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소식

제목 콜비츠의 고향을 가다 - 케테 콜비츠, 대지의 모성
작성일자 2018-08-17

콜비츠의 고향을 가다-케테 콜비츠, 대지의 모성







<콜비츠의 고향을 가다-케테 콜비츠, 대지의 모성>

일시: 3월 7일 토요일 2시 / 3월 18일 수요일 2시

장소: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스튜디오 3


3월 7일와 3월 18일,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에서 케테 콜비츠 전시회의 전시기획자인 서해성 작가의 “케테 콜비츠, 대지의 모성” 강연이 두 차례 있었다. 서해성 작가의 해박한 지식과 울림이 있는 이야기에 많은 분들이 함께해주셔서 두 차례 모두 더욱 풍성한 시간이 되었다.

강연은 하이네의 시 ‘슐레지엔의 직조공’에 곡을 붙이고 콜비츠 작품으로 완성한 동영상으로 시작했다. 콜비츠 작품을 통해 산업혁명, 종교개혁, 르네상스 시기를 넘나들며 그 시대 민중과 노동자, 농민의 삶을 마주했다.

 

슐레지엔의 직조공 -하이네

침침한 눈에는 눈물도 마르고

베틀에 앉아 이빨을 간다

독일이여 우리는 짠다 너의 수의를

세 겹의 저주를 거기에 짜 넣는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첫 번째 저주는 신에게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우리는 기도했건만

희망도 기대도 허사가 되었다

신은 우리를 조롱하고 우롱하고 바보 취급을 했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두 번째 저주는 왕에게 부자들의 왕에게

우리들의 비참을 덜어 주기는커녕

마지막 한 푼마저 빼앗아 먹고 그는

우리들을 개처럼 쏘아 죽이라 했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세 번째 저주는 그릇된 조국에게

오욕과 치욕만이 번창하고

꽃이란 꽃은 피기가 무섭게 꺾이고

부패와 타락 속에서 구더기가 살판을 만나는 곳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북이 날고 베틀이 덜거덩거리고

우리는 밤낮으로 부지런히 짠다

낡은 독일이여 우리는 짠다 너의 수의를

세 겹의 저주를 거기에 짜 넣는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직조공들의 봉기와 연극「직조공들」

1840년대 유럽은 기계화와 산업화의 시대로, 산업혁명으로 등장한 직조 기계는 싼 값의 제품을 내놓았고, 직물 중개인들은 직물 제품 또한 더 싼 값에 사들이면서 직조공들의 품삯은 제대로 쳐주지 않았다. 더 큰 이윤을 챙기려는 공장주들 또한 직조공들의 임금을 대폭 삭감했다. 1848년에 슐레지엔(현재 체코에 속함)에서 일어난 직조공들의 봉기는 정부를 상대로 한 것은 아니었고 고용주들을 상대로 한 봉기였는데, 절대적인 빈곤에 시달리던 3000여 명의 직조공들은 농기구를 무기처럼 들고 악덕 공장주와 중개인의 집을 향했지만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가 투입되자 열한 명의 직조공이 목숨을 잃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시 ‘슐레지엔의 직조공’을 쓴 하인리히 하이네의 아버지는 직물 중개인이었으며, 봉기 이후 쓰인 이 시는 한 달 후, 맑스가 편집장으로 있었던 「전진」이라는 신문에 실린다.)

슐레지엔에서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독일 극작가, 시인, 소설가)이 태어나기 14년 전에 일어났던 이 봉기를 토대로, 그가 쓴 연극「직조공들」(1893)은 슐레지엔 직조공들이 겪는 고통과 봉기의 실패를 그려내고 있으며, 이는 독일 전역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케테 콜비츠의 <직조공들의 봉기> 연작

연극「직조공들」을 본 이후, 케테 콜비츠는 이를 소재로 한 판화 연작을 1893년에서 1898년까지 제작했다. <직조공들의 봉기>라는 이름으로 엮은 연작 판화는 <궁핍>, <죽음>, <음모>, <직조공들의 행진>, <폭동>, <결말>로 총 6점이었다.







폭동 Sturm

1897, 에칭, 매조틴트 Etching and mezzotint on wove paper

<폭동>은 직조공 봉기 연작 중 <결말> 전의 작품으로, 사장의 집에 항의하러 간 직조공들이 노래를 부르고 난 직후의 모습을 그렸다. 닫힌 사장의 집 철문과 우아한 곡선, 그 문을 잡고 있는 뼈가 불거진 직조공의 거친 손이 대비를 이룬다. 특히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선은 마치 직조공들의 실을 일부러 끊어내어 붙인 것처럼 보이는데, 케테 콜비츠가 어느 정도로 섬세한 조각을 했는지 느낄 수 있다.


<농민전쟁> 연작

케테 콜비츠는 침머만의 「대농민전쟁의 일반역사」에서 영감을 받아 1901년에 <농민전쟁> 연작 작업을 시작했다. <쟁기 끄는 사람들>, <능욕>, <날을 세우고>, <지붕 밑 방에서 무장>, <폭발>, <전쟁터>, <붙잡힌 사람들> 등으로 구성된 작업을 1908년에 끝냈다.

