비츠가 이 작품을 제작한 시점에서 이미 예감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모델이 되었던 차남 페터를 11년 후에 일어난 제1차 대전에서 잃고 그녀 역시 비탄에 잠긴 어머니의 한 사람이 되었다. 예술이 실제 인생을 앞서갔던 셈이다. 지금도 이 세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욕을 당하고 학대 받고 있다. 전쟁과 기아, 질병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죽어간다. 어머니들은 아귀처럼 비탄 속에 잠겨 있다. 그러므로 지금도 나는 콜비츠의 작품을 그저 평온한 마음으로 감상할 수 없다.

 

2. 콜비츠와 그 시대

콜비츠는 1867년 7월 프로이센 동부 쾨니히스베르크(이후 소련의 칼리닌그라드, 현재는 러시아 영토)에서 태어나 종교적 분위기가 강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이러한 영향은 이후 그녀가 종교적 신앙을 버린 후에도 작품 속에 특징으로 남았다(E. 루시 스미스). 아버지는 법률을 공부했지만 직업적 법률가의 자격을 얻기 바로 직전에 그 길을 포기하고 석공 기술자가 되었다고 한다.

케테 콜비츠가 태어난 해인 1867년 무렵은 19세기 후반부터 세력을 키워나갔던 프로이센 왕국이 북독일 연방의 맹주로 자리잡아 1871년에는 프로이센 왕국의 빌헬름 1세가 독일 황제로 등극했다. ‘철혈재상’이라는 별명을 가진 프로이센 수상 비스마르크는 1878년 사회주의자 탄압법을 제정하고 사회주의적인 결사와 모임을 금지하고 집회와 출판도 제한했다.

13세 때 처음으로 케테는 루돌프 마우러에게 미술을 배우게 되었고 이후 베를린과 뮌헨에서 미술교육을 받고 동시에 에밀 졸라와 입센의 작품을 접하며 사회주의와 페미니즘 운동에 도 관심을 갖게 된다. 1891년에는 빈민을 대상으로 진료소를 운영하던 의사 카를 콜비츠와 결혼했다. 다음 해에 장남 한스가 태어났고 1893년부터 케테는 작품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특히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Gerhart Hauptmann)의 연극 <직조공들>에서 영감을 받아 연작판화를 제작했다.

1844년, 슐레지아 지방(현재의 폴란드)에서 3000명 규모의 직조공들이 열악한 생활 조건에 항의하여 봉기를 일으켜 기계 등을 파괴했다. 프로이센 군이 출동하여 발포하며 진압한 이 사건은 독일 최초의 노동자 폭동으로 알려져 있다. 하이네는 1844년 이 사건을 노래한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침침한 눈에 눈물도 말랐다

그들은 베틀에 앉아 이를 간다.

늙어빠진 독일이여, 우리는 너의 수의를 짠다

우리는 그 속에 세 겹의 저주를 짜 넣는다-

우리는 덜거덕거리며 옷감을 짠다.

우리는 덜거덕거리며 옷감을 짠다.

 

첫 번째 저주는 하느님에게

우리는 추운 겨울에도 굶주리면서 그에게 기도하였건만

우리는 헛되이 기구하고 기다려 왔다.

그는 우리를 원숭이처럼 놀리고, 조롱하고 바보로 만들었다.

우리는 덜거덕거리며 옷감을 짠다

우리는 덜거덕거리며 옷감을 짠다.

 

두 번째 저주는 임금님에게, 부자들을 위한 임금님에게

우리의 비참한 삶을 본 체도 않고,

그는 우리의 마지막 몇 푼까지 착취해간다.

그러고는 우리를 개새끼처럼 쏴 죽이라 한다-

우리는 덜거덕거리며 옷감을 짠다

우리는 덜거덕거리며 옷감을 짠다.

 

세 번째 저주는 그릇된 조국에게

이 나라에는 오욕과 수치만이 판을 치고,

꽃이란 꽃은 피기도 전에 꺾이며,

모든 것이 썩어 문드러져 구더기만 득시글거린다.

우리는 덜거덕거리며 옷감을 짠다

우리는 덜거덕거리며 옷감을 짠다

 

북은 나는 듯이 움직이고 베틀은 삐거덕거리며,

우리는 밤낮으로 부지런히 옷감을 짠다.

늙어빠진 독일이여, 우리는 너의 수의를 짠다.

우리는 그 속에 세 겹의 저주를 짜넣는다.

우리는 덜거덕거리며 옷감을 짠다.

우리는 덜거덕거리며 옷감을 짠다.

「슐레지엔의 직조공들」 『로렐라이』, 김광규 옮김 (민음사)

 

콜비츠의 작품 <직조공 봉기>(도판3)는 1898년 대베를린 미술전에서 공개되어 과격한 주제 때문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심사위원회는 이 작품에 금상을 수여하려 했지만 황제가 이를 거부했다. 1902년부터 5년 동안은 16세기 독일 농민전쟁을 테마로 한 농민전쟁 연작(도판4)의 제작에 종사하여 이 작품으로 빌라 로마나 상을 수상했다.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유럽 전역은 애국주의의 열광에 휩싸였다. 1889년에 창립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제2인터내셔널)은 반제국주의와 반전을 공동 목적으로 삼았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자 정당의 국제연맹조직이었고, 독일사회민주당은 그 중심에 있었다. 그렇지만 전쟁 발발과 함께 사회민주당 계열의 노동조합은 파업을 중지했고 당 위원회는 의회에서 전쟁비용 예산에 찬성표를 던지며 사회애국주의의 길을 밟기 시작했다.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하인리히 만(Heinrich Mann) 등 극소수만 여기에 저항했지만 열광의 소용돌이는 그들을 집어 삼켰다.

애국 열기에 휩쓸린 젊은이들은 차례로 지원해서 전선으로 나섰다. 어른들의 선동으로 인해 전쟁을 영웅적이고 로맨틱한 체험으로 믿어버렸던 것이다. 1차 대전 후 전쟁체험에 근거한 반전 작품을 그려 나치에게 박해를 받게 되는 예술가들-예를 들어 화가 오토 딕스(Otto Dix), 소설가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Erich Maria Remarque), 극작가 에른스트 톨러(Ernst Toller) 등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원해서 전선으로 갔던 케테 콜비츠의 차남 페터도 2개월 후 벨기에에서 전사했다. 출정하겠다는 아들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던 케테는 그 통한의 마음과 반전의 염원을 담은 기념비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지루하게 이어지며 방대한 희생을 낳았던 제1차 세계대전은 1918년 끝났다. 독일 황제는 네덜란드로 망명했고 뒤이어 독일 혁명이 일어나 각지에서 노농평의회(레테)가 결성되었다. 전쟁 중에도 ‘스파르타쿠스단’을 결성하여 사회애국주의와 싸워왔던 독일공산당 지도자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사회민주당의 노스케가 이끄는 ‘의용군(프라이코르프스)’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의 죽음에 바치는 케테 콜비츠의 마음은 전술한 작품에 남김 없이 표현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 콜비츠는 많은 후배 예술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나치 세력이 대두하고 1933년에 나치당이 정권을 탈취하면서, 케테 콜비츠는 갖은 탄압 속에서 ‘퇴폐예술’의 낙인이 찍혀 예술 아카데미로부터도 추방되었다. 게다가 1942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 종군했던 손자 페터마저 잃었다.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콜비츠는 강제수용소에 보내질지도 모른다는 악몽에 시달리면서 드레스덴 근교의 모리츠부르크 성에서 자살을 생각하며 만년을 보내다가 1945년 4월 22일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일본의 미술사학자 와카쿠와 미도리(若桑みどり)는 이렇게 말했다. “케테 콜비츠는 어떤 비참한 장면을 묘사하더라도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사랑을 잃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미술의 역사상 세계에서 처음으로 콜비츠는 ‘아들을 잃은 어머니’로서 전쟁을 그렸기 때문이다.”

 

4. 케테 콜비츠와 루쉰

중국의 신흥판화(목각) 운동의 아버지인 루쉰은 만년에 케테 콜비츠의 판화선집을 상하이에서 간행했다. 이미 일본의 만주 침략이 감행된 이후였으며 중일전쟁 발발 직전의 일이다.

루쉰은 아마 1928년 일본의 연출가 센다 고레야(千田是也)가 베를린에서 미술잡지 『중앙미술』에 기고한 글을 읽고 콜비츠를 알게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게다가 독일에 유학 중이던 서시경(徐詩茎)이 수많은 문헌과 화집을 루쉰에게 보내주었는데 그 가운데 콜비츠의 작품집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루쉰은 상하이의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을 통해 독일로부터 작품집을 직접 구입했다.