15세기 말 16세기 초의 농민들은 전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없었다. 당시 사회의 상층부를 이루고 있던 성직자, 제후, 귀족 등은 자신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모든 부담을 사회의 최하층에 속했던 농민들에게 떠넘겼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가져온 자유에 대한 갈구는 농민과 빈민을 고무시켰다. 토마스 뮌처는 급진적인 이론을 전개했고 그의 지도 아래 1525년, 독일의 3분의 2에 달하는 농민들의 참여로 농민전쟁이 시작되었다. 종교개혁 이전부터 간헐적으로 있었던 봉기에 억압된 분노가 더해져 봉기는 급속히 퍼져나갔고 거기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도 가속화되었다. 농민전쟁은 참혹했다. 마을이 통째로 불타고 대량학살 또한 쉽게 저질러졌다.(농민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루터는 중간 계급과 귀족, 제후의 편으로 돌아섰다.)

농민전쟁 시기(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는 서양 미술사에서 르네상스가 꽃피던 피기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 미켈란젤로 등의 거장들이 대작을 쏟아내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이 시기의 조각가이자 목판화인 리멘슈나이더는 농민전쟁에서 농민들의 편에 섰다는 이유로 투옥되어 고문당한 후 작품활동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끔찍했던 농민전쟁을 케테 콜비츠가 현대적으로 부활시킨 것이 바로 <농민전쟁> 연작이다.











쟁기 끄는 사람들 The Ploughmen

<농민전쟁> 연작의 첫 번째 작품 Peasants' War the 1st Leaf 1906, 에칭, 애쿼틴트 Etching and Aquatint, 31.4×45.3cm

Good Morning

Morning의 어원은 독일어의 Morgen이다. 평지가 대부분인 독일에서 사람이 직접 바퀴가 달린 쟁기로 밭을 갈았던 시대에서, Morgen이라는 말은 한 사람이 한 나절동안 가는 밭의 양이라는 뜻이다. 아침은 해가 뜰 때부터 점심을 먹기 이전까지의 시간을 말하는데, 당시 점심을 오후 3시에 먹었다는 것에 의하면 아침에 해당하는 시간은 새벽 5시부터 오후 3시까지로 거의 하루 종일을 말한다. (*Good morning이라는 말을 영주가 백성(농노)에게 말한다면 그것은 “밭 많이 갈아, 받을 잘 갈아라.”라는 말이 된다.) 지금 통용되고 있는 가장 흔한 아침 인사 Good Morning에는, 아침 Morning, 한 나절동안 한 사람이 간 밭의 양 Morgen에서 시작하여, Morning의 역사, Morgen의 역사, 농노의 역사, 노동의 역사가 모두 들어있다. 아무리 일을 해도 가질 수 있는 것이 없었던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분노는 아주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콜비츠는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쟁기 끄는 사람>은 <농민연작>의 첫 번째 그림이다. 역사적으로 쟁기질하는 사람이 작품의 주인공이 되기는 이 작품이 처음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콜비츠가 어떤 사람인지 한 마디로 줄여 말할 수 있다. 1840년대 이후부터 노동자를 그린 작가는 여러 명 있었으나 전 작품의 주인공으로, 이야기로, 한편도 빼놓지 않고 모든 작품에서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삼은 작가는 콜비츠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주제가 오직 노동자(Labo(u)r: 지붕없는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를 향했던 작가는 콜비츠가 유일하다













어머니들 The Mothers

<전쟁> 연작의 여섯 번째 작품 War the 6th Leaf 1922-1923, 목판 Woodcut, 34.0×40.0cm

어머니의 치마폭은 넓다

<전쟁> 연작의 마지막 작품인 어머니들의 작품에는 총 11명의 사람이 있다. 케테 콜비츠는 그 어떤 언급도 하고 있지 않지만 의도적으로 하나의 치마폭을 형상화하여 어머니라는 거대한 모성을 표현하고 있다. 그 안에는 고통과, 불안, 미래에 대한 초조 등, 우리 삶의 어려움이 모두 들어있다.

“어머니의 숨결 속에서 우리들은 자라났다... 젊은 시절 어머니가 겪었던 심한 고통이, 비록 어머니는 어머니 역할에 완전히 빠져들지는 못했지만, 이후 어머니의 태도에 영향을 끼쳐 성모 마리아처럼 어딘지 거리가 느껴지게 만들었다. -「회고록」에서


20세기 동아시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예술가를 한 명 꼽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케테 콜비츠일 것이다. 시대의 욕구가 있었을 때 케테 콜비츠는 중요한 힘으로 작동해왔다. 70년대, 80년대 미술, 민중과 진보를 말한 사람들(반독재 민주화세력)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케테 콜비츠였다.

메디치가의 재력과 후원으로 완성된 예술작품은 모두 농민과 노동자의 피땀 위에 서 있다. 우리가 로마의 바티칸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고, 다빈치의 작품을 보고 감탄할 때, 우리는 너무도 쉽게 그 뒤에 있었을 당시 민중들의 고통을 잊게 된다. 그런 우리에게 노동자의 고통과 사회참여의식을 담아낸 콜비츠의 작품은 시대의 아픔과 소통하는 예술의 역할을 말하고 있다.

3월 7일의 강의 자리에 함께해주셨던 김민웅 교수는 강연 말미에, 동화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서 공주가 왕자의 입맞춤으로 백년간의 잠에서 깨어나 현실을 마주한 것과 같이, 서해성 기획자가 불러낸 케테 콜비츠와 그의 작품들은 잠들어 있던 우리를 일깨우고 있다고 말했다.

명작은 언제나 현재적이다. 역사에 뿌리를 내리고 어제보다 더 어제를, 내일보다 더 내일을 오늘로 가져오고자 치열하게 살아낸 케테 콜비츠의 작품이 우리 앞에 섰다. (글_박유진, 차홍선)

*이 글은 서해성 전시기획자의 강연을 토대로 구성된 글입니다.