루쉰은 미국의 진보적 여성 저널리스트 아그네스 스미들리(Agnes Smedley)와 상하이의 자택에서 만났다. 스미들리는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 특파원 자격으로 1928년 소비에트에서 만주를 거쳐 상하이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그 후 루쉰이 죽을 때까지 친교를 이어갔다. 1931년 일기에서 루쉰은 스미들리에게 콜비츠의 판화 구입을 의뢰했다고 썼다. 그때 입수한 작품은 현재 북경의 루쉰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920년부터 독일에서 활동했던 스미들리는 인도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투옥된 적도 있으며 그 인연으로 독일의 진보적 여성운동가들과 친교를 쌓았다. 콜비츠가 병으로 입원중인 스미들리를 그린 작품 두 점이 남아있기도 하다.

루쉰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기도 했던 일본의 중국문학자 마스다 와타루(増田渉)는 루쉰이 중국의 목각판화에 정신적 기법적으로 리얼리즘을 존중하는 지도방법을 확립했던 것은 콜비츠와 (편지를 통한) 교류를 했기 때문이라는 언급을 한 적이 있다. (마스다 와타루 『루쉰의 인상』)

그 무렵(1930년대) 문학 잡지는 중국에서 판화를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특히 루쉰은 1931년 간행된 잡지 『북두(北斗)』에서 콜비츠의 전쟁 연작에서 <희생>(도판5)이라는 작품을 소개했다.

1936년에 발표한 루쉰의 「깊은 밤에 쓰다」는 국민당의 백색 테러에 암살당한 젊은 문학자 러우스(柔石)를 추도하는 글이다. 이 글에서 루쉰은 이런 언급을 했다. “두 눈이 먼 그의 어머니만은 사랑하는 자신의 아이가 당연히 상하이에서 번역과 교정을 일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으리라 나는 헤아렸다. 우연히 독일 서점의 목록에서 이 작품 <희생>을 발견해 바로 『북두』에 투고했다. 나는 이렇게 무언의 추모를 했다.

루쉰이 콜비츠의 판화작품을 높이 평가하고 당시 중국에 적극적으로 소개한 의도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실제로 전 세계 곳곳에서는 학대당하고 모욕을 받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이들은 우리와 같은 처지의 동료이며, 게다가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 슬퍼하고 절규하며 싸우는 예술가들이 있다는 사실도 명백하다.” “요즘 중국의 신문은 큰 소리로 외치는 히틀러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자주 게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독일 예술가의 화집을 통해 다른 종류의 사람들을 보아야 한다. 그들은 영웅은 아니지만 친근하고 공감을 불러 일으키며 보면 볼수록 아름다움과 감동을 느끼게 해 준다.(…) 작자는 현재도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이 극동의 하늘 아래에도 점점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 인류를 위한 예술은 어떤 무력으로도 짓밟을 수 없다.”

루쉰은 일본과 펼쳐질 본격적인 전쟁과 스스로의 죽음을 앞둔 나날 동안 병마와 싸우면서 케테 콜비츠 판화선집의 편집을 진행하고 제자(題字), 장정, 광고 업무에까지 몸소 나섰다. 세계대전의 위기 속에서도 스미들리라는 든든한 중개인과 더불어 실현된 서구의 케테 콜비츠와 동아시아의 루쉰의 교류는 후세의 우리들에게 무엇보다 아름다운 인간 정신의 기록으로 남았다.  

 

5. 전후 일본과 루쉰, 케테 콜비츠

1936년 10월 18일 루쉰은 숨을 거뒀다. 그는 인생의 가장 마지막 시기에 일본어로 쓴 글 「나는 인간을 달래고 싶다」의 말미에서 “죽음에 즈음하여 제 개인의 예감을 피로 써 올립니다”라고 썼다. 그 예감대로 루쉰이 죽은 다음 해부터 중국 본토에 대한 일본의 본격적인 침략이 강행되었고 중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졌다. 피와 눈물이 바다처럼 흘러내렸고 마침내1945년 8월에 일본이 항복하고 전쟁이 끝난 후 광대한 폐허, 겹겹이 쌓인 시체가 남았다. 패전 후의 일본에서는 진지한 자성과 함께 앞서 말했던 루쉰이 저작을 읽으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역사학자 이시모다 다다시(石母田正)의 저서 『역사와 민족의 발견』 (1952년 도쿄대학출판부)를 들 수 있다. 이 저서는 이웃의 여러 민족을 향해 침략전쟁을 벌인 끝에 무참한 패배라는 결과로 귀결된 일본 근대의 발걸음을 ‘역사의 주체란 누구인가’라는 문제의식 아래 진지하게 탐구한 책이며, 당시가 한국전쟁이 한창이었기에 글 속에는 조선의 역사와 문학에 대한 성실한 언급도 많다. 재일조선인중에는 이 일본인 이시모다의 저서로 인해 자민족의 저항투쟁의 역사에 눈뜬 자(나 역시 그 중 한 사람이다)도 적지 않다.

이시모다의 문제 의식 중 하나는 ‘왜 일본의 근대는 민중적인 주체의식을 형성하는 데 실패했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러기 위해서는 중국과 조선의 민중사에서 배워야 하지 않는가’라는 점에 있다. 이 책의 제3장은 <민중과 여성의 역사에 부쳐>라는 제목이다. 그 말미에는 「어머니에 대한 편지-루쉰과 허남기에게」 라는 글이다. 허남기 (許南麒)는 <화승총의 노래>로 잘 알려진 재일조선인 시인이다. 그에 대해서도 가능하면 상세하게 이야기하고 싶지만 지금은 아쉽게도 여유가 없다.

이 글 속에서 이시모다는 꽤 상세하게 노신과 콜비츠에 대해 이야기하며 작품 <희생>을 책의 케이스와 표제 그림에 사용했다. 이시모다는 전쟁 전 구제고교(舊制高校) 시절 사회과학연구회의 일원이었기에 ‘공산주의자’ 혐의를 받고 경찰에 구류되어 무기정학 처분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무신론자이며 사상적으로는 진보적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출세길이 막힌다고 무섭게 화를 내며 꾸짖었다. 한편 교육을 받지 못하고 보수적이었던 어머니는 결코 그를 혼내지 않았고 바른 일을 행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확신시켜 주었다고 한다. 이시모다는 ‘근대적’인 사상의 소유자였던 아버지가 부르주아적인 입신출세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것에 비해 ‘봉건적’인 어머니가 자신과 아이들의 인간성을 외부와 부친이라는 권력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저항했다고 말한다. 역사학자라면 이러한 유연성과 깊은 통찰력을 갖고 자국의 역사를 반성적으로 통찰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시모다의 이러한 서술은 내 어머니를 떠올리게 했다. 그러한 느낌은 나만이 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혹은 독일, 세계 어느 곳에 있어도 암흑 같은 시대를 살아간 어머니들은 그렇게 필사적으로 제 아이를 감싸 안아 왔다. 콜비츠의 <희생>은 그러한 어머니들에게 바치는 찬가였고 그런 의미에서 루쉰의 말과 교훈을 배우라고 했던 이시모다의 글은 전쟁의 시대의 모성에 대한 가장 성실한 고찰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근대 일본의 민중적 주체 형성이라는 어려운 문제와 진지하게 씨름했던 이시모다는 이웃 민족과 여성이라는 ‘타자’로부터 그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했다. 이시모다의 의도가 지닌 선량함과 진지함은 의심할 수 없다. 하지만 현재의 시점에서도 이러한 자세를 완전히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이고 같은 식으로 말해도 좋을까? 이것은 또 다른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 아이들을 ‘희생’으로 바친 어머니를 칭송하는 태도를 접하면 나에게는 머뭇거림과 어떤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간단히 말해 이러한 태도는 자칫 잘못하면 아들인 나, 남자인 내가 어머니를 한번 더 이용하고 착취하는 일로 이어지기 쉽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자기희생적인 모성애를 찬미함으로써 여성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구조를 당연시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봉건적’인 어머니 속에 있는 미덕을 평가함으로써 여성들을 그러한 ‘희생’의 틀에 가둬두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간단히 답을 낼 수 없는 문제이지만 적어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콜비츠, 루쉰, 이시모다의 표현과 글을 접할 때 이를 그저 ‘감동적’으로 소비할 것이 아니라 앞서 서술한 지난한 자성이 요구된다. 물론 그것은 콜비츠, 루쉰, 이시모다라는 존재가 지닌 역사적 가치를 훼손하지 않고, 오히려 그 가치를 바르게 이해하고 평가하는 일을 의미하기도 한다.

 

6. 노이에 바헤 논쟁

앞서 말했듯 1991년 여름, 독일에서는 <케테 콜비츠 대회고전>이 열렸다. 아마 전시를 통해 통일된 독일의 국민적 아이덴티티를 세우게끔 하는 역할이 기대되었던 듯 하다.

베를린 중심부의 운터덴린덴 거리, 훔볼트 대학 인근에 <노이에 바헤(Neue Wache; 중앙추도소)>라 불리는 건물이 있다. 원래는 프로이센 시대에 나폴레옹 전쟁 승리를 기념해서 1818년에 세워진 위병소지만 1931년 제1차 대전 전몰병사추도소가 되었다. 제2차 대전 이후는 동독 지역에 속했기에 1960년 동독 정부에 의해 <파시즘과 군국주의 희생자를 위한 국가중앙추도소>로 다시 문을 열었다. 이곳이 바로 독일 통일 후인 1993년에 콜 수상의 제청으로 지금의 <전쟁과 폭력 지배의 희생자를 위한 국가중앙추도소>가 되었다. 그리고 이 추도소의 한 가운데에는 콜비츠의 작품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의 확대복제품이 자리하게 되었지만 이를 둘러싸고 ‘노이에 바헤 논쟁’이라 불리는 논쟁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쟁점 중 하나는 “나치당원과 프로이센 군 이래의 독일 군인을, 반나치 저항자나 유태인과 같은 희생자를 함께 추도해도 좋은가?” 그것은 “반역자와 희생자를 동일선상에 두는 것은 아닌가”라는 비판이었다.

콜비츠의 작품을 추도소의 상징으로 세운 점에 대해서는 ‘독일의 죄와 책임에 대한 심사 숙고’를 담는 의미로서는 많은 사람들이 찬성했지만 한편으로 나치의 박해를 받아 실의에 빠져 세상을 떠난 콜비츠의 작품을 이런 식으로 이용하는 것은 ‘반역자와 희생자의 동일화’라는 비판을 피하기 위한 ‘악용’이라는 비판도 일었다. 게다가 ‘조국을 위한 죽음’이라는 관념을 인정하게끔 만들고 ‘희생을 견뎌내는 모성’을 찬미하는 의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위험성을 지적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1996년 여름에 노이에 바헤를 방문했다. 내가 받은 인상으로는 홀 중앙에 놓인 <모자상>은 프로이센으로부터 지금의 독일에 이르는 기간 동안 쌓아갔던 국가주의의 중압 아래서 움츠리고 있는 듯 보였다. 콜비츠가 독일의 ‘심사와 숙고’의 상징이 될 수 있을지, 아니면 국가주의와 남성주심주의에 ‘악용’되어버릴지는, 즉각적으로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콜비츠의 작품이 그 깊은 ‘비탄’을 생각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본의 아닌 역할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심사와 숙고’와는 완전히 무관한 태도로 일관하는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자들보다는 낫다고 보아야만 하는 걸까?


  케테 콜비츠 연보

1867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다.

1882 판화가 마우어로부터 소묘 수업을 받기 시작하다.

1885 베를린 여자미술학교 입학

1885 뮌헨에서 에칭(동판화) 기술을 익히다

1891 오빠 콘라트의 친구이자 의사 칼 콜비츠와 결혼하여 베를린으로 이주하다. 케테의 오빠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와도 친분이 있었다.

1893 하우프트만의 희곡 <직공들>의 초연을 보다.

1898연작판화 <직공의 봉기>를 대베를린 미술전에 출품하여 높은 평가를 받다. 수상 예정이었지만 황제가 수상을 거부하다.

1901 이 해부터 <농민전쟁> 연작을 제작을 시작하다.

1913 베를린에서 <여류미술가협회>를 설립하다.

1914 제1차 세계대전에 지원한 차남 페터가 18세의 나이로 전사하다.

1919 여성으로서 최초로 베를린 예술아카데미 회원으로 뽑히다.

1920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추모>를 발표하다.

1922 <전쟁> 연작의 제작을 시작하다.

1932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다.

1937 나치에게 ‘퇴폐예술’로 낙인을 찍혀 미술관에서 작품이 철거되다. 에른스트 톨러에 의해 미국에서 개인전을 열다.

1945.4.22. 드레스덴 교외의 모리츠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나다.

 

이 글은 2015년 4월 10일 금요일에 진행된 서경식 교수의 강의안(번역 : 최재혁)

 고통과 기억의 연대|평화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